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살이 안 찐다. 아니 찔 수가 없다. 늘 키 161에 45~6을 유지하고 있다. 친구들이 비결이 뭐냐고 물어보면 “위장염 달고 살면 다이어트 안 해도 친구들아.” 하고 꿀팁을 알려준다.
내 위장은 내 몸에서 가장 예민한 장기다. 거기다 취향이 참 까다롭다. 돼지고기를 비롯한 육지 고기, 유제품, 밀가루가 들어간 음식, 매운 음식, 아이스크림, 카페인 그리고 술만 먹었다 하면 높은 확률로 탈이 난다.(유제품, 카페인, 술은 약 80% 확률) 또 아무리 건강한 집밥이라고 해도 과식을 하면 그날은 바늘로 손 따는 날이 되는 거다. 이렇게 적어놓고 보니 참 고달픈 일상이다.
이렇게 살다 보니 특별한 경우 아니고서야 셀럽들의 다이어트 식단만큼이나 건강식 위주로 식사를 한다. 나에게 맞는 건강식단이 자리 잡을 때까지 아래와 같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그냥 양을 줄여 먹기만 하면 되겠지 > 또 탈이 난다 > 그럼 자극적인 음식을 줄이고 채소와 과일 비율을 늘려 먹자 > 탈은 안 나지만 더부룩한 건 나아지지 않는다.
체질 한의원을 가다
회사 근처에 아주머니들 사이에서 입소문 난 체질 한의원이 있다. 사실 몰랐는데, 예약하려고 하니 첫 진료까지 삼 개월을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오… 맛집 심리가 발동해서 기다리기로 했다.
첫 진료 때 불편한 증상들이 있으면 다 써내라고 했고, 내 증상들은 네모칸 밖으로 한참을 삐져나왔다. 두 원장님이 계셨는데, 첫 원장님과 1시간 가까이 증상 관련 상담을 했다. 여기서 1차로 내 예상 체질 유형이 나온다. 곧바로 두 번째 원장님 방으로 옮겨 맥을 짚는다. 10분 맥을 짚고, 추정되는 체질에 맞는 침을 놓는다. 마지막으로, 대망의 식단.
2주 동안은 무조건! 꼭! 종이에 써주는 음식들(동그라미 안에 있는)만 먹으라고 했다. 하나라도 어기면 내 정확한 체질 분석이 불가하니 말이다. “취지도 좋고 프로세스도 다 좋은데.. 진짜 이것만 먹어야 해요?” “네, 조미료까지 꼭 지켜 드세요.” “스님도 이렇게는 안 드실 것 같은데요?” “이렇게 드셔야 합니다.” “그럼 선생님은 매일 이렇게 드세요?” “네.”
그렇다면 할 말이 없지. 건강을 위해 2주 간 식욕을 한 번 이겨내 보기로 했다. 그나마 내가 좋아하는 음식과 먹을 수 있는 음식의 교집합은 과일 그리고 회였다. 그마저도 초밥은 밥이 양념되어있으니 먹을 수 없었다.(회를 먹을 때도 간장 등 양념에 찍어먹을 수 없다.)
그 2주는 참으로 힘든 동시에 일종의 쾌감이 몰려오는 기간이었다. ‘내가 이 어려운 걸 잘 지켜내고 있다니’와 같은 뿌듯함이었다. 매일 아침 흰쌀밥과 생선, 맨 김, 오이를 먹고 점심에는 구내식당에 도시락을 싸갔다. 메뉴는 맨 김과 삶은 문어, 집 고추장, 그리고 딸기 혹은 포도. 저녁은 아침과 동일. 그 2주 중에는 남자친구와의 1주년, 가장 친한 친구의 생일 등 큰 이벤트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때마다 나는 횟집을 가거나 과일을 먹었다.(이해해준 내 사람들 고마워.)
그리고 매일 점심시간마다 한의원에 가서 오늘의 내 몸 상태와 증상의 호전 정도, 그리고 식단을 보고했다. 둘째 원장님이 어찌나 꼼꼼한 지, “오늘은 흰쌀밥이랑 바다 생선구이를 먹고, 토마토 주스 마셨어요!”라고 말하면 “어떤 바다 생선이요? 그리고 토마토 주스는 밖에서 사 드신 거 아니죠?”라고 되물어본다. 생선은 박대를 먹었고, 토마토 주스는 밖에서 사 먹긴 했는데 시럽 빼고 토마토만 갈아달라고 주문한 거다.라고 말하면 “박대 드신건 잘하셨고, 토마토 주스는 아무리 시럽을 안 넣었더라도 집에서 챙겨 들고 다니시는 게 더 좋아요”라고 조언하는 식이다.
결론을 말하자면, 2주 뒤 나의 위장 상태는 많이 호전되었다.(몸무게도 2키로나 더 빠져 44kg을 기록했다.) 소량이지만 밥을 먹고도 이렇게 속이 편안할 수 있다니 그저 행복했다. 굶주림의 고통을 덮을 만큼 큰 행복이었다.
하지만 1) 목에 이물감이 느껴지는 역류성 식도염은 쉽게 호전되지 않았고, 2) 너무나 실천하기 힘든 식단, 3) 월-토 매일 같이 병원에 방문해 몸 상태를 보고해야 하는 번거로움 때문에 2주 뒤 더 이상 한의원을 가지 않았다.
그래도 그 이주 간의 경험 덕분에 내가 어떤 유형의 음식을 어떻게 먹었을 때 속이 편해지는지 알게 됐다.(평소 관심 없던 생선까지 제 손으로 살 정도로 좋아하게 됐다.)
그 후 아침과 저녁은 집에서 최대한 식단을 지켜 먹고 있는데, 점심을 일상식으로 먹게 되면서 이전만큼 자주는 아니어도 배탈이 다시 주기적으로 나기 시작했다.(생리 기간에는 100% 확률로) +항생제를 먹어야 할 때가 생기면 내 위장은 또 리셋되어 버린다. 후.. 인생.
남들은 먹고 싶은 음식 마음껏 잘만 먹는데, 나는 매 끼니마다 섭취 가능 유무를 꼼꼼히 따지고 난 뒤에야 먹을 수 있다. 가끔 참지 못해 우유나 당류가 들어간 디저트라도 먹을라치면 죄책감까지 들 정도다.
면역세포 70% 이상이 장에 모여있다고 한다. 위장을 우선 튼튼하게 만들면 다른 잔병들도 함께 개선되지 않을까? 위장을 우선순위로 잡고 다시 한번 식단관리에 돌입해야겠다.
내 위장, 힘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