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꽃을 좋아하던 아이, 아직 어렸던 엄마

보라눈의 깊은 방

by 보라눈

봄이 왔다.

큰아이와 반려견 구름이를 산책시키고 있었다.


“이제 곧 있으면 저기 개나리로 뒤덮이겠다.”


“엄마, 나 벌써 꽃 핀 거 봤어. 개나리는 아니었고.”


“무슨 꽃?”


“노란색이었는데… 무슨 꽃인지는 모르겠어.”


“혹시 산수유야? 산수유꽃이 일찍 피잖아.”


“산수유는 아닌 것 같고…”


오랜만에 아들과 꽃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문득 아이의 어린 시절 별명이 떠올랐다.

꽃박사.


네 살쯤 되었을 때였을까?

아이는 워낙 꽃을 좋아했고,

꽃 이름 맞히는 걸 재밌어했다.

날씨가 좋으면 나는 아이를 데리고 서울 안의 공원 이곳저곳을 다녔다.


나는 원래 집순이라 밖에 나가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아이가 오감으로 꽃을 느꼈으면 하는 마음 하나로

길을 나섰다.


어느 날은 남산공원,

어느 날은 용산가족공원,

또 어느 날은 어린이대공원.


“엄마! 이거 배롱나무 꽃!”


“개망초다!”


“범부채다, 범부채!”


책에서 본 꽃을 알아볼 때마다 아이는 너무 신나 했다.

나도 아이 덕분에 같이 꽃박사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때의 내 단짝은 아들이었다.

남편은 사회생활에 여념이 없을 나이였고,

친구들도 다들 그랬다.

나만 스물일곱의 어린 나이에 엄마가 되어 아이라는 작은 세계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아이와 단둘이 떠나는 작은 여행의 시간은

한편으론 외롭고, 한편으론 소중했다.


문제는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 당시 우리 집엔 자가용이 없었다.

어린아이를 데리고 늘 대중교통을 타야 했다.

가는 길이야 잘 걸었지만, 한나절 공원에서 뛰어다닌 아이는 집에 가는 버스나 지하철 안에서

늘 잠이 들었다.


그러면 나는 아이를 안고 갈 수밖에 없었다.


버스에는 앉을자리가 없을 때가 많았고,

잠든 아이를 안고 서 있는 시간은

그렇게 힘들 수가 없었다.

팔이 떨어질 것 같고, 다리는 후들거렸다.

몸이 힘든 것도 힘든 것이지만, 아이를 안고 서 있는 내 모습이 괜히 민망해 자리를 양보하지 않는 사람들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고난의 귀갓길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당시 우리는 가난한 신혼부부였다.

월셋집은 저 언덕 꼭대기에 있었다.

경사도 가파르고 거리도 꽤 되어 사람들은 마을버스를 타고 올라갔다.


당연히 나도 마을버스를 타고 올라가야 했겠지만, 그때는 버스 환승제도가 없었다.

새로 버스비를 내야 했다.

서른 살의 어린 엄마는 몇백 원을 아껴보겠다고 잠들어 축 처진 아이를 둘러메고 언덕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지금 생각하면 무슨 궁상을 떨었나 싶지만,

그땐 그게 궁상인지도 몰랐다.

나에겐 그저 최선이었을 뿐.


지금 아이는 스물다섯이 되었다.

언제 꽃박사였냐는 듯, 꽃 이름은 오히려 내가 더 많이 기억한다.


어렸을 때 너 이 꽃 보고 능소화라고 맞혀서

얼마나 신기했는데.”


“내가 그랬어, 엄마?”


아이의 기억엔 남아 있지도 않은 그 시절이지만, 내게는 순간순간 별처럼 박혀 있다.

꽃을 따라 아이와 걷던 시간들.

그 시절은, 아름다웠던 내 청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