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의(壽衣)를 입히는 남자

열일곱 번째 글: ㅂ氏 이야기

by tank


칠십여 평생을 혼자 살다 간 이가 있다.

내가 기억하는 그의 모습은 그의 인생의 후반 삼십여 년 동안으로 다리 한쪽과 손 한쪽이 불편한 약간의 장애를 가지고 있었으나 성격은 늘 밝아서 사람들을 만나면 누렇게 변색된 이를 히죽 드러내며 언제나 사람 좋은 미소로 활짝 웃어 보이던 이였다.


젊은 시절 불편한 몸이었지만 생계를 위해 일을 해야만 했던 그는 친분을 가장한 몇몇 사람들이 그의 변변치 않은 노동력을 푼돈에 쓰거나 그 푼돈마저 떼어먹는 일들로 인해 상처를 받는 일이 다반사였지만 좁은 부엌과 부엌 위의 다락이 달린 단칸방에서 맞는 외로움보다는 이용을 당하더라도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는 것을 좋아했으므로 어느 정도 육체적 한계를 느끼기 전까지 노동에 대한 대가를 떼이더라도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다는 것만으로 그는 그저 허허 웃기만 했다.


나이가 들어 불편한 몸으로 더는 일을 할 수 없게 되고 사람들과의 관계도 조금씩 줄어든 그에게 낙이 있다면 저녁이면 영업을 마친 길 건너편 세탁소에 들러 동년배의 사장과 어울려 술 한 잔씩 걸치는 것이었으니 술집을 가는 것이 아니라 동네 슈퍼에서 사 온 술을 세탁소 한쪽 공간에서 빈약한 안주를 곁들이는 것이 전부였다.

그런 연유로 때때로 어디 모임이나 회식 자리에서 그를 아는 사람들이 그를 불러주기라도 하는 날이면 그는 늘 함박웃음을 짓곤 했다.


그가 집안 어딘가에 만만치 않은 돈을 숨겨놓고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 되었는데 그것은 평소에는 지독히 궁색하게 굴더라도 명절 때만 되면 번듯한 옷차림으로 집을 나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사는 누나 집에 들러 조카나 조카의 자녀들에게 두둑하게 용돈을 주고 온다는 소문 때문이기도 하지만 몸이 불편한 그가 도로를 횡단하다가 오토바이에 치어 병원에 입원했을 때 오토바이 운전자가 경제적 여건이 되지 않아 병원비를 계산하지 못하자 후에 오토바이 운전자에게 돌려받기로 하고 자기 집에서 현금을 들고 나와 적지 않은 병원비를 계산했다는 사실이 사람들을 통해 입에서 입으로 옮겨진 때문이기도 했다.


가끔 그를 아는 사람들이 농 삼아 “돈 꿍쳐놓은 것 다 어디 두고 그렇게 궁색한 티를 내느냐”며 타박을 줘도 그는 예의 그 히죽거리는 웃음으로 ‘내가 돈이 어디 있다 그래?’ 하고 얼버무리기 일쑤였다.

그는 은행에 돈을 맡기지 않고 늘 현금을 들고 다녔는데 이유 중 하나는 은행창구를 이용하는 방법이 그에게는 어렵고 불편한 탓도 있거니와 ‘내 돈은 내가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집착이 컸기 때문이기도 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자신 외에 다른 사람을 믿지 못하는 경향이 컸다고도 할 수 있겠다.

그도 그럴 것이 젊은 시절에 주변 사람들에게 이용을 당하거나 푼돈을 떼어 먹힌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가 병원에 입원한 것은 불편했던 무릎을 수술하기 위해서였다.

장애를 가지고 있기도 했지만 돈이 아까워 오랫동안 방치해 두었던 무릎으로 인해 더는 이전처럼 거동이 쉽지 않게 되었던 탓에 큰맘 먹고 수술을 하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한 번씩 그가 입원해 있는 병원 앞을 지나다 보면 어쩌다 한 번씩 갑갑한 병실을 벗어나 바람을 쐬러 밖으로 나와 서성거리는 그를 만날 수 있었는데 병실에만 있는 것이 답답하기도 했고 지나치는 이들 중에 아는 사람들을 만나기라도 하는 것이 낙이기도 해서 여전히 허허거림으로 밝게 웃는 모습이었다.

무릎 수술은 잘 되었고 치료만 잘 받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퇴원할 수 있다던 그의 모습이 좀처럼 보이지 않던 어느 날 그가 갑자기 급성폐렴으로 인해 큰 병원 응급실로 옮겼다는 뜻밖의 소식이 들려왔다.


급성폐렴이라고 해도 치료로 회복되는 사람도 종종 보아왔던 터라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지만 한 번씩 병원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그의 병세가 생각보다 깊어 의식이 없이 오늘, 내일 한다는 것이었다.


중환자실이기도 했지만 코로나 시국이어서 면회를 할 수 없었으므로 불과 얼마 전까지 오며 가며 병원 앞에서 만났을 때 빈 소리라도 ‘퇴원하면 맛있는 것 먹으러 가자’ 던 미소의 기억보다 날이 갈수록 깊어진 그의 병세는 더 이상 치료가 힘들 만큼 증상이 악화되어 갔고 그것은 곧 그의 임종이 머지않았음을 알리는 것이기도 해서 안타까움을 더해갔다.

농담으로라도 한 번씩 만나면 입버릇처럼 ‘나도 갈 때 당신이 잘 보내주었으면 한다.’며 장난 어린 소리를 늘 그렇듯 특유의 허허거리는 웃음과 함께 던지기는 했으나 막상 그의 임종을 맞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 앞에서 직계 혈육이 아무도 없어 자칫 무연고자로 분류되어 무연고 장례를 치르게 될지도 모른다는 염려로 어떻게 하면 그의 장례를 외롭지 않게 치러줄 수 있을까 궁리하는 중에 그의 조카 된다는 사람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오래전 작고하신 그의 큰 누님의 맏이로 그와는 열 살 안쪽의 나이 차가 나 숙질간이라기보다는 오누이 같은 감정에 더 가깝게 지낸 사람으로 그가 명절이면 반듯한 옷차림으로 찾아가곤 하던 사람이었다.

“평생 외롭게 사셨지만 저희들하고는 자주 왕래를 했고 어머니 형제분들 중에 다른 분들 다 돌아가시고 이제 마지막 남은 분입니다. 언제 가실지 모르지만 가시는 길은 외롭지 않게 좀 도와주십시오.”


무릎 수술을 하기 위해 병원에 입원하던 날부터 알게 모르게 뒷수발을 담당해 왔던 터라 조금은 피곤한 기색이었지만 집안의 한 사람으로서 마지막까지 책임을 다하겠다던 조카 되는 이와의 만남 이후 급격히 상태가 악화된 그는 그로부터 일주일 후에 숨을 내려놓았다.

이미 사전에 그의 장례에 대해 조카 되는 이와 모든 상의가 되어있었기에 미리 정해둔 장례식장 측과 연락해 이송차를 보내 고인이 된 그를 모셔오는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유족이 다른 장례식장에서 장례를 치르기 원하면 바로 조치를 취해 시신을 인도해 장례에 차질이 없도록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던 해당 병원에서의 시신 인도는 몇 시간 동안 질질 끌었고 결국 기다림에 지쳐 화가 난 유족들의 항의에 그제야 시신을 유족들에게 인도하긴 했으나 더 큰 문제는 사망진단서 발급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자초지종을 살펴보니 가족관계가 증명이 되지 않으면 사망진단서를 발급해 줄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직계 가족이 없으면 방계로라도 가족관계를 증명해야 한다는 말에 고인의 조카 되는 이가 행정관청에 들러 확인서류를 떼고자 했으나 어느 서류에도 고인이 된 그와 조카의 연결고리를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병원 측의 완고함 때문에 몇 번이고 서류를 떼기 위한 방법을 찾다가 지칠 대로 지친 조카 되는 이가 ‘입원비며 치료비는 조카라고 다 받아먹고는 돌아가신 분 사망진단서 떼어 달라는 데는 증명이 안 돼서 못 준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항의를 하기도 했지만 병원 측은 예전에 타인에게 진단서를 떼어주었다가 소송을 겪었던 일이 있었다는 이유를 들어 자기 병원 장례식장에서 장례를 치르면 발급해 줄 수 있으나 타 장례식장을 이용하는 경우에는 서류가 확인되지 않으면 발급해 줄 수 없다는 완강한 태도를 보여 결국에는 물어물어 방법을 찾은 것이 공의에게 요청해 사망진단서가 아닌 시신검안서로 대체하는 것이었는데 두고두고 씁쓸함을 지울 수 없는 행태였음은 물론이다.


방계로라도 서류상 인척 관계를 증명하는 것이 어려웠던 이유는 고인의 부모 관계가 고인의 큰 누님 부모 관계와 교차되는 지점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 시절 부모님들이 개가(改嫁)를 겪으면서 호적정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이쪽 호적에도 저쪽 호적에도 등재되지 않은 채 친. 인척 관계가 유지되는 형태로 연세가 많으신 분들 중에 드물게 한 번씩 그런 경우가 있다고 했다.


우여곡절 끝에 그의 장례절차가 진행되는 동안 조카 되는 이의 가족들이 빈소를 지켰고 그를 기억하는 이들이 빈소에 들러 그의 마지막 가는 길이 외롭지 않도록 많은 사람들이 빈소를 찾아 인사를 나누었다.

조촐하지만 결코 초라하지 않았던 그의 장례는 장례식장의 일부 도움을 받기는 했어도 조카 되는 이가 장례에 든 비용 전체를 부담하였다.

부러 외면하여 무연고 장례로 한다 해도 크게 흉이 될 일은 아니었으나 인척으로서의 도리를 다하겠다는 마음이었다.


장례가 끝난 후 들려온 소식에 따르면 그의 유품을 정리하면서 그가 그동안 푼푼이 모아둔 돈의 일부나마 찾을 수 있었고 그때까지 오토바이 사고로 인한 병원비를 갚지 않았던 오토바이 운전자가 그의 마지막 소식을 듣고 급전을 마련해 인사를 왔다는 것과 그 돈을 일부는 돌려주고 일부를 보태 그의 이름으로 기부를 했다는 것이다.


많지 않은 돈이지만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아무도 모르는 곳에 꽁꽁 숨겨놓고 필요한 때에 조금씩 꺼내 쓰며 돈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던 그였으나 조카 되는 이가 그의 영혼을 위해 그의 이름으로 기부를 택했다는 사실을 그가 알게 된다면 그는 어떤 표정을 지었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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