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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영화 일기

파쇄태양지심

소중한 것

by 빠른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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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쇄태양지심>, 비간


1. 삶을 살아간다는 건 단순히 숨만 쉬는 것만으로는 역부족이라는 것을 처절하게 느낀 적이 있다. 앞에 그저 평탄하고 안정적인 길만 놓여진다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삶이라는 궤적에는 여러 갈림길이 놓여 있다. 성장과 퇴보. 인생의 어떠한 요소이던간에 다음 스텝으로 넘어가기 위한 갈림길은 어김없이 등장하고야 만다. 이제는 너무 잘 알면서도 나는 아직도 갈림길에서 성장이 아닌 길을 '현상유지'라는 표지판이 아닐까 하고 자기최면을 걸곤 한다. 자신을 한 단계 성장시킨다는 것, 다시 말해 삶을 계속 살아간다는 건 뿌듯한 일이지만 동시에 부담스럽고 피하고 싶은 일이기도 하다. '성장'으로 가는 길을 무사히 통과하고 나면 달콤한 사탕을 입에 넣을 수 있다. 허나 이에 도달하기 위해 수반되는 고통을 견뎌내야 하기에 기꺼이 발걸음을 내딛지 못하는 것 같다. 어렸을 때, 나는 갈림길 너머에 달콤한 사탕이 있다는 말만 들어왔던 것 같다. 아니, 어쩌면 달콤한 사탕이 아니라 만사가 해결되는 영험한 환 같은 게 있을 거라 들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확실히 그 길을 통과하면 그 힘들었던 과정을 잊게 해줄만큼 달콤한 무언가가 있긴 했다. 그러나 그것은 순간의 환희를 가져다줬을 뿐이었고, 곧바로 다음 갈림길을 마주하여야만 했다.



2. 누구에게나 잊고 싶은 기억이 있다. 나에겐 취업을 하지 못해 고통스러웠던 지난 몇 년의 시간이 그러했다. 스무 살 이후로 이렇다 할 성공경험은 없었지만 그래도 꾸준히, 열심히 하면서 나름 내실을 잘 다져왔다고 생각했기에 자신을 믿고 준비에 매진했다. 여러 해 동안 매진했지만 결국 결승선을 눈 앞에 두고 보기 좋게 고꾸라졌고, 고등학교 때부터 목표로 했던 그 길에서 탈선하고야 말았다. 그 무렵 나를 괴롭게 했던 것들을 생각해보면 물론 목표를 이루지 못했다는 좌절감이 지배적이었지만, 그 이후에 내 상황을 살펴본 뒤로 더 힘들었던 건 내가 준비했던 지식들이 다른 곳(어떤 분야로 갈 지는 몰랐지만)에서는 그닥 쓸모 없다는 것과 주변에 남아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어느새 내 안에 가득 쌓여 있던 패배의식과 자기혐오였다. 이후 지치긴 했지만 포기하지 않고 다른 문을 두드린 끝에 다행히 취업에 성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열등감은 바쁜 환경 속에서도 쉽사리 사라지지는 않았다. 내가 원래 목표로 했던 것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그리고 다시 도전해도 도달하지 못할 것이라는 내면의 좌절감은 기어코 내가 그것에 매진했던 지난 몇 년 자체를 부정하고 숨기는 데에 이르고야 말았다. 그 몇 년을 마치 지금의 직장에 자리잡기 위해 보낸 시간으로 덮어버렸다. 내 열등감을 덮기 위해 나 자신을 더 낮추고, 감춰버렸다. 다행히 지금은 그런 콤플렉스에서 조금씩 벗어나 그러한 짓들을 그만두는 데에 성공했다. 지금 내가 가장 잊고 싶은 기억은 바로 나의 과거를 부정하려 애썼던 바로 그 시기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 기억을 지울 수 없다는 점도, 그 시간들이 없었던 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도 잘 알기에 나의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3. 어떠한 관계에서 상대방에게 내게 소중한 무언가를 주고 싶다는 감정이 드는 것만큼 강한 끌림을 나타내는 신호가 또 있을까. 하지만 그 소중한 물건에 담긴 마음까지는 잘 전해지지 않는 경우가 꽤 있는 것 같아 애석할 때도 종종 있다. 서운하긴 하지만 사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모두가 나와 같을 수는 없다는 대인관계에서의 대명제를 기초로 삼아 반추해볼 때, 나 역시 상대방의 호의가 마냥 고맙게 느껴지지 않았던 적도 더러 있다. 마음을 전달한다는 게 그만큼 어려운 일이라는 걸 알기에 상대방이 나의 진심을 알아차려주는 게 그렇게 기쁘지 않을 수 없는 것 같다. 또 그렇기에 나 역시 상대방의 호의가 마냥 반갑지는 않더라도 그 안에 담긴 마음을 한 번 헤아려보려 노력한다. 소중함을 소중하게 여길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





가끔 삶이 지치고 내가 실패한 삶을 살고 있다고 느껴지면 이 영화를 찾아보곤 한다. 엔딩 크레딧을 제외하면 15분이 채 되지 않는 짧은 영화이지만 보고 나면 왠지 모를 소소한 위로를 받곤 한다. 조금 과장하자면 정말 이 영화를 언제 또 다시 보고 싶어질 지 모르기 때문에 쉽사리 MUBI 구독을 끊지 못한다고 말할 정도이다. 여전히 내 삶에서 무엇이 소중한지에 대해 명확한 답을 찾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 오늘도 문득 힘든 일로 인해 내 인생에 관한 복잡한 생각들이 머릿속을 헤집어 놓았다. 그러면 이런 식으로 다른 매체로 말미암아 머릿 속에 드는 생각을 정리하곤 한다. 무작정 떠오르는 생각들을 글로 담다보면 정돈도 되지 않고, 쓰다가 길을 잃어버리곤 하기 때문에 방향을 잡아줄 무언가가 내겐 필요하다.


다른 비간 감독의 영화들도 뭔가 극적인 내러티브는 없지만 보고 나면 묘한 감동이 밀려와 꽤 오랫동안 여운이 남았었다. 그의 신작 <광야시대>는 언제쯤 만나볼 수 있을까. <지구 최후의 밤>과 <카일리 블루스> 모두 극장에서 보면서 감탄했었기에 이번 작품 또한 마치 불가항력처럼 나의 두 발을 극장으로 이끌 거라 확신한다. 그가 선사할 시네마틱 경험이 벌써부터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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