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의 슬기롭고 싶은 다이어트 (2)

이한울 ━ 흔적에 참여하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

by ㅎ과ㅇ

면역력이 떨어질 대로 떨어져 결국 코로나에 걸리고 말았다. 나는 전화를 받은 순간, 태평하게 영화나 보며 아몬드를 오독오독 씹고 있었다. 곧 있을 큰 오디션이 예정되어 있어 밥도 거른 상태였다. 어쩐지 먹는 내내 아몬드 맛이 느껴지지 않더라니. 눈물을 훔치며 짐을 챙겼다. 마지막으로 알코올로 집을 소독한 뒤, 응급차에 탔다. 체온을 재보니 열이 있었다. 어쩐지 전날 밤에 목이 아프더라. 남의 눈치를 보는 게 습관이던 나는, 타인에 대한 상태는 예민하게 잘 인지하면서 정작 내 상태는 제일 늦게 알았다. 응급차는 동네를 순회하며 나처럼 코로나에 걸린 사람들을 한 명씩 태웠다. 나는 문이 열릴 때마다 어떤 사람들이 탈지 궁금해했다. 탑승자는 남녀 할 것 없이, 학생부터 나이 지긋하신 분들까지 다양했다. 마지막 탑승자를 태운 뒤, 응급차는 본격적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각자 가방도 다르고 표정도 달랐다. 나는 사람들의 얼굴, 상태들을 관찰하며 생각했다.

'이럴 때는 이런 표정과 이 정도의 에너지구나.'

이때만 해도 살만했다. 격리소에 도착해서 각자 배정을 받은 후, 방으로 들어갔다. 가자마자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참았다. 이내 정신을 차리고, 내가 지금 여기서 무얼 할 수 있을지 생각했다. 방은 크지 않았지만 있을 건 다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곧 도시락이 도착했다. 나는 그때까지 먹은 게 아몬드뿐이라서 배가 너무 고팠다. 봉지를 열어보자, 편의점 도시락이 있었다. 나는 그대로 도시락을 봉지 안에 넣었다. 편의점 음식은 먹을 수 없었다. 과거의 나라면 편의점 도시락에 라면까지 야무지게 먹었겠지만, 지금의 내가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아니었다. 곧 큰 오디션이 있는데 살이 찔 수는 없었다. 과일 몇 개 집어 먹고 물배를 채운 뒤 침대에 누웠다. 가족들과 친구들에게 연락이 왔다. 순간 무기력해졌다. 정확히는 억울했다. 어디 놀러 가지도 않았고 정말 집, 연습실만 오고 간 게 전부인데. 이동 동선을 보낼 때 '나도 참 나다'라고 생각했다. 왜 하필 나야, 근면 성실하게 오디션만 준비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코로나에 걸린 건, 열심히 했다는 이유 하나였다. 침대 위 휴대폰에서 진동이 힘차게 울렸다. 카카오톡 메시지였다.

"그러게 먹으라니까 왜 안 먹어서는."

꾹 참아 왔던 나의 눈물이 고작 저 메시지 하나에 터져버렸다. 도대체 어떻게 먹으라는 말인가. 나는 다이어트하면서 운동도 매일 했다. 슬픈 현실은... 타고난 근수저라 근육이 잘 붙었고, 그게 살찐 것처럼 몸이 매우 커 보였다. 물론 잠깐의 펌핑인 것도 알고, 누군가에게는 부러운 체질이란 걸 안다. 하지만 그때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할 수가 없었다. 아니, 내 몸이 너무 싫었다. 바라는 몸이 되기 위해서 운동보다는 식단 조절을 해야만 했다. 그게 내 다이어트 법칙의 9할이었다. 격리하는 2주만, 딱 2주 동안 잘 참아서 이 몸 그대로 나가길 바랐다. 그렇게 눈물 젖은 베개를 꼭 끌어안고 잠이 들었다.




새벽이 되자 배가 아팠다. 아침에 아몬드를 많이 먹은 탓인가 생각하며 화장실에 갔다. 자다 깬 탓에 볼일을 보자마자 다시 침대에 쓰러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 신호가 왔다.

'덜 쌌었나...?'

이상하게 생각하며 다시 화장실 변기에 앉았다. 다 끝났다고 생각하고 일어나자마자 거짓말같이 또 신호가 왔다. 먹은 게 거의 없는데도 계속 나왔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아침을 맞이했다. 전화로 의사 선생님께 증상을 말하고 지사제를 요청했다. 그러자 약이 아닌 응급차가 왔다. 내 증상은 격리만으로 끝낼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상태라 병원으로 가야 한다는 조치가 내려졌다. 살아생전 타본 적 없는 응급차를 두 번이나 탔다. 입원 한 번 해본 적 없는 건강한 몸이었는데. 어째 다이어트를 시작한 후로 연약한 삶을 겪게 됐다. 병실은 6인실이었다. 이미 나 말고 세 분이 더 누워 있었다. 내 오른쪽 침대에는 외국인 분이 누워 있었다. 평소에 나였다면 넉살 좋게


"where are you from?"

하고 물어봤겠지만, 우리 모두 그럴 여유가 없었다. 간호사 선생님이 방진복을 입고 들어 왔다.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목소리가 따뜻했다. 격리 하루 만에 사람이 그리웠던 것인지 그 별거 아닌 간호사 선생님과의 대화가 적잖이 위로됐다. 환자복으로 갈아입으라는 간호사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얼른 화장실로 갔다. 밖에서 입고 온 옷을 벗고 거울을 봤다. 아직 하나도 살이 찌지 않았다. 안도하며 환자복으로 갈아입었다. 신생아 때 이후로 처음 입은 환자복은 굉장히 컸다. 옷이 커서 그런가 좀 더 야위어 보였다. (은근히 만족스러웠다.) 밖으로 나가서 침대에 누웠다. 병원에 입원하는 바람에 계획이 더 틀어졌다. 격리소에 있을 때는 그래도 방에 나 혼자라 연기 연습도 하고 이것저것 할 수 있는 게 많았는데, 병원은 모든 게 쉽지 않아 보였다. 다행히 집에서 나올 때 책과 노트북을 가지고 나왔었고, 앉아서 할 수 있는 연기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 2주만 버티면 된다. 곧 있을 큰 오디션은 한 달 반 뒤고 2주 뒤에 나가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때 갑자기 전화벨 소리가 들렸다. 병실은 창가 부근 전화기가 딱 한 대 있었다. 창가 쪽에 계신 분이 힘겹게 일어나 전화를 받았다.

"이한울 님...?"

그분이 나에게 전화를 받으라고 했다. 의사 선생님이었다. 선생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전화가 끊기기 전 급하게 언제 퇴원할 수 있냐고 물었다.

"최소 한 달 뒤에 나갈 수 있는데?"

나는 사정을 말하며 한 달은 절대 안 된다고 했다. 의사 선생님은 (솔직히 본인에게는 전혀 상관할 바가 아닌) 이야기를 잘 들어주시고는, 빨리 퇴원하고 싶으면 밥을 먹으라고 했다. 이놈의 밥, 밥... 코로나는 따로 약이 없기도 하고 젊은 사람들은 그저 밥만 잘 먹으면 금방 낫는다고 했다. 솔직히 어이가 없었다. '한국인은 밥심'이라는 말처럼 으레 어른들이 하는 말로 들렸다. 하지만 점심 식사가 들어오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허겁지겁 먹었다. 정말 오랜만에 먹은 흰쌀밥이었다. 제대로 된 밥과 반찬에 마음 한구석은 걱정이 들끓었지만,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 거짓말같이 바로 생리가 터졌다. 어른들 말씀은 잘 들어야 하는구나. 나는 처음으로 삼시 세끼를 숙제처럼 열심히 먹었다. 하지만 쉽게 나아지지 않았다. 낮에는 열 때문에 머리가 핑핑 돌아서 앉아 있기도 힘들었다. 설사는 멈췄지만 열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밤마다 간호사 선생님이 들어와 온도를 쟀다. 밤에는 온도가 더 떨어지지 않았다. 열 때문에 입맛이 없던 나는 밥 먹기 힘들다 했고, 선생님은 밥 대신 어르신들이 먹는 우유 같은 걸 줬다. 와중에 살이 덜 찌고 싶은 한심한 마음이 아직 남아 있었다. 남은 끼니는 전부 우유로 때워야겠다고 생각했다. 유감스럽게도 그 우유는 맛이 없었고, 다음 날 아침 정기 검진에서 폐렴 초기 진단을 받았다. 전화기 너머 의사 선생님이 말했다.

"폐렴이면 입원 기간이 더 늘어날 수도 있어요."

이제 더는 물러날 곳이 없었다. 살이 찌든 말든, 낫는 게 먼저였다. 열심히 밥 먹고 열심히 잤다. 단순히 '할 게 없어서', '배가 고파서'가 아닌 살기 위해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다음 폐렴 검사 때까지 나는 나아야만 했다. 정말 신기하게도 며칠 밥을 열심히 먹자 약을 먹지 않아도 열이 떨어졌다. 열이 떨어지니 그제야 주위를 볼 여유가 생겼다.

병실에 있는 사람 중 내가 제일 막내인 듯했다. 맞은편 여자 두 분은 나보다 더 오래전에 입원한 것 같았다. 그들의 익숙한 행동과 사물함 속 물건들이 그걸 증명했다. 내 오른쪽에 누워 있던 외국인 분은 이따금 창밖을 오래 바라봤는데, 나는 가끔 그녀가 어쩌다 한국에 와서 병에 걸렸고, 이곳까지 오게 됐는지 궁금했다. 그녀는 병실 사람 중 가장 자주 전화를 했다.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이 작은 목소리로. 얼핏 들었을 때, 불어인 것 같았다. 그때 처음으로 그녀의 웃는 얼굴을 보았다. 병원에 입원해 보지 않았으면 평생 모를 순간들이었다. TV도 없는 병실이었고, 열 때문에 몸이 무거워 그 누구도 화장실 갈 때 빼고는 움직이지 않았다. 약기운에 모두가 매번 비슷한 시간에 잠을 잤고, 정해진 식사 시간에 일어났다. 우리는 밥 먹고 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늘 휴대폰을 바라봤다. 휴대폰이 없었다면 우리는 조금 더 친해질 수 있지 않았을까. 그렇게 여자 넷은 고요하게 꼬박 한 달을 함께 지냈다. 그러던 중 전화기가 요란하게 소리를 냈다.

간호사 선생님이었다. 그녀는 전화 상대를 바꿔가며 우리 네 명 모두에게 미션 아닌 미션을 줬다. 그러나 외국인인 그녀는 쉽게 알아듣기 어려웠던 거 같다. 그때 처음으로 한국인 세 여자가 말을 텄다. 우리는 이미 코로나에 걸린 사람들이라 거리 두기를 하지 않아도 되었지만, 늘 각자의 침대를 벗어나면 마치 용암이라도 닿아 죽을 것처럼 움직이지 않던 그녀들이 전화기 앞에 옹기종기 모였다. 정말 웃기게도 하루 종일 휴대폰을 붙들고 있었으면서 그 누구도 번역기 쓸 생각을 하지 못했다. 영어도 쉽게 통하지 않는 그녀에게 우리는 손짓, 발짓을 넘어 표정까지 썼다. 우리는 그때 처음으로 다 같이 웃었다. 순간 나는 코로나 확진받고 처음 웃었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뭐가 그렇게 속상해서 3주 내내 웃지도 않았을까. 나는 매일 밤 내일의 두려움을 안고 잠들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 낫고 있으며, 다 나으면 당장 다음 주에도 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가게 되면 큰 오디션까지 2주의 시간이 있고 그 안에 많은 걸 이루고 해낼 수 있다며 자기 최면을 걸었다. 연락이 오는 친구들에게 걱정하지 말라며 말했지만 정작 나는 그 최면에 빠지지 않았다.


그녀들과 한바탕 웃고 나니 설령 그 오디션에 떨어진다고 한들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배우의 길을 걸어가면서 이런 일이 한두 번일까? 그때마다 이렇게 침울해하고 내일이 없는 것처럼 하루를 보낼 것인가. 아니다. 절대 그럴 수는 없다. 나는 침대에 앉아 아침 식사 때 나온 요구르트를 원샷했다. 상큼했다. 내 기분도 상큼해졌다.

결국 나는 한 달을 꽉 채워 퇴원했다. 세 분은 내가 퇴원하기 전 이미 먼저 떠나보냈다. 다들 나보다 하루, 이틀, 빠르게는 일주일 정도 먼저 퇴원했다. 그때마다 우리는 모두 축하 인사를 건넸고, 그 흔한 인스타그램 아이디 교환 같은 건 없었다. 이제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지만, 그녀들의 웃음소리는 생생하다. 나는 간호사 선생님에게 감사 인사를 전한 뒤, 병원 엘리베이터에 탔다. 나는 들 것에 눕혀 들어왔던 병원을 두 발로 걸어 나갔다. 그러고는 곧장 무섭게 날 기다리고 있는 체중계 위로 올라갔다.


입원하기 전보다 5kg가 쪘다.

나는 퇴원한 이후로 지금까지 계속 다이어트를 하고 있다. 하지만 더 이상 몸무게를 재지 않는다. 체중계는 더 이상 날 기다리지 않고, 나는 그 위에 서지 않는다. 그렇게 된 지 3년이 넘었다. 입원 내내 나를 울리게 했던 큰 오디션에는 떨어졌다. 하지만 나는 지금 배우 일을 하고 있다. 그때보다 더 활발히 그리고 재미있게. 살이 쪘다고, 큰 오디션에 떨어졌다고 나의 내일은 무너지지 않았다. 그날 이후 재능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는다. 내 재능이 무엇인지 알아냈기 때문이다. 내 재능은 버티기. 나는 무슨 일이 있든 버틸 수 있다. 설사를 하루 종일 해도, 열이 39도까지 올라도, 폐렴에 걸려도, 병원에 한 달 동안 입원해도 괜찮다. 어떤 험난한 과정에도 굴하지 않고 버틸 수 있다. 결국에 살에 다시 찌고, 바라던 오디션에 떨어졌지만 괜찮다. 바라던 결과가 아니어도 버티는 게 재능인 나는 못할 일이 없다. 이런 나라면 성공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내 재능을 마음껏 발휘하여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버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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