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의(壽衣)를 입히는 남자

열여덟 번째 글: 어머니와 쇠고기 국밥

by tank

어지간해서는 병원에 가지 않으시던 어머니께서 생전 처음으로 병원에 입원하신 것은 동네 의원에서의 진료 이후였다.


예전과 달리 좀처럼 무얼 드시지도 못하고 속이 불편하시다고 해서 모셔가 진찰을 받았더니 암 징후가 보인다며 큰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아보라는 의사의 말에 근처의 종합병원에서 검사한 결과 말기 위암이 한창 진행 중이라고 했다.


의사는 은연중에 수술을 권유했지만 워낙 고령이라 힘든 수술을 견뎌낼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고 수술을 한다고 해서 결과가 좋아진다고 자신할 수 없다는 의사의 면피성 발언과 무엇보다 수술에 대한 어머니의 거부가 심해 고민 끝에 며칠간의 입원을 통해 간단한 시술만 하고 집으로 모셔왔는데 평생 집 말고 다른 곳에서 주무신 적이 없는 심지어는 자식들 집에 다니러 가셔서도 주무시는 척 누워 밤새도록 뜬 눈으로 뒤척이다 동이 트기 무섭게 집으로 돌아오시는 것이 편하셨던 어머니로서는 자식들이 곁에서 밤새워 함께 지내며 간호를 했어도 그 며칠의 병원 생활이 견딜 수 없을 만큼 힘들었던 모양으로 두 번 다시는 병원에 가지 않겠노라고 못 박아 이야기하실 정도였다.


시술 후 초기에는 조금은 편해지신 것 같기도 했으나 병이 깊어지면서 누워계시는 날이 많아지자 어머니를 위해 좀 더 체계적인 간병을 해드릴 요량으로 집에서 가까운 근처 요양원과 상담을 하고 하루쯤 지내보시는 것도 괜찮겠다 싶었으나 채 하루도 지나지 않아 다시 모시고 온 것은 다른 형제들의 반대도 심했고 무엇보다 어머니께서 그곳에서의 시간을 못 견디셨기 때문이기도 하다.


늘 조용한 곳을 좋아하셨던 어머니께서는 여러 사람이 오가는 병원보다 당신 눈에 익숙한 곳이어야 안정을 취할 수 있으셨고 그런 어머니를 위해 자식들은 저마다의 사정에 맞춰 밤낮을 교대로 어머니 곁을 지켜드렸는데 워낙 청정을 가리시는 분이라 아들들 앞에서는 물도 안 드시려고 하다가도 딸들과 며느리들이 곁에 있을 때만 조금씩 물 같은 죽을 드시기도 하고 비로소 생리현상을 해결하곤 하셨다.


그나마 아직 부축을 받아 몸을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는 억지로라도 당신의 몸을 일으켜 움직이시다가 더는 거동이 힘들어 먹고 마시는 것조차 할 수 없게 되셨음에도 총기를 놓지 않는 어머니를 위해 자식들이 해드릴 수 있는 것이라곤 기껏해야 간호사를 초빙해 수액을 놓거나 아기들이 쓰는 면 손수건에 물을 적셔 입안을 닦아드리는 것이 전부였다.


겨울이 초입에 들면서 어머니의 몸은 날이 갈수록 눈에 띄게 수척해졌고 한 번씩 호흡이 끊겼다가 돌아오기도 하는 예후로 인해 임종이 멀지 않으셨음을 직감한 형제들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어느 날 아침이었다.

어머니는 곁을 지키고 있는 자식들을 향해 이전보다 조금은 더 힘이 실린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어디 쇠고기국밥 하는 곳이 있으면 한 그릇 사 와다오.

쇠고기국밥이 너무 먹고 싶구나.”


곁을 지키던 며느리가 부랴부랴 시장으로 달려가 봐 온 재료를 다듬어 국밥을 만들어 올려드리기 무섭게 한 그릇 뚝딱 비워내신 어머니는 “고맙다. 참으로 맛있게 잘 먹었다.” 하시고 자리에 누우셨는데 이전에는 물만 마셔도 게워낼 정도로 힘들어하시던 분이 국밥을 드시고도 아무렇지 않은 듯 편안한 모습이셨다.


쇠고기 국밥 이후로는 물 한 모금도 드시지 않은 채 주무시기만 하시던 어머니께서 선종(善終)하신 날은 음력 설날이었다.

전날 늦게까지 모여 어머니의 위중을 살피다가 귀가한 자식들을 대신해 밤새 뜬 눈으로 곁을 지키다 새벽녘 잠깐 선잠이 든 딸에게 “이제 간다.”는 한마디 말씀을 하시고는 편안히 눈을 감으셨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이날은 꼭 13년 전 선친께서 선종하신 날로 그날도 음력 설날이었다.

큰 형님 말씀에 따르면 어머니께서 떠나시기 며칠 전부터 아버지가 계속 꿈에 보이셨다고 한다.

그래서 어머니 모셔가려고 마중 오셨는가 여쭸더니 그때마다 “아직 아니다.” 하시며 손을 저으시다가 당신이 떠나셨던 설날 아침에야 비로소 어머니의 손을 잡고 모셔가신 것이다.


돌이켜보면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드셨던 쇠고기국밥 한 그릇은 어쩌면 아버지와 함께 돌아가신 뒤에도 제사 때문에 자식들이 번거롭지 않도록 배려해 주시기 위한 양분이 아니었던가 싶은 생각도 든다.

작가의 이전글수의(壽衣)를 입히는 남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