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모르는 사이 생긴 장어 트라우마
우리 팀장님은 나랑 정확히 10살 차이가 난다. 그래서 서로 앞 자릿수가 바뀌는 해가 같다. 그래서일까. 얼마 전, 팀장님이랑 지방 출장을 가던 길에 문득 궁금해졌다.
“팀장님. 팀장님은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몇 살로 돌아가고 싶으세요?”
어느새 서른을 앞두고 있는 나는, 이제 곧 마흔을 앞두고 있는 팀장님의 답변이 궁금했다.
“나는 20대 초반!”
정말 1초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이었다.
팀장님은 마음 편히 놀 수 있었던 20대 초반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고 하셨다. 지금은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그리고 두 아이의 아버지로서 짊어지고 있는 책임감 때문에 20대 때 누렸던 자유가 유독 그립다고 하셨다. 사실 난 팀장님의 답변이 크게 공감가지 않았다. 내가 아직 20대의 끝자락을 누리고 있어서일까. 아니면 한 달 뒤면 내 나이 앞에 숫자 2가 사라진다는 사실이 아직은 그다지 실감 나지 않아서일까.
“전 별로 돌아가고 싶단 생각은 안 들어요. 저에게 20대 초반은 이런저런 생각으로 너무 가득 찼던 시기였어요. 오히려 어느 정도 자리 잡은 29살의 안정감이 더 좋은걸요!”
“네가 내 나이 되면 또 말이 달라질걸?!”
서울로 돌아오는 길 내내 계속 생각했다. 과연 10년이 지나 내가 팀장님 나이가 되면 나도 1초의 망설임 없이 ‘20대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하게 될까? 한 가지 확실한 건 있다. 10년 후의 내 대답은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일단 지금의 나는 20대 초중반의 시절로 절대 돌아가고 싶지 않다.
이유는 딱 한 가지다. 그때의 난 내적으로 많이 방황했고, 많이 방황한 만큼 너무나도 치열하게 살았다. 마치 한 판의 레이스를 달리는 경주마 같았다고 해야 할까. 고등학교 졸업, 대학교 입학, 그리고 취업에 이르기까지 난 사회가 정해놓은 인생의 고정 틀 안에서 일단은 뭐든지 열심히 하고 보는 전형적인 모범생 아이였다. 그때 그 시절에만 가질 수 있었던 낭만이 때로는 그립다. 하지만 다시 그때로 다시 돌아가고 싶을 정도는 아니다. 다시 돌아가서 그 고뇌의 과정을 다시 겪는다고? 어후, 나는 두 번은 못하겠다.
들으면 들을수록 위로가 되는 노래들이 있다. 나에겐 GOD의 <길>이 그렇다. 왠지 모르게 들으면 마음 한편이 차분해진다. 마치 내 마음을 알아준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일까. 이미 알 사람들은 다 알겠지만 이 노래는 이렇게 시작된다.
내가 가는 이 길이 어디로 가는지. 어디로 날 데려가는지. 그곳은 어딘지 알 수 없지만 알 수 없지만 알 수 없지만 오늘도 난 걸어가고 있네.
내가 20대 때 느낀 감정들을 이만큼 잘 표현한 가사가 또 있을까? 당시의 난 내가 앞으로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 명확하게 알고 싶었다. 하지만 구체적이지 않은 막연한 느낌만 내 안에 가득했다. 고민을 많이 한다고 고민이 해결되면 그건 고민이 아니지 않은가. 그때의 내가 할 수 있는 건 딱 한 가지였다. 내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내 위치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 그러다 보면 언젠간 나만의 길이 보이겠지 하는 그런 마음이었다.
이런 생각이 짙어서였을까. 대학 시절의 나는 일단 학점에 목을 매는 학생이었다. 어떻게든 A학점을 받기 위해 철저히 시간관리를 했다. 이 외에도 각종 대외활동부터 시작해서 뉴욕 해외 인턴까지 두 차례 경험하면서 결국 난 3, 4학년 연속 전 과목에서 A학점을 받고 졸업할 수 있었다.
“넌 진짜 독하다. 난 너처럼은 못 하겠다”
함께 유학 생활을 한 선배 오빠가 졸업식 날 나에게 한 말이다. 내심 뿌듯했다. 매일 같이 아이스 아메리카노 벤티 사이즈를 들고, 도서관에서 열렬히 불태웠던 내 지난 시간들이 마치 하나의 훈장처럼 느껴졌다. 스스로가 대견했다. 그렇게 길고도 짧았던 나의 미국 유학생활을 잘 마무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올 때쯤, 나는 앞으로 뭐든지 술술 잘 풀릴 줄 알았다.
“와~ 스펙 진짜 좋으시네요!”
취업 스터디에 갈 때마다 내가 듣는 말이었다. 하지만 이런 말들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힘들게 자기소개서를 써서 대기업 서류에 붙으면 늘 인적성 시험 앞에서 무너졌다. 면접관에게 하고 싶은 말들이 너무 많았지만 면접 문 앞까지 가는 게 이렇게나 힘들 줄이야. 그 당시 나에게 취업은 마치 바늘구멍을 뚫는 기분이었고, 절대 깨지지 않는 커다란 벽이 내 인생을 턱 하고 가로막고 있는 듯했다. 그 전까지의 내 인생은 열심히만 하면 어떻게든 결과가 잘 나왔었는데, 취업이란 관문은 열심히만 해서 무조건 되는 건 아니었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까지 난 꼬박 일 년이 걸렸다.
첫 하반기 시즌을 지나 상반기도 어느덧 마무리되던 시점이었을 것이다. 오랜만에 네 가족 모두 모여 외식을 하러 갔다. 취업 준비한다고 고생하는 둘째 딸을 위해 엄마는 장어구이 맛집으로 날 데려가셨다. 하지만 장어가 맛있게 익는 동안 내 머릿속에는 온통 다음 주에 제출할 자기소개서 생각뿐이었다. 언니가 부모님과 즐겁게 이야기를 하는데도 내 귀에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아, 언제쯤 끝날까. 끝이 나긴 할까? 끝나더라도 잘 끝나야 할 텐데’
나의 이런저런 생각들이 얼굴에 다 티가 났는지 엄마는 말씀하셨다.
“괜찮아~학영아. 너무 조급해하지 마. 너 아직 24살이잖아~ 너무 걱정하지 마.”
그리고 뒤이어 아빠가 꺼내신 말 한마디에 그만 울음이 터지고 말았다.
“아빠 아는 친구 회사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안되면 거기 무조건 들어갈 수 있게 해 줄게”
괜찮으니깐 마음 좀 편하게 먹으면서 준비하라고 하신 격려의 말씀이었다. 순간적으로 마음이 편해지긴 했는데 동시에 내 마음도 같이 무너져 내렸다. 이 말을 듣고 몇 초동안이지만 마음이 순간적으로 편해진 내가 너무 싫었다. 내가 어떻게 하다 이렇게까지 된 거지? 나는 그냥 열심히 하루하루를 살았을 뿐인데 내 앞에 절대 움직일 것 같지 않은 커다란 바위 덩어리가 내 모든 길을 막고 있는 기분이었다. 계속 열심히 하면 되기는 하는 걸까. 이런저런 생각들과 함께 간신히 붙들고 있었던 내 자존감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그렇게 억눌렀던 내 안의 여러 감정선들이 하나둘 꼬이기 시작하면서 결국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그렇게 난 밝은 주말 대낮 장어구이집에서 펑펑 울고 말았다.
아직까지도 그때의 감정이 고스란히 떠오르는 걸 보면, 그때는 아마 내 취업준비 시절 중에서도 가장 힘든 시기였던 게 분명하다. 5년이 지난 지금의 난 그 어느 때보다 평온한 나날들을 보내고 있다. 만족할만한 연봉과 워라밸, 그리고 업무 성취도까지. 만족도로 따지면 거의 100%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만큼 난 지금 내 직장에 너무 만족한다.
다시 20대로 돌아가고 싶진 않지만, 만약 딱 하루만 돌아갈 수 있다면 5년 전 장어구이 집에서 울고 나온 그날의 나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네 잘못이 아니야”
서핑할 때를 생각해봐. 아직 너만의 파도가 오지 않았을 뿐이야. 그 파도가 오기 전까지 계속 너의 물살을 가르면 돼. 그리고 생각보다 그 순간은 빨리 올 거야. 그리고 믿기 힘들겠지만 5년 후엔 네가 상상하지도 못할 만큼 반짝이며 빛나고 있다고. 그러니까 너무 조급해하지 않아도 된다고. 지금까지 잘해왔고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있다고. 한 번쯤 내 등을 다독이며 말해주고 싶다.
아무튼 난 그 날 이후로 장어를 먹으러 한 번도 가지 않았다.
나도 모르는 사이 장어 트라우마가 생겼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