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엄마의 돌덩이 배낭

보라눈의 깊은 방

by 보라눈

며칠 전, 엄마는 또 무거운 돌덩이 배낭을 메고

우리 집에 오셨다.

돌덩이 배낭 안에 들어있는 건 각종 먹거리들.


엄마는 대형마트 푸드코트 안 분식집 사장님이시다.

그래서 가져오시는 음식의 종류도 다양하다.

칼국수, 쫄면, 떡볶이, 요즘은 고기덮밥류도 추가되어

양념된 제육과 닭갈비, 그리고 엄마가 매번 담그시는 김치들까지.


이것들이 은근히 다 무게가 나가는 음식들이라

나는 엄마 가방을 들기조차 힘들다.

그런데 한국 나이로 77세이신 엄마는

어떻게 그걸 들고 오시는 건지 정말 미스터리다.


엄마의 무거운 배낭을 보고 있노라니

문득 외할머니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그때가 몇 년 전이었더라.

내가 대학생이었을 때니 아마 30년 전쯤이었을 것이다.


그때 할머니는 가양동에 사셨다.

동네에 매주 못난이 토마토를 실은 트럭이

온다고 하셨다.

흠집이 있고 울퉁불퉁 못생긴 토마토를

아주 싼 가격에 판다고.


할머니는 딸과 외손녀 생각에 그걸 잔뜩 사셨고

배낭에 꾹꾹 눌러 담아

가양동에서 삼성동까지 그 먼 거리를 오셨다.

그리고 엘리베이터도 없는 아파트 5층까지 올라오셨다.


그때 할머니 연세는 칠순쯤 되셨었다.


아직도 생생히 기억나는 건

터질 것 같은 무게의 할머니 배낭과

그걸 열었을 때 쏟아지던 못난이 토마토들.


그리고 엄마의 한마디.


“엄마! 무겁게 왜 이렇게 많이 가져왔어요. 힘들게…”


그렇게 말씀하시던 엄마는

지금 할머니와 똑같은 행동을 하고 계신다.


할머니와 엄마의 무거운 배낭.

그건 그들의 사랑이 그만큼 무겁다는

그저 눈에 보이는 증거였다.


아마도 그들에게 그 배낭은

정말로 무겁지 않았을 것이다.

자식들이 맛있게 먹는 모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모양은 미웠지만

어떤 토마토보다 달콤했던 할머니의 못난이 토마토.


시장에서 사 먹거나

밀키트로도 쉽게 만들 수 있는 떡볶이지만

엄마가 특별히 갖다 주신 떡볶이.


더 맛있는 건

사랑이 담겨 있어서라는 걸 안다.


그리고 그 사랑을 먹고 있다는 걸 느낄 때

나는 나의 자존감이 올라가는 걸 느낀다.


‘이렇게 큰 사랑을 받는 나는

정말 소중한 존재로구나.’


그 생각은

인생을 정말 소중히 살아야겠다는 다짐으로까지 이어진다.


할머니와 엄마가 내게 남겨주신 건

다름 아닌 사랑이었다.

그리고 그 사랑의 기억은

힘들 때마다 나를 붙잡아 준다.


나는 생각한다.

나는 금수저라고.


다름 아닌 사랑 금수저.


있어 보이려고 하는 말도 아니고,

돈보다 사랑이 최고라고 말하고 싶은 것도 아니다.


다만 50년 넘게 인생을 살아보니

어린 시절 받았던 사랑만큼 큰 것은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건 유산이다.

엄청난.


사랑으로 가득한 잔고가 있으니

내 마음은 늘 여유롭고

그 잔고에서 나오는 이자를

주변에 나눠줄 수도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나도 아이들에게

사랑 금수저를 물려주고 싶다.


인생을 살다 보면

어떤 위기와 상황에 부딪힐지 모르지만

그럴 때 중심을 잡아 줄 사랑이 있다면

잘 헤쳐 나갈 수 있을 거라 믿기에.


엄마가 무겁게 가져오신 배낭을 보며

나는 옛날 엄마가 외할머니께 했던 말을 그대로 한다.


“엄마! 무겁게 왜 이렇게 많이 가져왔어요. 힘들게…”


그리고 먼 훗날

내 딸도 나에게 같은 말을 하지 않을까 생각하니

괜스레 미소가 지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