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다이어리는 족쇄가 아니다.

보라눈의 깊은 방

by 보라눈

12월 초, 나는 새해를 조금 일찍 맞이하고 싶어서

새 다이어리를 들였다.

보통은 새해가 되어야 새로운 다짐을 새 다이어리에 적지만

어쩐지 그날을 마냥 기다리고만 있다간

12월이 마치 없는 달처럼 훅 지나가 버릴 것 같았다.


그리고 새해부터 바로 잘 달리려면

12월에 예행연습을 해두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시작한 12월의 다이어리.

새 다이어리에 처음 글자를 쓸 때면 무척 떨린다.

틀리면 안 돼.. 예쁘게 써야 해..

정자체로 또박또박 적어 내려가던 글씨는 오래가지 못하고

아주 빠른 속도로 원래의 엉망인 내 필체로 돌아온다.


내 다이어리는 메모칸이 무척이나 많아서

처음엔 그 칸들을 다 메꾸느라 힘들었다.

같은 말을 반복해서 쓰는 것 같기도 하고,

너무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적고 있는 느낌도 들었다.

그래도 첫 일주일은 꽤 성실하게 썼다.


문제는 두 번째 주부터였다.

일정이 많아 정신없이 보내고 나니

다이어리를 펼쳐 볼 틈조차 없었다.

일정이 많은 날 다이어리가 더 빼곡해야 하는데

오히려 가장 비어있는 아이러니라니!


그렇게 눈앞에 펼쳐진 건 빈칸들로 남은 다이어리였다.

다이어리를 펼치자 채우지 못한 빈칸들은 나를 잔뜩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잠시 고민했다.

이 밀린 날들을 과거를 복기하며 채워야 할까,

아니면 과감히 넘겨버릴까..


그리고 결심했다.

넘겨버리기로.


다이어리를 쓰지 못하는 동안에도

나는 분명히 삶을 살고 있었다.

쓰지 않았다고 해서 살아낸 삶이 어디로 도망가지는 않는다.


내 삶의 목적을 떠올려보면

다이어리를 쓰는 일은 절대 목적이 될 수 없다.

그저 삶을 살아내기 위한 하나의 수단일 뿐이다.


안 그래도 내 삶엔 족쇄가 많은데

굳이 다이어리라는 또 하나의 족쇄를 나 스스로 찰 필요는 없지 않을까?


강박에서 벗어나 유연하게 도구를 다루는 것이

어쩌면 꾸준함으로 가는 길일지도 모른다.


나는 다이어리를 의무가 아닌, 내 친구로 두고 싶다.

더 자주 만나고 더 편히 내 이야기를 하고 싶다.

그 안에서 작은 통찰과 생각의 씨앗들을 건져 올리고 싶다.


곧은 나무는 부러져도

휘는 버드나무는 부러지지 않듯이

다이어리를 대할 때도 엄격함 보단 여유로움으로,

오래오래 같이 갈 나의 동반자로 대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