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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가을 May 18. 2021

혹시 새 좋아해?

낯가리는 어른들의 연애

2020. 08. 14


남자친구와 정식으로 교제를 시작한 날. 담백한 고백과 일종의 포부를 말하는 시간이 끝나고 정적이 찾아왔다. 부끄러운 둘은 입술만 옴싹달싹하고 있다. 연인이 된 직후에는 보통 어떤 대화를 하지? 돗자리에 앉아 손가락만 꼼지락 거리고 있는 내 옆으로 비둘기 두 마리가 지나갔다. 남자친구가 드디어 어색함을 깰 수 있는 소재를 찾았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혹시 새 좋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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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후반이 되면서 사람에게 믿음을 가지기까지 통과해야 할 단계가 더 많아졌고, 절차는 까다로워졌다. 마음의 문을 열기까지 더 오랜 시간이 걸리고, 사실 문을 열 필요성을 잘 느끼지 못한다. 이미 마음에 들어온 내 사람들만 챙기며 살면 안 되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니 관계에 애쓰지 않고, 오히려 이렇게 담백한 나를 좋아하는 이들도 많아졌다.


문제는 내가 정말 좋아하지만 낯선 사람들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하는지, 마음을 어떻게 열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거다. 약 30년을 다른 환경에서 다르게 살아온 사람과 이토록 짧은 시간에 가까워진단 말인가!


다행히 남자친구 또한 보폭이 큰 편이 아니었으며, 유난히 작고 느린 내 발걸음에 맞춰주려 노력했다. 우리는 그 후로도 하고 싶은 말 중 과반수 이상을 걸러내 상대에게 전했고, 상대가 어떤 것을 좋아하고 좋아하지 않는지 천천히 조금씩 알아갔다.


시간을 두고 상대를 알아간다는 것은 좋은 점이 더 많지만, 때때로 오해를 부르기도 한다. 서로의 성향이나 생활패턴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어떤 행동들은 무수한 억측을 만든다.


나는 잠이 많다.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숙면을 취할 수 있고, 수면의 질을 그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긴다. 때문에 밤 10시부터 오전 6시 사이에 오는 모든 알림을 차단해주는 ‘방해금지 모드’를 설정해놨다. 문제는 이 사실을 잊은 채 잠들어버린 적이 몇 번 있었고, 그때마다 핸드폰을 귀에 댄 남자친구는 내 목소리 대신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없어...’라는 영문모를 수신 차단음을 들어야 했다.


남자친구는 워커홀릭이다. 일상의 어떤 요소보다 일이 우선순위이고, 그만큼 바쁘게 또 정신없이 일한다. 그는 우리가 만나기로 한 평일 저녁, 약속을 취소했다. 물론 ‘일’ 때문이었다. 문제는 한 번이 아니라는 거다. 이런 일이 두 번 정도 반복됐다. 연애 초기에, 그것도 일주일에 한 번씩밖에 못 보는데 이렇게 쉽게 약속 취소를 한다니. 나에게 소홀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리고 얼마 전, 퇴근 후 공원에서 산책을 했다. 공원을 절반쯤 돌았을 때 남자친구에게 물었다. "오빠는 연애할 때 어떤 스타일이야? 오빠가 약속을 갑자기 취소하면 어쩔 수 없는 상황인 거 알지만 서운해. 약속이 취소될 것 같으면 사전에 상황설명이라도 해줬으면 좋았을 텐데. 난 오빠가 이런 것들에 익숙지 않은 건지 궁금해."


하고 싶은 말을 최대한 둥글게 다듬어 전했고, 그간 서운한 티를 내지 않았던 터라 남자친구는 전혀 예상 못했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는 그날 이후 디테일한 모든 일상을 나와 공유했다. 일이 바쁜 건 여전하고 생각지 못한 업무 스케줄이 생길 때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때마다 함께 미리 고민하며 만나는 시간과 장소를 좀 더 유동적으로 설정하고 유연하게 대처한다. 물론 이제는 나도 전화로 잘 자 인사하고 잠에 든다.


한 가지 문제를 해결했을 뿐인데, 둘 사이에 생기는 다른 일들에 같은 방법이 적용 가능했다. 자잘한 일들은 같은 공식을 적용하여 문제를 쉬이 풀어올 수 있었고, 지금껏 서로 큰 소리나 아쉬운 소리 한 번 내지 않고 잘 지내오고 있다.


적당한 거리를 두며 가까워지되,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를 때는 그냥 솔직하게 묻고 말하기. 서로 배려하며 맞춰갈 마음과 인내가 있는 두 사람이라면 인연으로서 끈끈해지기 좋은 방법이라 생각한다. 너무 빠르면 체하고 너무 참으면 멀어진다. 내 기준 두 사람에게 가장 잘 맞는 속도를 찾아 맞춰가는 게 안정적인 연애의 가장 중요한 요건이다.


n번의 연애를 통해 장착한 센스와 배려, 인내 또 인내. 꽤 쓸모 있는 것들을 데리고 좀 더 성숙한, 성공적인 연애에 도전해본다. 문득문득 과거 연애의 기억을 타고 회의감이나 갑갑함 같은 것들이 울컥 올라올 때가 있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의 연애는 다르다고, 지금의 연애는 좀 더 성숙한 사람들의 것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인다.


연애는 일종의 마라톤이다. 두 사람이 같은 페이스로 끊임없이 달려야 한다. 한 사람이 먼저 지칠 수 있고 둘이 함께 지칠 수도 있다. 그럴 때마다 주저앉는 대신 서로를 이끌어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야 하고 나 또한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 그만큼 처음부터 페이스 조절이 필요한 거다. 처음부터 100m 경주를 하듯이 전속력으로 뛰어다녔던 예전의 연애를 생각하면 저절로 고개가 도리도리. 경쾌하지만 결코 느리거나 가볍지 않은 지금의 우리 발걸음이 좋다. 앞으로도 잘 지내보자 오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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