눌러, 터져, 나와(도 돼?)

민유월 ━ 말하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

by ㅎ과ㅇ

에쭈드(etúde)와 사랑에 빠진 꼬마 원장은 연기학원을 (열심히) 다녔다. (후회 없는 3개월 수강료 선납!) 책상과 의자를 하나씩 두고 앉아서 자유롭게 연기하는 순간이 가장 행복했거든. 나도 배우가 되고 싶은 건가? - 라고 착각할 정도로, 설렘 치사량 도달 직전의 상태. 그.런.데. 초급반에서 중급반으로 올라갈수록 오디션 공지, 프로필 촬영, 드라마 단역 출연 등 온갖 Sub Quest가 생성되더라고. 쉴 틈을 안 주고 말이야. 그래도 애들은 죄다 즐거워하더라. 이상하다. 얘넨 고통을 즐기나?


돈도, 시간도, 체력도, 마음도. 뭐 하나 대충 쏟아낼 수 없는 직업을 하려고 뭐든지 배우던, 꼬질꼬질하지만 반짝 반짝이던 (최고의) 배우들. 그들을 보면서 깨달았다. 아, 이건 내 영역이 아니구나. 단순한 재능의 차이? DDANG. 꿈을 꾸는 시선의 차이? DING DONG DANG. 거울 속 자신을 보면서 대사를 뱉고, 몸을 움직이는 그들은 이미 배우였다. 지망생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의 생을 살다가, 특정 시점을 똑 떼어서 갑자기 남들 앞에 불려 나온 (등장) 인물 그 자체. 그들의 연기가 완벽했느냐고 묻는다면,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다. 그 정도는 아니었다. 그럼 왜 그렇게 감동을 받았냐고?


교훈이 확실했거든. ‘연기력이라는 건 결국 상상과 표현 기법이구나.’, 그 생각이 들자마자 머리(정확히는 뒤통수)가 아렸다. 배우가 이야기의 전달자로서 최적의 방법을 찾는 사람이라면, 난 왜 에쭈드(etúde)만 하면 행복한 거지? 꼬마 원장은 혼란스러웠다. 선생님 저는요, 아 그러니까 제가 선생이긴 한데요, 근데 또 학생이기도 하잖아요. 서두는 부산스러웠고 마무리는 형편없었다. 고민 끝에 내뱉은 큰따옴표 속 대사는 이거였다. “저는 왜 벅차오르는지 잘 모르겠어요.” 지도 선생님의 대답은 N/A, 이용 불가.


답은 네 안에 있단다. 다정하면서 불친절한 대답만으로는 여전히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딱 떨어지는 답도, 이해를 도울 만한 설명도 없는, 문제만 가득 쌓여있는 예술. 좀처럼 속을 알 수 없는 녀석. 그래, Art는 애초에 Artificial (* 인위적인) 한 녀석인걸. 모르고 좋아한 게 아니었어도 서운한 건 서운한 건데. 아니, 정확하게는 답답했나. 원인도 모르는 나한테. 어딜 가서 멍청하단 얘긴 들어본 적 없다만. 그 순간만큼은 꼬마 원장은 세상 미지했다. 자기감정도, 취미도, 꿈도 모르는 어린애. 하찮고 줏대 없는 아주 작은 엘리트.


엘리트 [élite]

명사 1 사회에서 뛰어난 능력이 있다고 인정한 사람.
또는 지도적 위치에 있는 사람.
명사 2 타자기 활자 크기의 하나.
1인치에 가로로 12자, 세로로 6자.


갈피를 못 잡는 어린양 어릿광대를 가엽게 여긴 지도 선생님은 새로운 미션을 내주었다.

다음 시간 전까지 독백 대사 한 마디씩 만들어올 것.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한 문장. 어렵진 않지만 막막한 과제. - 아, 나도 학생들에게 이런 숙제를 내주는 편인가? - 때아닌 거울 치료 효과는 상당했다. (+ Power UP!) 그.래.서. 꼬마 원장은 노트를 펼쳤다. 언제, 누가, 무엇을, 어디서, 어떻게, 왜. 육하원칙을 적용하자. (선생답게 단순하고) 직관적인 방법으로 문제 풀이에 도전한 결과를 그녀는 아마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아직까지도 그날의 모든 순간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장마가 시작된 2020년 여름, 비가 쏟아지는 소릴 배경 삼던 창문이 있는 지하 연습실. 노란 형광등 아래에서 각자의 이야기가 깜빡이던 날. 여섯 명 정원의 수업에서 한 사람씩 돌아가며 준비해 온 연기를 선보였고, 어느덧 마지막 차례. 그녀는 수도 없이 삼켰던 질문을 처음으로 밖으로 내뱉었다.


“있잖아, 넌 어떻게 어른이 됐어?”


그 한 줄엔 모든 서사가 (숨어) 있었다. 나는 그대 론데 너는 변했다. 어느새 훌쩍 자라난 (어린 시절을 같이 보낸) 친구. 열등감이 아닌 동경을 표할 수 있는 단단한 관계. 그 안에서 피어난 한 톨의 부러움. 대사로 모든 걸 토해냈다. 저절로 눈물이 났다.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건 진짜고, 연기이자 발화야. 그녀의 첫 숨은 글에서 터져 나왔다. 그동안 즉흥연기만 하면 행복했던 이유는 상상과 표현 기법이 아니라, 내가 쓴 대사를 직접 연기해서였던 거야. 선생님이 맞았다. 정답은 내 안에(서 기다리고) 있었어.


▶ Main Quest “진짜 나를 찾아라”




글을 쓰고 말하는 사람. 작가가 되어야겠다. 일단 돈은 벌고. 글로 생계를 유지하기에는 당장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 꼬마 원장은 언제나 business mode였다. 학원 홍보 = 마케팅, 강사 고용 = 인사관리, 월 수익 관리 = 재무회계. 모든 분야의 담당 인력? Only One. 누가 그 많은 걸 다 하죠? 저요?. 아, 예예. 맞아요. 맞습니다. 대표도 저고 팀장도 접니다. 직원은 – 있긴 있어요. 그러니까 대표란 (아주 작은) 걸어 다니는 하나의 회사 그 자체일 수밖에 없단 말씀. 그녀는 자연스럽게 자신의 미래가치를 (대충) 환산했다.

할 수 있는 것은 말하기요, 하고 싶은 것은 글쓰기라. 둘의 교집합 찾기는 실패! 그럼 내가 만들지, 뭐. (무모한, 용맹한) 꼬마 원장은 말하기와 글쓰기 사이에 영어라는 콘텐츠를 집어넣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냐고? 뻔하지. 영어책 만들기. 정확하게는 교재 집필 – 에 가깝다만. 아무튼, 더 나은 수업의 질을 위해 (겸사겸사) 그녀는 자신의 첫 책을 자체 제작하기에 이르렀다. 문제집과 작가는 너무 거리가 먼 것 아니냐고요? … 노코멘트. 하나하나 따지지 말고, 각박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한 신진 이방인의 발버둥 정도로 넘어갑시다. 그거라도 해야 숨 쉴 수 있었거든요.


어쨌거나 이것도 명백한 창작행위잖아? 그럼 예술 아닌가. 하고 싶은 분야가 정확히 뭔지도 모르면서. 꼬마 원장은 제법 뻔뻔해졌다. 선생이란 무릇 – 자신을 드러내고, 목소리를 낼 수밖에 없는 존재가 아니던가. 거기에 글 하나 더했다고 크게 달라지랴. 그럼 세상을 뒤집어야지. 그.래.서. 비싼 돈 주고 연기학원에 가서 배운 게 영어책 만들기뿐이냐고? 그것도 원래 영어 강사를 하던 사람이? A, 왜 이래. 돈은 거짓말하지 않는다고 ☆ 연기와 수업 or 배우와 강사의 연관성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한다면 – 경기도 오산이다!

가장 처음 배우는 건 발성, 소리를 멀리 뻗어 보내기. 공간의 확장. 성대가 약한 편이던 꼬마 원장에게는 유용하기만 한 이론과 실습이었다. 다음으로 등장하는 이론은 화법과 화술. 같은 문장을 여러 번 쪼개어서, 매번 다른 파트에 쪼를 넣어보기. 말끝의 음을 내렸을 때와 올렸을 때 어떤 감정 전달의 차이가 있는지 비교분석. 이거야말로 목을 많이 쓰지 않고도, 효과적으로 분위기를 장악할 수 있는 비법이 아니겠어?! 같은 문장을 말하더라도, 듣는 사람에게 어떤 느낌을 전달하고 싶은지 – 라는 선량한 의도로 시작해서 화를 내지 않고도 목소리로만 분노를 싣는 skill 획득이라는 불량한 결과로 끝나기까지 –를 배울 수 있는 아모르 노다지 파티였다. 최소한의 에너지로 최대한의 시너지를 내는 (말하는) 사람이 되는 방법. 그걸 배운 것만으로도 충분했(겠)지만,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는 법 ☆


꼬마 원장은 초록빛 무대 – 칠판 –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더 정확히는, 칠판 앞에서만 말하는 사람으로 남고 싶지 않았달ㄲr. 기왕 언어에 재능을 가지고 태어났는데 평생 선생님만 하고 사는 건 좀 아깝잖아. 운이 좋아서 벌써 인생의 Main Quest를 다 깬 거라면 – 히든 스테이지를 열어야지. 안 그래? 이른 나이의 성공만큼 영광스럽고 공허한 게 어딨어. 없지. 어떤 형식으로든 사람들 앞에서 말해야 하는 운명이라면 마이크랑 무대 정도는 직접 고를 수 있잖아. NPC가 아니라 Player라면서. 정신 차려 플레이어, 맵은 네가 정하는 거야.


Mission Reminder : 예술가로 살아남기.


わかったるよ。(* 알겠다구요) 근데 예술도, 예술가도 사람마다 정의하기 나름 아닌가?! 보고 싶어. 기다릴게. 괜찮아. 너 진짜 짜증나! 때로는 이런 문장들이 사랑을 말하는 것처럼, 사람마다 표현하는 방식에도 차이가 있는 거잖아. 보통 언어, 사진, 영상, 미술, 무용, 공연 정도를 예술이라고 말하니까…. 기록, 표현, 말 – 이런 것도 예술의 범주에 들어간다면 나도 처음부터 어엿한 예술가였던 거지! 이건 처음부터 이긴 게임인 거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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