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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영화 일기

다호메이

문화 자본

by 빠른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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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호메이>, 마티 디오프


나는 스무 살이 된 이후에 내가 갖고 있던 일종의 결핍을 채워가는 것에 몰두했었다. 그것은 바로 다양한 문화적 경험을 누리지 못한 것이었고, 대학에 가서 갑자기 주어진 방대한 양의 자유시간의 대부분을 그것을 해소하는 데에 소진하기 바빴다. 학교의 소재지가 서울이나 수도권이 아니었던 터라 금요일이 되면 기숙사를 빠져나와 문화 인프라가 몰려 있는 서울행 버스를 타야 했고, 거의 용돈과 얼마 되지 않는 수입의 상당량이 교통비에 소요되는 것이 뼈아팠지만 그것을 상쇄하고도 남을 정도로 그 전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여러 문화활동은 내 큰 즐거움이었다.


영화, 뮤지컬, 박물관, 미술관, 공연... 이것 저것 가리지 않고 일단 다 경험해보려 했다. 그것들을 경험하면서 내 취향이 무엇인가에 대해 처음으로 고민해보게 되었고, 내 취향이 아니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그저 내가 제대로 경험하지 못했던 무지에서 오는 착각이었다는 깨달음을 얻은 적도 있었다. 물론 지갑 사정과 학업 때문에 부득이하게 계속 향유하기 어려운 것들도 있었지만, 그것들을 제외하고서라도 즐길 것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리 큰 아쉬움은 없었다. 그 중 내가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했던 것은 영화와 전시회 관람이었다. 비교적 적은 비용으로 즐길 수 있었고, 그 경험이 끝나고나서 여운이 짙게 남았던 점이 특히 더 좋았다.


스무살이 된 후 다양한 경험들을 하고 공부를 하면서 들었던 아쉬움은 보다 다양한 경험들을 일찍 접했다면 어땠을까에 대한 것이었다. 학생 때, 힙합과 상업영화, 게임과 같은 것들을 즐기며 보냈던 시간의 일부라도 클래식, 아트하우스 영화, 스포츠, 악기 연주와 같은 활동으로 보낼 수 있었다면 아마 나의 가치관 형성이나 진로 선택에 유의미한 영향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진지하게 했었다. 앞서 예시로 든 경험들을 전자와 후자로 분류한 것은 부르디외가 말한 계급으로서의 문화적 위계, 즉 문화 간의 고저를 나타내기 위한 것은 아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부터 비교적 쉽게 접할 수 있는 경험과 그렇지 못한 것을 표현하기 위함일 뿐이다. 태어난 가정환경이 성장에 있어 큰 영향을 미치지만 그 환경에서 비롯되어 발생하는 문화적인 경험의 차이가 성장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한다.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이나 국립중앙박물관 등을 가보면 단체로 관람 온 학생들을 종종 마주치곤 한다. 주로 서울 소재 학교의 학생들이 관람을 많이 왔었는데, 이러한 양질의 문화 인프라 속에 둘러 싸여 있다는 것 자체가 사실 굉장한 축복이라고 생각했다. 한국의 근대미술, 선사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의 여러 유물들과 같은 것들을 감상하면서 단순히 교과서에 실린 사진을 보는 것을 넘어서는 생생한 경험을 한 번이라도 해보는 것이 어떤 학생에게는 삶에 있어 굉장히 중요한 순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내게는 우연히 본 고전 영화가 그러했고, 다른 경험들 역시 누군가에게 살면서 인생의 방향을 설정하는 이정표나 힘들 때 삶의 원동력이 되어주는 소중한 기억으로 남기 때문에 짧게라도 다양한 문화활동을 경험하게 해주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


이미 늦었는지도 모르겠지만 지방 소멸이 심각한 화두로 떠오르면서 이제라도 지역 인프라를 강화하기 위한 노력들을 하고 있는 것 같다. 문화 인프라 역시 서울에 심각하게 쏠려 있는 만큼 지역으로 분산될 필요성이 있다. 수도권이 아닌 다른 지역에 사는 아이들도 양질의 문화활동을 향유할 수 있는 충분한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다호메이> 후반부의 토론 장면에서 가장 공감이 됐던 부분도 이와 비슷한 내용이었다. 먼 거리에 있는 아이들은 어떻게 반환된 유물들을 접할 것인가. 미래를 생각할 때, 우리 교육이 앞으로 이 부분에 더 신경을 썼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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