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우리네 집에는 또?!라며 투덜거릴 만큼 반복적인 것들이 있었다. 예를 들면 나른한 일요일, 거실을 타고 흘러 들어오는 ‘전국 노래자랑’ 프로그램 시작을 알리는 트럼펫 소리. 어스름하게 노을이 지는 여름밤 들리는 ‘6시 내고향’ 오픈송, 학창 시절 집을 나서기 오 분 전 들리는 ‘인간극장’의 다음 이야기 배경음악이 있다.
학창 시절 아침마다 틀렸던 비틀즈의 ’countyroad’는 지금 우연히 노래를 들어도 그때 그 시절의 나를 불러들이며, 학교를 가기 싫어 끙끙이던 때가 떠올라 혼자 웃음 짓곤 한다. 노래는 그렇게 어린 시절의 나와, 집을 불러들인다.
가족의 품을 벗어나 살아서인지, 세상이 변해서인지 명확하게 알 수 없지만 요즘의 세상은 마냥 그렇게 반복적이지만은 않은듯하다. ‘이주의 신상’이라든지 ‘한정판’이라던지, 반복보다는 새로운 것들로 가득한 세상이다. 내가 뱅글 뱅글 돌아도 똑같던 세상은 이제 가만히 서 있어도 뱅글뱅글 돌아가는 세상이 됐다.
새로운 것에는 흥미로움과 비례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눈에 익숙하게, 맛에 익숙하게, 오감을 통해 흡수하느라, 현재 우리네 집들은 그렇게 바쁜 건지 모르겠으나, 이렇게 뱅글 뱅글 도는 세상 속에서도 과거의 모습 그대로, 우리네 삶에 들어와 새로운 흥미를 주는 것이 있다. 그것은 과거부터 우리와 함께해 노력 없이 단순하게, 그저 흥미롭게, 즐겁게만 할 수 있게 해주는데 이 익숙한 새로움은 빠른 세상에서 위로와 재미를 전달한다. 오늘 소개하는 과거와 현재를 담은 것은 바로 '잔망 루피'다.
흰색 배경만 봐도 “야 ~! 뽀로로다”라는 말이 들리고, 초록색 꼬리만 봐도 “크롱” 하는 '뽀롱뽀롱 뽀로로'에 루피가 있었다. 뽀로로는 2003년에 시작된 교육용 애니메이션 프로그램으로 아이코닉스/스튜디오 게일, 오콘, SKB, EBS, 미라클상사가 공동으로 제작한 프로그램이다.
그 속에서 루피는 요리를 하고, 자주 울고, 다정한 비버였다. 그런 루피가 점찍고 돌아온 아내의 유혹의 장서희처럼 우리의 삶에 잔망스럽게 돌아왔다. 다양한 표정을 가지고 귀엽게, 웃기게 변신해 나보다 회사를 더 가기 싫어하고, 더운 여름을 괴로워하며 나의 행운을 바란다.
잔망루피는 2019년 픽스아트라는 앱을 통해 한 중학생이 루피 사진을 수정하며 탄생했다. 잔망루피는 현재 잔망루피라는 만화책, 스마트 스토어, 인스타그램, 카카오 이모티콘 샵, 무신사 스토어, 유튜브로 만날 수 있으며 네이버 스마트 스토어 기준으로 디자인 문구, 패션잡화 디지털, 뷰티 헬스, 식품의 상품군이 있다.
루피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백화점 팝업이나, 온라인 스토어에서 굿즈를 구매하며 애정을 표현하고 즐기는데, 백화점 팝업은 웨이팅이 있을 만큼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 애정 담아 내가 구매한 잔망루피 굿즈 제품은 '카카오톡 선물하기'에서 단독으로 출시된 제품으로 90cm의 큰 사이즈의 잔망루피 바디 필로우 제품이다. 사이즈가 작았던 기존 잔망루피 봉제인형들의 아쉬움을 해소시켜주는 큰 사이즈의 루피는 귀여움도 배, 폭신함도 배, 애정도 배로 샘솟는다. 잔망루피와 동침을 하게 된 이후부터 침구 정리의 마지막은 루피에게 이불을 덮어주는 것이 되었다.
잔망루피가 사랑을 받는 이유는 과거의 모습 그대로이지만, 솔직해진 모습이 수많은 성격과 말들을 품고 있는 우리의 속마음을 속이 시원할 만큼 대신 이야기해주기 때문이기도 하고, 변한 게 없는 것 같지만 알게 모르게 바뀐 나와 변하지 않은 나를 루피를 통해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잔망루피는 그렇게 우리 삶에 '루통령'처럼 스며들었다.
그저 뽀로로의 친구였던 루피가 잔망루피로써 많은 사랑을 받는 것을 보며 삶은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음을 체감하게 하기도 한다. 다음의 세상에는 에디가, 혹은 크롱이 잔망스럽게 삶에 등장할지도 모르겠다.
잔망루피를 좋아하는 것은 빠르게 변해가는 세상 속 변하지 않는 것들을 매 순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게도 한다.
오늘이 지나고 내일이 와도, 어제를 회상해도 항상 그 자리에 있는 것, 나를 위로하고 즐거움을 주는 것은 생각해 보면 새로운 것이 아니라 항상 그 자리에 있던 어떤 것일지 모른다.
엄마와 함께 먹는 신메뉴 떡볶이, 오래된 친구와 보는 새로 개봉한 영화, 가장 아끼는 오래된 옷을 입고 간 핫플레이스. 즐거움은 떡볶이와, 영화, 장소가 아니라 엄마, 오래된 친구, 아끼는 옷이었음을 루피를 좋아하며 체감한다.
혼자 먹는 쌍쌍바보다 나눠먹는 쌍쌍바가 맛있는 것처럼 90cm의 루피와 침대를 나눠쓰니 잠자는 시간이, 침대 속의 시간이 더 달다. 고작 인형일 뿐인데 이 루피가 나에게 전하는 위로과 즐거움이 커, 나는 꽤 오래 잔망스러운 루피를 사랑할 것이다. 어제도 오늘도, 솜으로 가득 찬 이 인형이 내 세상을 깊고 편안하게 만들어주고 있다. 새로운 것들이 가득한 세상이지만 항상 그 자리에서 나를 구하는 여전한 것들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겠다 다짐해 본다.
변화의 시대 속 영구적인 것들은 언제나 과거를 추억하게 해줄 것이다. 그리고 추억은 앞으로 나아갈 힘을 준다. 그렇게 루피는 추억과 힘을 전달하며 나의 세상을 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