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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익명 Apr 30. 2020

무지개빛 세상을 위하여

내가 '나'일 수 있는 세상.

*제 의견은 기존의 페미니즘- 퀴어 담론과는 입장이 다를 수 있습니다.


여성에 대한 차별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을까. 생물학적 레벨에서, 여성은 재생산의 기능이 있는 기관을 가지고 있고 이를 위해 신체 구조가 조직되었다는 것(임신을 위해 몸이 유동성을 가지게 되었고 때문에 근력량이 비교적 적다는 것)부터 시작해보자. 태초에, 정말 생물학적 차이점만이 반영되고 만약 사회가 남성과 여성을 동등한 동반자로서 양육하고자 했다면 아마 여성에게는 남성에게 뒤지지 않는 근력운동이 최고 미덕이 되었을 것이다. 조금 더 운동해서 사냥에 똑같이 나갈 수 있게 하라고. 게다가 현대 사회로 진입하면서 사실상 이 미묘한 태생적인 근력 차이와 재생산 기관으로 인한 불편함은 사실상 극복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 하지만 사회는 그런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았다.


사회는 여성을 동등한 시민으로서 키워내는 대신 남성의 '대상'으로서만 존재하도록 했다. 유모와 가정주부, 하녀로 만들었으며, 창녀로 만들었다. 남성들이 생각하는 아름다움의 기준에 맞는 여성들은 뮤즈라는 인형으로 만들었다. 창조는 남성의 몫이었고, 역사의 목소리는 남성이었다. 이로부터 많은 것이 시작되었다. 


어떤 약자로서의 지위를 갖던, 여성은 그 구조 안에서도 하부에 있다.

정치적인 성별


내가 생각하는 성별 구분의 필요성은, 여성이 가진 정치적인 입지로부터 나온다. 여성은 태어나기 전부터 여성이라는 이유로 제거될 위험성을 더 크게 가지고 있었고, 태어나서는 여성이기 때문에 분홍 옷이 입혀지고 유아기때부터 장모종처럼 머리를 길렀다. 자라면서 지적 가능성은 거세당했고 그 자리에는 가부장제의 판타지(사랑받는 여성)이 큰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여성이기 때문에 자기 검열을 철저하게 했고, 폭력성이 허용되지 않았으며 높은 도덕성을 요구받았다. 당신이 여성이라면 똑같은 살인을 저지르더라도 더 높은 형을 받게 될 것이며 애초에 그 전에 가족에게 성폭력을 당하거나 가정 폭력을 당할 가능성에 더 크게 노출된다. 


만약 누군가가 XXX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났거나, 간성, 양쪽 성기를 다 가지고 태어났는데 만약 외과적 수술 등을 통해 여성으로 키워졌다고 하자. 그렇다면 난 이 사람의 생물학적 성별과 상관없이 정치적인 지위는 여성이라고 생각한다. 생물학적 성질은 아마 이러한 예외적인 케이스를 제외하고는 일치하겠지만, 그것이 핵심은 아니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여성이기 때문에 겪는 차별 속에 자랐을 것이다. 여성이기 때문에 더 좋은 기회를 얻기 어려웠을 것이고, 외모로 인한 스트레스를 더 많이 받았을 것이며, 성폭력의 위험성에 더 크게 노출되었을 것이다. 


나는 만약 함께 숙박시설을 사용하게 된다면 여성을 더 신뢰할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그녀의 성염색체가 XX여서가 아니다. 그녀가 근력이 약해서 물리적으로 나를 공격하기 어려워서가 아니다. (여성도 충분히 물리적으로 나를 이길 수 있다. 물론 더 남성의 신체와 성기 자체가 나를 물리적으로 해하는 데 더 유리할 것이긴 하다.) 나는 그녀의 정치적인 지위를 신뢰하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그녀가 나와 같이 살아온 약자로서의 경험을 신뢰한다. 사회가 그녀에게 폭력성을 (남성에 비해) 허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에게는 여성이라는 기호가 '공격해도 좋은' 대상으로 인식되었을 가능성이 적다. 그녀는 더 높은 도덕성과 자기검열을 체화시켰을 것이며, 적어도 약자로서의 경험을 공유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녀는 불법 촬영물을 보거나 성폭력의 가해자였을 가능성이 적을 것이며, 적어도 나와 비슷한 고통을 공유했을 가능성이 압도적으로 크다. 


성별이 구분되어야 할 이유는 이러한 정치적 약자의 구분과 보호라는 측면에서만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외에는 사회가 관여할 것이 아니다. 궁극적으로는 무엇을 입고, 화장을 할지 말지, 어떤 태도를 보일지, 무슨 역할을 할지는 온전히 개인의 선택이며 그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 (다만 탈코르셋 운동과 같은 규범성을 지니는 운동은, 기존의 사회 질서를 거스르려는 시도로서 의미가 있다. 아직 '궁극적'인 자유가 모든 개인에게 보장되지 않는 단계이며, 탈코르셋 운동은 결국 그 모두를 위한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운동이다.)


사회는, 여성이 받은 불리함에 대해 최소한의 아주 작은 노력을 했다. 최소한의 분리(공간-화장실 분리, 여성을 위한 교육 시설, 성폭력 보호 시설 등), 그리고 최소한의 보상(할당제, 교육 기회 제공)이다. 해당 측면에서 나는 성별이 정치적으로 구분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치적 성별로서 여성, 이는 성별이라는 측면에서의 착취와 억압의 대상을 상징한다.


다양성의 회복을 꿈꾸며


탈남성성 


여성이 여성으로서 정치적 억압을 받는 동안, 남성성에서는 여성에게 강요되는 화장과 의상 등에서의 꾸밈노동, 수동적인, 혹은 ('여성스러운') 성적 매력을 과시하는 태도가 배제되었다. 남성이 장착하기에 이는 '징그러운', '혐오스러운' 것으로 치부되었다. 남성으로 태어났으나 이러한 것을 조금이라도 손 대는 경우, 이는 남성들의 사회에서 절대 허용되어서는 안될 것으로 매장되었다. 남성성의 본질을 이루는 것은 '우월성'이어야 했고, 때문에 소위 사회가 부여한 '여성성'과 관련된 수동성은 철저하게 배제되었다. 


당연히 남성 중에서도 이러한 남성성에 염증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었으며, 지금도 있다. 다만 나는 탈-남성성을 원하는 남성들이 경험한 억압은, 여성들이 경험한 억압과 공통점도 있지만 다른 점이 많다고 생각한다. 물론 연대할 지점이 많겠지만, 분명 다른 고민과 목소리 또한 가졌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때문에 나는 탈남성성 그 자체보다 단순히 '여성'에의 편입이 주된 논의가 되는 현재의 담론에 의문이 든다. 사회의 남성성이 누군가를 힘들게 할 때, 여기서 개인은 두 가지 방법을 생각해볼 수 있다. (1) 여성이 되는 것 (2) 남성성을 해체하는 것. 탈남성성 운동에서, 그들은 여성들보다 동지를 찾기 어려웠을 것이다. 수많은 동료 남성들은 남성성으로부터 수익하고, 이를 타파할 필요성 조차 못 느끼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1)을 권한다. 여성이 사회가 부여한 여성성을 거부한다고 해서 '남성'에 편입되길 바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남성성을 거부하는 이들에게 사회는 '여성에의 편입'만을 적극적으로 권장하고 조명한다. 외과적 수술, 과하게 '여성성'을 표방하는 퍼포먼스, 여성에게만 허용되는 공간의 쟁취, 여성 주민 번호를 얻을 수 있는지 여부. 나는 이러한 단 한 가지 시나리오 - 여성에의 편입이 오히려 기존의 성별 이분법을 강화시키며, 장기적으로 더 많은 사람에게 고통을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 생각은 다음과같다:

(1) 젠더 구분을 없애는 운동이, 여성에 대한 보호의 담장을 낮추는 방향으로만 선행되어서는 안된다. 

(2) 여성으로의 편입이 전부인, 현재의 지배적인 담론은 바람직하지 않다. 


여성은 여성성이 자신을 옥죌 때, 남성이 되는 것을 그 해결방법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1) 아무리 남성으로 외과적 수술을 한들 이 사회에서 당신은 정치적으로 남성만큼의 힘을 얻을 수 없다. (2) 장기적으로, 사회에서 규정한 여성성으로 고통을 받는 것은 나 혼자가 아니다. 내가 여성성이라는 억압을 피해 남성으로 도망친들, 나의 동료 여성들, 후대의 여성들은 그 고통 속에 남아있을 것이다. 때문에 여성 운동은 사회적 여성성의 해체, 그러면서 현 상황에서 불리한 지위에 있는 여성들을 보호하는 역할에 초점을 맞춰왔다. 우리는 남성이 되기 위해 싸우지 않는다. 


성폭력을 고발하는 것, 페미니즘 운동은 현재의 내가 성으로 인해 이미 받은 상처를 지워주지 않는다. 다만, 앞으로 있을 상처를 예방하기 위한 운동이다. 성폭력을 고발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남은 삶이 무너질 것을 각오한다. 다만, 더 이상의 피해자가 발생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 고발한다. 여성들에게 탈코르셋 운동을 하게 만드는 중요한 원동력 중 하나는 유아에 대한 코르셋 산업이다. 결국 이는 나를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새롭게 이 사회를 살아갈 여성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그런 관점에서 내 생각에 지배적인 트랜스젠더 담론은 '어떻게 여성에 편입될까'가 아니라 수많은 성별 규범을 철폐하는 데 있어야 한다. 탈남성성 - 드래그 퍼포먼스를 하면서, 그것에 '여성', '퀸'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는 것이 더욱 더 혁명적이다. 자신이 사회의 남성성에 맞지 않다고 생각하는 남자 아이에게 외과 수술을 하지 않아도, 주민등록상 여성이 되지 않아도 자신으로 살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결국 너의 삶은 너의 성별의 이름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성별에 상관없이 너가 만들어나갈 수 있다는 희망을 주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남성인 동료는, '너가 남자가 아니라고 생각해? 여자가 되면 되잖아.'가 아니라 원하는 것을 함께 해주고, 이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여성 중에도 분명 꾸미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서로에게 힘이 되기 위해서 이를 포기하는 것이다. 남성인 동료들은 그들을 위해 무엇을 포기했는가? 소위 많은 '남성 퀴어 운동가'들은 남성성을 벗어나려는 그들의 움직임을 '그래 너도 여자가 되어라'라고만 지지할 뿐, 사회가 규정한 남성성을 함께 포기하는 집단적인 움직임을 시도조차 하지 않고 있다고 생각한다. 


수많은 성별규범은, 백해 무익하다. 하지만 정치적으로 여성에 대한 보호는 현재 필요한 상태이다. 물론 궁극적으로는 성별 규범 자체가 파괴되어, 젠더 자체가 무의미해지고 성별로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것은 꼭 인정하자. 아무리 기존의 남성성이 마음에 들지 않고, 자신을 남성으로 규정하고 싶지는 않더라도 당신은 남성이라는 정치적 지위 때문에 여성보다 이 사회에서 정치적으로 우월하다. 퀴어 담론에서도 결국은 게이, MTF 담론이 주된 논의가 되는 현 사회를 봐도 알 수 있다. 아직 이 사회에서의 여성의 지위는 사회로부터 보호받을만큼 취약하다. 이제 성별 구분 필요없으니 자유롭게 여성의 영역을 없애자라는 논의가 활발해지기에 한국은 너무 이르다. 


정치는 단순히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누가 이기느냐의 문제이며, 어떤 세력이 더 강한가의 문제이다. 페미니즘 담론 내에서도 스피커의 역할을 하는 사람들에게, 탈남성성은 여성으로의 편입이라고 믿는 사람들에게, 성별 구분이라는 울타리를 당장 없애야 한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화자가 여성인 이상 이러한 담론은 '트랜스젠더 혐오'라는 이름으로 조롱되기만 할 것이다. 내 목소리에는 힘이 없다. 당사자 사이에서 다양한 가능성이 더 많이 자리잡아야 한다. 



나는 무지개빛 세상을 꿈꾼다. 다만 그것은 남성과 여성이라는 컬러파레트로 만들어진 스펙트럼이 아닌, 각자가 자신의 색깔로서 빛날 수 있는 무지개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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