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의(壽衣)를 입히는 남자

열 번째 글: 끝내 화해하지 못한 이별

by tank

H 영감님은 늘 호인의 미소를 품고 다녔다.

언제나 넉넉한 미소와 함께 온화한 말투는 주변 사람들에게 그가 꽤 괜찮은 사람으로 인식되기에 충분했고 나 역시도 오랫동안 H 영감님과 알고 지내며 그에게서 어떤 위화감이나 불편한 감정을 느낀다거나 한 적이 없었으므로 가끔 길에서 만나면 인사를 나누거나 안부를 묻는 정도의 친분이 있기도 했다.

연세에 비해 꽤 정정한 모습이었던 그분은 언제나 직장을 가지고 있었고 때때로 주변 이웃들을 위해 나눔을 갖기도 하고 간단한 수리 정도는 발 벗고 나서서 도와주기도 했다.


H 영감님이 돌아가시던 날은 그해 마지막 날로 그해 겨울 들어 가장 추운 날이었다.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아직 정정한 모습으로 어느 공단 건물의 야간 관리자로 근무하면서 틈틈이 건물 내 작은 수리도 하곤 하면서 지내던 그 어느 날의 일이었다.

한파주의보가 내려져 있었으나 겨울이라고 해도 한동안 그렇게 춥지 않았던 날씨 탓에 큰 부담 없이 한밤중에 건물 주변을 순찰하다가 급성 심정지로 인해 쓰러져 아침 출근길이던 직원들에게 발견되었으나 이미 숨을 거둔 후라고 했다.


영감님의 귀가 시간에 맞춰 아침준비를 하던 아내는 “부군께서 사망하셨습니다.”라는 경찰의 전화를 받고 처음에는 믿지 못했다고 한다.

“엊저녁까지 멀쩡하던 사람이 죽기는 왜 죽느냐?” 반문하며 아득해지는 정신을 붙잡고 재차 확인하였으나 경찰관과의 통화를 통해 전해진 영감님의 소지품에서 나온 주소와 이름, 그리고 신체특징은 분명 남편의 것이었으므로 출근 준비 중이던 아들과 함께 병원으로 가는 길에 내게 연락을 해왔다.


서둘러 병원 영안실에 도착한 나는 경찰 무늬가 선명한 지퍼 백을 열어 고인이 된 영감님의 모습을 확인하고 이미 사후경직이 시작된 몸을 정돈해 드린 후 경찰서에 들러 사고 정황을 확인하고 온 이제는 유족이 된 가족들과 장례문제에 대해 상담을 시작했으나 이내 곧 뜻밖의 연락을 받았다.

“검사지휘서에 부검 결정이 내려졌습니다.”


유족들이 전하는 경찰관의 말에 따르면 심야에 건물 외부를 순찰 중 한파로 인해 심정지가 왔고 아침에서야 다른 직원들에게 발견되어 현장조사와 경찰 공의의 검안이 끝나 “장례를 치르셔도 됩니다.”라는 답변을 받은 상태였으므로 장례절차를 진행해도 무방한 상태라 상주가 된 아들은 이미 주변에 부고를 알린 상황이었고 (이 부분에 대해서는 처음에 ‘무엇이 그리 급해서 벌써?’라고 생각하기도 했으나 그가 직장인이고 시간이 이미 출근 시간이 지난 시간이었으므로 곧 이해가 되었다.) 화장장 예약까지 끝낸 마당에 “부검을 통해 사인을 명확히 밝히라” 는 통보는 곧 장례절차 전반을 원점으로 돌려놓았다.


마침 그날은 금요일로 그해의 마지막 날이었고 부검을 하기 위해선 신년업무 시작일인 월요일까지 기다려야 했으므로 일반적인 3일 장으로 치르려던 장례는 부득이하게 5일 장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장례를 치러 본 사람들은 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문상객만 접대하는 것 같아도 한 번 장례를 치르고 나면 건강한 사람도 몸살을 앓게 된다는 것을, 하물며 5일장이라면 경제적 부담도 늘게 되지만 무엇보다 노령의 부인과 고인이 된 영감님 형제들의 건강문제도 있어서 세심한 주의가 필요했다.


임시방편으로 고인을 우선 안치실에 모셔놓고 부검일정에 맞춰 장례 기간을 조정하는 방안도 생각했으나 이미 밝힌 바와 같이 상주의 부고가 먼저 발송된 상태였으므로 여기저기서 조화가 들어와 빈소 한쪽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고 소식 빠른 동네 사람들 몇이 빈소를 찾아왔으므로 가족들과 의논 끝에 그대로 장례절차를 시작하기로 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였다.

유족현황을 기록하기 위해 상주에게 가족관계에 대해 질문을 하자 안 그래도 무뚝뚝한 편인 상주의 얼굴에 시름이 담기기 시작하더니 한참을 말을 잇지 못했다.

때맞춰 빈소를 찾은 고인의 동생을 통해 약간의 사정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고인 슬하에 2남 2녀로 4남매를 두었고 장남인 상주와 장녀를 제외한 나머지 남매가 연락을 끊고 산다는 전언이었다.

세세하게 내막을 물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 짐작으로 그럴만한 사정이 있겠거니 하고 장례 전반에 대한 설명을 마치고 밖에 나와 담배를 피우는 중에 예의 그 상주가 따라 나와 말을 붙인다.

“사연이 좀 많습니다.”로 시작된 그의 이야기는 그 시절 호인으로 불렸던 어른들의 일상과 별다름이 없었다.

남에게 퍼주기 좋아하고 집안일보다 다른 사람들 일에 더 신경을 쓰고 어울리기를 좋아하다 보니 집안 살림은 늘 궁핍했고 설상가상으로 술이라도 한 잔 거하게 걸치고 온 날이면 폭언과 손찌검에 온 식구들이 숨을 죽이고 살아야 했던 유년기의 상처로 자녀들은 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에 집을 나와 독립을 해야 했고 자녀들이 모두 성인이 되어서도 변하지 않는 아버지의 그 폭력성 때문에 서로 의절하고 산다는 저간의 사정과 함께 그간 간간이 연락하던 전화번호마저 바뀌어 아버지의 임종을 전하고자 해도 전할 수가 없다는 안타까운 사연이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고민하던 중에 상주의 고모부 되시는 분이 자신이 그중 하나와 연락이 닿는다며 상주에게 연락처를 건네주었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보다 더 따르던 어른이었다며 혹시라도 큰일이 생기면 연락하려고 받아두었던 연락처를 통해서 고인의 부고를 알리고 장례에 참석해 주실 수 있느냐고 물으니 찰나의 고민도 없이 단번에 거절 의사를 밝히며 말했다.

“이미 인연을 끊었습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한겨울 날씨만큼이나 차가운 목소리를 통해 그 가슴에 맺힌 응어리가 얼마나 큰지 느낄 수 있을 만큼의 단호함 앞에서 엄마의 “안 오면 나도 죽을 때까지 너 안 보겠다.”라는 애원 섞인 호통도, 아버지보다 더 믿고 따랐던 고모부의 간절한 부탁도, 이미 끊어진 전화기 앞에서 외면당한 채 감정의 골만 더 깊어진 셈이 되어 버렸다.


장례를 치르다 보면 때에 따라 평생 척을 지고 살았던 사람들이 마음을 돌려 마지막 가는 길이라도 마음 편하게 해 주자며 빈소에서나마 용서와 화해를 청하는 경우가 있기도 하지만 이번처럼 단호히 그것도 부모와의 연을 끊는 매서움은 좀처럼 드문 일이어서 어떻게 하면 남아있는 유족들이 화해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은 커져만 갔다.


고모와 고모부 그리고 상주와 머리를 맞댄 끝에 시간적 여유가 있으니 마음을 돌릴 때까지 기다려보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였고 그날 밤늦게 고인의 장녀와 맏사위가 아이들을 데리고 빈소에 도착했을 때는 감사의 안도감이 절로 들 정도였다.

2남 2녀 중 아직 연락이 없는 두 남매에 대해서도 어쩌면 올지도 모른다는 실낱같은 희망을 갖게 된 것이다.

‘어쩌면 모두가 다 모여 마지막으로 용서와 화해를 나눌 수가 있겠구나.’

빈소에 앉아 조문객을 맞던 상주가 담배를 피우러 나가다가 나와 마주치고는 힘없는 미소로 인사를 한다.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을 써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장례는 때로 남에게 보여주기 싫은 가족의 한 단면을 고스란히 드러내기도 하는 법이어서 상주의 씁쓸함이 묻어나는 인사에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는 “마음고생이 심하시겠다.”라며 그의 등을 토닥이고는 불쑥 의도하지 않은 말이 나와 버렸다.

“3일 장이 5일 장이 된 것이 혹 고인께서 남아있는 가족들과 화해를 하기 위해 부러 시간을 벌어주신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미처 전하지 못한 미안함과 고마움, 그리고 용서와 화해를 나누기 위해서 말이죠.”


희망사항이었다.

정말 그래주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담긴 그리고 그렇게 해서라도 남아있는 이들에게 위로가 될 수 있다면 무어 더 바랄 것이 있으랴.

묵묵히 듣고만 있던 상주가 입을 열었다.

“정말 그렇게만 된다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남은 동생들은 안 올 것입니다. 누구보다 내가 그들을 잘 아니까요.

그래도 마지막까지 기다려보겠습니다.

혹시나 하는 기대감이 역시나 가 될 것은 분명하지만 저도 마음속으로는 동생들이 모두 와주었으면 하고 바라고 있는 중입니다.”


새해의 셋째가 되는 날.

원활한 장례절차 진행을 위해 미리부터 장례식장에 부탁해 가급적 일찍 부검을 하고 올 수 있도록 요청을 했고 장례식장에서도 국과수의 문이 열리자마자 바로 부검이 진행될 수 있도록 신경을 써 준 결과 정오쯤에는 다시 장례식장 안치실에 고인을 모실 수가 있었다.

고인의 부검 후의 모습에 가족들이 상처받지 않도록 꼼꼼히 시신을 수습한 다음 습을 마치고 혹시라도 그사이에 남은 자녀들 중에 한 사람만이라도 더 도착해 있기를 바라는 작은 소망을 품고 유족들이 있는 빈소로 갔으나 상주의 고개를 젓는 모습에서 저간의 상황을 짐작할 수밖에 없었다.

“저쪽에서 전화를 아예 차단했습니다.”


부검이라는 선입견 때문에 차마 못 보겠다는 이들을 대신해 맏이인 아들과 고인의 여동생이 입관예식에 참여했고 염을 하기 전 화해의 예식을 통해 “이 시간, 이 모습이 우리 남아있는 가족들이 고인과 함께하는 마지막 시간이자 마지막 모습이기도 합니다. 고인께서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평안히 가실 수 있도록 하고 싶었던 말, 듣고 싶었던 말, 그리고 차마 전하지 못한 감정들이 있다면 이 시간을 통해서 다 풀어주시고 ‘사랑합니다. 고맙습니다. 편히 쉬세요.’라는 말로 고인과 인사를 나눠주시길 바랍니다.” 하고 그들만의 교감을 위해 잠시 자리를 비켜주었다.


안치실 밖으로 새어 나오는 작지만 격한 흐느낌이 묻어나는 소리. 그리고 보지 않아도 보이는 듯한 남아있는 슬픈 몸부림이 조금 진정되길 기다렸다가 다시 들어가 염을 하고 입관까지 마치고 돌아온 빈소에서 상주는 거듭 머리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우리 아버지 잘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마지막 모습이라도 볼 수 있기를 원했던 입관이 끝났고 5일 장이지만 장례식장에서의 마지막 날이었으므로 시간이 흐를수록 남은 자식들이 찾아오길 바라는 마음이 절실했으나 야속하게도 출상을 할 때까지도 그리고 화장을 마치고 유족들의 요청에 따라 산골의식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도 의절한 자식들에게서는 끝내 어떤 연락도 없었다.


마지막 가는 길.

그 길 끝에서의 인사마저도 거부할 만큼 외면당했던 고인의 모습과 끝내 화해의 손길을 거부했던 자녀들의 마음을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아프다.

그것이 정말 최선의 선택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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