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눈의 깊은 방
찬바람이 스산하게 부는 요즘 같은 날씨엔
몸속 깊은 곳까지 데워주는 따뜻한 음식이 생각난다.
그래서 겨울이면 내가 가장 애정하는 음식은 단연 떡국이다.
떡국의 맛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아마도 ‘위로의 맛’ 일 것이다.
뽀얀 사골 국물, 얇고 하얀 떡, 한 알 톡 깨 넣으면 국물을 더 부드럽게 풀어주는 계란,
가끔 씹히며 고소함을 퍼뜨리는 소고기 고명, 풍미를 더 해주는 김가루까지.
끓일 때 떡에서 나온 전분이 모든 재료를 부드럽게 감싸 안으면
내 입도, 위도 따스하게 코팅되는 기분이 든다.
떡국을 먹을 때면, 외할머니가 끓여주시던 떡국이 떠오른다.
나는 떡국을 끓일 때 쉽게 시판 사골 농축액을 사용하지만
할머니는 늘 손수 사골을 고으셨다.
내가 약하다고 유난히 걱정을 많이 하시던 분이라
진하게 고아낸 사골국물을 냉동해 두었다가 떡국을 끓여주시곤 하셨다.
얼마나 진하게 고으셨는지
냉동실의 사골국물은 젤리처럼 통통하게 굳어 있었고,
어린 나는 그 모습이 무척이나 신기했다.
떡국떡도 요즘은 어디서나 쉽게 살 수 있지만
할머니는 떡을 꼭 방앗간에서 직접 빼오셨다.
가래떡이 살짝 굳으면 예쁜 타원 모양으로 썰어내셨는데,
나도 해보겠다고 칼을 잡았다가
몇 번 써는 것만으로 손바닥이 얼얼해져 금방 포기하곤 했다.
밤새 자고 일어나 부엌으로 가보면
가지런히 썰려 산처럼 쌓여 있는 떡국떡에 두 눈이 휘둥그레지곤 했다.
사골국물에 폭폭 끓여 정갈하게 담아주시던 할머니의 떡국.
할머니의 떡국은 진한 사골에 떡의 전분과 달걀이 어우러져
그야말로 수프처럼 부드럽고 따뜻한 맛이었다.
얇포롬한 떡을 떠먹으면 쫄깃하면서도 살살 녹았고,
얼마나 푸짐하게 담아주셨는지 먹고 또 먹어도
숨어 있던 떡이 계속 나와 엄마랑 한참 웃기도 했다.
“엄마, 떡이 계속 나와!”
가끔은 그 떡국이 미치도록 그립지만
그 맛을 다시 낼 수는 없다.
이젠 누구도 방앗간에서 떡을 빼오지 않고,
집에서 사골을 고아낼 일도 드물어졌으니까.
할머니의 떡국 맛을 재현해 보겠다고
이 브랜드, 저 가게의 떡을 사 모아봤지만
아무리 찾아도 그때의 떡은 없다.
그래도 기억 속 그 떡국의 맛, 향, 질감은 여전히 선명하다.
그래서 내가 끓인 떡국 한 그릇 앞에서
할머니의 떡국이라고 마음속으로 조용히 주문을 걸어본다.
한입, 또 한입 먹다 보면
외할머니의 모습이 떠오르고,
언제나 걱정 많던 손길과
무조건적인 사랑이 국물처럼 나를 감싸온다.
그러다 문득 깨닫는다.
나는 지금 다시,
할머니의 손녀가 되어 있다.
세상에서 가장 포근한 사랑을
아낌없이 받던 그때의 나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