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The Joon Oct 10. 2021

그리움으로 써 내려간 티끌 < 2편 >

김환기 작가

2st




사랑하는 이들을 그리워하며

써 내려간 티끌, 무수한 그리움.



수화 김환기, 1913 ~ 1974 / 김향안 여사, 1916~2004




서정적 미학의 정수 "수화 김환기"의

두 번째 이야기입니다.






파리와 그림 편지


1956년 43세, 수화는 파리로 떠납니다. 김향안 여사가 1년 먼저 파리에 가서 자리를 잡은 후 수화가 그 뒤를 따라가는데요. 김향안 여사는 수화가 현지에 적응할 수 있도록 프랑스어를 공부하고 나중엔 현지에서 동시통역하며 프랑스와 김환기 작가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합니다. 믿어주는 마음이 없었다면 어떻게 저렇게 서로 함께 할 수 있었을까 싶습니다. 아래는 수화가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들입니다.



프랑스에 먼저 간 아내에게 보낸 편지



1955년 멀리 파리에서 처음 성탄절을 맞이하고 있을 나의 향안에게.

행복과 기쁨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진눈깨비 날리는 성북동 산 아래에서

으스러지도록 안아준다 너를.


나의 사랑 ‘동림이' - 수화 김환기 -



닷사스 아뜰리에 ,1956


베네지트화랑 오프닝, 1956



"나 파리에 가면 그전부터 생각해 왔던 거지만 되도록이면

거기서 오래오래 아니 가능하다면 영주하고 싶어.

그러나 나 같은 마음 약한 예술가가 누구보다도 고국을 그리워할 거야."


- 아내에게 주는 편지 中 -



닷사스 아뜰리에 정원에서, 1956



아내는 학교에 가고 나 홀로 프랑스 담배를 피우며

고국을 생각하고 친구들을 생각하며 붓을 들었소.

지금 내가 살고 있는 화실 좌우엔 전부가 미술가들이라오.

지금 내 아틀리에에 있던 사람도 여류조각가였고,

앞 방도 여류조각가, 밑에 방도 조각가라오.

날마다 망치소리가 들려오는데 자연 형 생각이 나곤 하오.


- 파리통신1(조각가 Y씨에게) -





서정적 원천에 대한 확신,

그의 확고한 세계


당시 화가들 사이에선 프랑스 물만 마셔도 화풍이 바뀐다는 말이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수화는 자신을 키워 낸 서정적 원천, 그 한국의 아름다움에 대한 확신, 확고한 자기만의 세계를 잃지 않습니다. 자신의 그림을 오히려 더 밀고 나아갑니다. 확고한 자기 세계 없이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사실을 절감했던 겁니다.



수화 김환기 :

"내 예술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소.

여전히 항아리를 그리고 있는데 이러다간 종생 항아리 귀신이 될 것 만 같소."



그의 프랑스 유학은 타국 만리 이국, 더 넓은 세상에서 현재 자신의 위치를 지각함으로써 자신의 예술세계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었던 계기가 됩니다. 그리고 4년을 있다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영원한 것들, 캔버스에 유채, 127.5x103.5cm, 1956~57


항아리, Oil on canvas, 88.5×145cm, 1957


제기, 캔버스에 유채, 60 x49cm, 1958


항아리와 날으는 새, 72x52cm, 1958



억지로 파리에 와서 어려운 일이 어찌 한두 가지겠소?

하기야 전쟁터에 싸우러 왔거니. 이쯤 생각하면 걱정되는 일이 없겠지.

향사! 우리가 할 일은 좋은 그림 그리는 것 밖에 없잖소 (중략)

중섭 형을 비롯한 여러 화우들에게도 쉬이 편지를 보내려 하오만

여기 오니 도무지 시간이 없구려.

귀국하면, 멀찍이 나가서 닭이나 치고 꽃이나 심고 진정 그림만 그려야겠소.


- 파리통신 3 (향사에게) -




귀국, 변방의 자기 발견


파리에서 돌아온 그는 국내 미술계의 현실을 절감합니다. 예술 세계 속에서 "변방국"으로서의 한계를 통감했던 그는 우수한 미술교육이 그 해답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는 홍익대 미술대학 초대 학장을 역임하며서 미술 교육자로서도 활발하게 활동하는데요. 제자를 가리키던 그의 화실은 언제 찾아가도 문이 열려 있었고 물감 마를 날이 없었다고 합니다.



수화는 학생들에게 자기발견의 기회를 주는 것이 곧 참다운 미술교육이라고 강조했다고 하는데요. 요즘 자기개발, 자신의 진짜 모습이란 표현들을 쉽게 접합니다. 변방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자기발견이 있어야 한다는 것 김환기는 그때 이미 알고 있었나 봅니다.



수화 김환기 :

열심히 미학을 공부해서 우리 같이 제자를 양성하자.

생각하는 미술인을 만들자.



무제 03-Ⅶ-68 #9, Oil on canvas, 208 x 157.5 cm, 1968


플릇 솔로Ⅰ 11-Ⅲ-68, Oil on cotton, 121.5 x 85.5cm, 1968




뉴욕행


1963년 상파울로 비엔날레에서 자극을 받은 그는 1964년 51세, 또다시 뉴욕행을 단행합니다. 서울에 돌아가서 향도에 묻힐 것인가? 외국을 상대로 새로운 인생을 개척할 것인가? 그에게는 또 다른 도전이었죠. 그 당시 미국은 2차대전 이후 기존 미술에 대한 권위가 무너지면서 추상미술과 대중의 소비를 앞세운 상업미술이 급성장하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대중들은 앤디 워홀과 팝아트에 열광하고 있었죠. 그곳에서 수화는 거대 자본을 바탕으로 한 뉴욕의 미술 세계를 마주하며 자신의 가치를 확인합니다.



우리(한국) 방은 괜찮았다.

그리고 내 그림도 나쁘지 않았다.

내 예술도 의미가 있다는 자신을 얻었다.

단지, 나는 시골(한국)에서 살았다는 것 밖에 없다.


- 1963년 1월 -





아침의 메아리 04-Ⅷ-65, Oil on canvas, 177 x 126.5 cm, 1965


무제, Oil on canvas, 178 x 127cm, 1968


무제, 172x122.5cm, 1966



무제 05-Ⅱ-70 #144, Oil on cotton, 176 x 87cm, 1970



수화 김환기, 1970년대 작





그리움으로 써 내려간 티끌


가난과 고독 속에서, 그토록 사랑하는 것들을 등지고 떠나 있을 만큼 그리는 것이 절박하지 않았다면 김환기의 세계는 없었을 겁니다. 외로운 그곳에서 고국에 있는 친구와 자식을 그리워하며 점 하나하나 찍어 그린 그의 작품은 그가 써 내려간 편지와 닮아 있네요. 그의 고통 속에서 서정적 미학의 정수를 보여주는 그의 작품들이 탄생합니다.



그의 대표작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는 친구인 김광섭의 시 "저녁에" 중 마지막 구절에서 따왔습니다.






저렇게 많은 별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김광섭_ 저녁에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16-IV-70 #166, 232x12cm, 1970


무제 03-II-72 #220, 254x201cm


하늘과 땅, 캔버스에 유채,51x25cm, 1957




구원의 형벌


수화는 10년 동안 단 한 번도 고국을 찾지 않고 작품 활동에 전념합니다. 드넓은 세상에서 마음을 열고 소통했지만 자신만의 예술 세계는 결코 흐트러지지 않았습니다. 고통이 없이는 만들어지는 것이 없는 것인지, 자신의 노고를 형벌이라고 할 만큼 지독하게 여겼지만, 그래도 행복했으리라 짐작합니다. 그림이 행복하지 않았다면 그는 버티지 못했을 테니까요. 이런 걸 애증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자고 새면 붓을 든다… 이 무슨 지독한 형벌인가.

오늘도 자잘한 수채화를 십수 장 그렸다.

이 지독한 형벌이 내 인생에 구원의 길처럼 돼 있으니

죽자 사자 계속하는 수밖에 없다.'



고요, 05-IV-#310, 216x205cm, 1973


무제 23-VII-71 #218, 211x291cm


무제 09-V-74 #332, 178x127cm, 1974


무제 19-VII 71 #209, 253x201cm, 1971


우주, 5-IV-71 #200, 1971


서방의 미술 형식을 세계적인 차원의 흐름으로 꿰뚫어 지각하고자 했던 혜안. 몰랐던 그것을 내 나라 내 땅이 가지고 있는 정서와 엮어내어 자신만의 변하지 않는 화풍으로 개척해 나갔던 그의 선구적인 예술가적 행보. 그토록 구축하고자 했던 자신만의 아름다운 세계를 향한 돌진. 온몸과 마음으로 예술을 사유하고 향유했던 그의 여정이 저에겐 행복한 몸부림처럼 보입니다. 처음에는 그저 점밖에 보이지 않던 그림이었는데, 그저 비싸다니까 좋은 그림인가 했는데, 이제는 헤아릴 수 없는 티끌마다 스며 있는 한 사람의 향기가 납니다.




사랑하는 것들을 향한 그리움,

아름다운 것에 대한 절실함이,

우주가 되어 오늘을 담습니다.









에필로그

미국에서 쓴 그의 일기


아래는 김환기 작가의 일기입니다. 문장은 짧지만 저 글을 보고 있으면 밤에도 불이 켜져 있었을 그의 작업실 전등불이 떠어오릅니다.



이미지 연출 : The Joon

자료 출처 : 목포MBC특집다큐 김환기를 추억하다, 2013년











매거진의 이전글 거리에 외로운 이단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