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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e Joon Oct 09. 2021

그리움으로 써 내려간 티끌 < 1편 >

김환기 작가

김환기,

1st



격변에도 호방했던

서정적 인간미



수화 김환기, 1913. 2. 27 ~ 1974. 7. 25




너무나도 많은 질문을 하게 하는

"수화 김환기" 입니다.


바스키아의 그림을 보면서 깨달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림을 보는 것은 사람을 보는 것이다." 이 번뜩임으로 김환기의 작품을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그의 그림이 다르게 보입니다. 전에는 하지 않던 질문들을 생겨나게 합니다. 그 감동이 새로워 다시 글을 올리기로 했어요.






그의 시작


김환기는 1913년 2월 27일, 안좌도 남쪽의 작은 섬, 그 당시 꽤 부유한 가정에서 외아들로 태어납니다. 천석꾼이었던 대지주에 가야금을 잘 탔던 아버지는 육지로 통하는 연락선조차 드물었던 곳에서 아들에게 예술교육을 시킬 만큼 깨어 있었던 분이었습니다. 그는 고향을 참으로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그림의 시작은 고향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수화 김환기 :

"종달새 노래하기 시작하는 봄이면 살았나 죽었나 한계를 모를 정도로 하여간 무엇인지 모를 것들이 잔뜩 느껴지기만 하는 내 고향이었다.


"나는 소년 시절의 이러한 것들을 표현해 보려 내 딴에는 애써 보았던 것이 한 달 만에 <종달새 노래할 때>로 이루어졌다."



종달새 노래할 때, 유채, 178x127cm, 1935


수림, Oil on canvas, 61 x 91cm, 1938




나무를 사랑해서 지은 이름, "수화"


김환기 작가의 호(號)는 "수화"입니다. 나무와 이야기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죠. 얼마나 나무를 좋아했으면 평생 나무와 대화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어요. 그는 고향을 좋아했지만 한편으론 타지에 대한 호기심도 많았는가 봅니다. 아무래도 고향은 작은 섬이다 보니 섬에서 보이는 육지를 그리워했다고 합니다. 그리워하는 마음으로부터 향수 어린 낭만적 정서가 그의 그림에 온기를 더하는 것 같습니다.



<그들의 대화>

조병화 시인 : 당신은 어떻게 그렇게 키가 크고 목이기나?

수화 김환기 : 내가 섬사람이라 어렸을 때 늘 육지가 그리워서 큰 배가 지나갈 때 가슴이 울렁울렁해서 늘 목을 빼고 봤다네.



나무와 달, Oil on canvas, 73 x 61cm, 1948

  

답교, Oil on canvas, 100 x 65cm, 1954




동경 유학


그 시절 예술은 가난이고 천대받던 시절이었죠. 1933년 그의 나이 21살, 그림쟁이에 부정적이었던 아버지의 반대를 무릎 쓰고 일본 유학을 결심합니다. 어떻게 21살에, 그것도 지금보다 모든 것이 불편했고 모든 것이 부족했던 그 시절에 바다 건널 생각을 했을까. 일제강점기였습니다. 그 당시로서도 일상을 저버리고 결심해야 가능했던 일입니다. 일상을 저버리는 일은 지금도 쉽지 않은 건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일본 유학에서 다양한 미술 모임에 참여하며 새로운 예술 세계와 마주합니다. 그리고 이때 작품 론도가 태어납니다.



론도(Rondo), 캔버스에 유채, 61x72.7cm, 1938



론도(Rondo), 음악에서 경쾌한 빠르기를 의미하죠. 자연에 순응하며 터전을 여미는 아낙들의 생명력, 그 부지런한 리듬감을 표현한 작품이라고 합니다. 일제 강점기 시절 일본의 억압 속에 있었던 한국 화단의 여건에서, 작품 론도는 국내로서는 시도하지 않았던 최초의 추상적 화풍이었습니다. 일제 탄압 속에서 주도적인 조형적 탐구를 통해 그 당시 근대기로서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실험적 조형미를 갖춘 작품이라는 점에서 역사적인 의미를 가지는 작품이죠.




두 번째 인연


1937년 25살, 전쟁이 고조되자 김환기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1944년 31살, 김향안(본명 :변동림)과 '재혼'을 합니다. 당시 김향안은 시인 '이상'과 결혼했지만 결혼한 지 4개월 만에 남편은 동경 유학 도중 폐결핵으로 사망합니다. 이후 지인의 소개로 김환기를 만나게 되었죠.


당시 김환기는 이미 이혼 경력이 있는 데다 딸을 셋이나 둔 남자였습니다. 그들은 단 두 번 만났고 김향안은 김환기를 그저 “키만 큰 시골뜨기” 정도로 생각했을 뿐 관심이 없었죠. 하지만 김환기의 편지는 '변동림'을 그의 아내 '김향안'으로 사로잡아 놓습니다. 자식 있는 남자와의 개가를 크게 반대했던 부모와의 연을 끊고 남편의 성씨를 따 "김향안"으로 개명 후 평생 마지막까지 함께하는 부부가 됩니다.





김환기는 편지를 참 잘 쓴다.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다감한 글이다. 때로는 지나치게 정이 넘쳐흐르는. 그러나 나는 곧 답장을 쓰지 않았다. 그러면 일방적으로 또 편지가 왔다. 그러는 동안 한 번밖에 만나지 않았던 우리는 편지로써 가까워졌다.


김향안 에세이 <월하의 마음> 中



수화 김환기와 김향안 여사 (출처: VOGUE)


수화 김환기와 여사 김향안 (출처: VOGUE)



수화 김환기 : 김환기는 소작인들에게 빛 문서를 모두 돌려줘 버리고 지장이라는 유산에서 스스로를 해방시켰다.


"나는 유산 같은 것은 싫다. 내 힘으로 벌어서 살지."

"한 직업을 가지고 그에 열중해야지 남을 믿고 살아서는 안된다."




전란 속에서도 김환기,

파란 속에서도 김환기,

김. 환. 기.


수화는 전쟁 당시 "해군 종군화가"로 근무합니다. 당장 생존이 절박했던 부산 피난시절, 암울한 현실, 허리 한 번 제대로 필 수 없었던 작은 다락방에서도 그는 그림을 계속 그립니다. 전란 속에서도 자신으로 존재하게 했던, 파란 속에서도 난파 없이 나아가게 했던, 그림은 그에게 그런 것이었나 봅니다.


전란 시절 그의 그림은 나를 나로 존재하게 했던 한 인간의 기록으로 보입니다. 나를 나로 존재하게 하는 절실함은 무엇인가? 그런 게 지금 있기는 한가? 그림이 저에게 묻습니다.


(종군화가 : 전투 목적 이외의 일로 군대를 따라다니는 화가)



피난열차, 캔버스 유채, 37x53cm,1951


꽃장수, 캔버스 유채, 45.5 x 53cm, 1952



판잣집, 캔버스 유채, 73 x 90cm, 1951


뱃놀이, 캔버스 유채, 38 x 45cm, 1951


항아리와 여인들, 캔버스에 유채, 54x12cm, 1951


부산항, 종이에 수채, 26 x 47cm, 1952



수화의 두 번째 고향, 성북동


휴전 후, 수화는 성북동에 자리 잡습니다. 제2의 고향이라 할 만큼, 그는 안좌도만큼이나 성북동을 사랑했다고 합니다. 얼마나 사랑했는지 주변에 집을 구하는 친구마다 이곳에 오라고 적극 권했다고 하네요. 이곳에서 수화는 <이중섭, 장욱진, 유영국>뿐 아니라 여러 문원들과도 폭넓게 교류합니다. 문학가와 철학가에 많은 영향 주기도 했죠.



190cm에 가까운 큰 키에 그림도 잘 그리는 사림이 우스운 농담도 잘하고, 글에 낭만이 있었던 수필가. 참 사람을 좋아하고, 윤택한 인간미가 흘렀던 사람. 부산 남포동 피난시절 문학잡지 표지를 그리며 하루 번 돈, 다음날 땟꺼리자 없음에도 친구와 포장마차에서 술 한 잔으로 써버리곤 다음을 살 만큼 호방했던 사람. 그와 함께 했던 사람들은 그를 이렇게 회고합니다.



성북동 집, Oil on canvas, 99 x 64cm, 1956



집, 1956


화가 김용준이 김환기, 김향안 부부에게 내준 일명 '노시산방'이 있던 집터




우리만의 미, 한국의 멋


1950년대, 수화는 보자기, 조선 목기, 백자 같은 민예품에 매료되어 있었습니다. 어느 때는 매일 하나씩 달항아리를 사들일 정도였다고 하는데요. "한국의 아름다움이 무엇인가" 이것이 수화에게는 늘 화두였습니다. 당시 한국 서양화는 인물이나 풍경 위주의 주제가 주류였지만 수화는 달항리, 매화, 여인 한국적인 소재를 고수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확신을 주었던 영감들을 작품에 투영해 자신만의 것으로 조형화 시키는 작업에 몰두합니다. 그러다 그는 궁금해집니다.




항아리와 매화, 캔버스에 유채, 45.5x53cm, 1954
항아리 Oil on canvas, 100 x 81cm, 1956


항아리와 매화, 캔버스에 유채, 39x56cm, 1958


항아리와 매화 가지, 캔버스에 유채, 58x80cm, 1958


항아리, Oil on canvas, 50 x 61cm, 1958


매화와 달항아리, Oil on canvas, 55x35cm, 1957


여인들과 항아리, Oil on canvas, 281×568cm, 1950년대



수화 김환기 : 이 세계에서 나의 위치는 어디쯤 될까?

김향안 여사 : 수화, 그걸 뭘 걱정해, 우리가 직접 가보면 되지.

 


그는 파리로 향합니다.


- 이어서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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