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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익명 May 27. 2020

구두의 환상

20세에 대한 환상을 담았던 소리

고등학생 시절, 아직도 뚜렷하게 기억나는 것들이 있다. 그중 하나는 선배들이 오는 날이면 또각또각 복도에 울려 퍼지던 구두 소리였다. 때때로 졸업한 선배들이 은사님을 찾아뵈러 오기도 했는데, 그 때면 누추한(?) 우리들과는 달리 대입이라는 대업을 마친 선배들, 그중에서도 나름 성공적으로 이를 완수한 것으로 평가되는 선배들은 어찌나 화려해 보이고 부럽던지. 어쩌면 그들을 우리 앞에 세운 선생님들은 내심 ‘너희도 이렇게 되고 싶다면 열심히 공부해’라는 메시지를 주었던 것 같다. 우리는 20년 동안 나비의 서사를 주입받는다. 어느 날 우리가 번데기를 벗어나 화려한 나비가 될 것이라고 믿어버리고 만다.


그렇게 20세가 되었었다. 나에게는 고등학교 복도를 런웨이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일등 대학에 붙은 친구들은 따로 고등학교에서 모집했다는 이야길 들었다. 그렇게까지 이를 갈망하진 않았으므로 (대입에서 벗어났다는 게 더 기뻤다) 나는 나대로 대학 생활이라는 환상을 품고, 그 생활이 나의 지난 수험 생활을 적게나마 보상해줄 것이라고 믿었다. 대학에 간다고, 백화점에 가족과 함께 가서 굽이 높은 구두를 한 켤레 샀다. 소위 대학 가면 예뻐지고 연애한다는 환상이 커졌지만 이것이 나를 실망시키기까지도 크게 오래 걸리지 않았다. 높은 굽을 벗어서 기숙사 앞에서 뛰면서, 소위 말하는 세 번째 소개팅 자리에서 사귀어야 한다는 규칙을 어기면서, 내가 꿈이라고 믿고 있었던 것이 사실 나의 꿈이 아니었음을 깨달아갔다. 사실 남자가 여자를 사랑한다는 것이, 영화에서처럼 목숨 걸고 나를 사랑한다는 뜻이 아님을 배웠고, 꾸민다고 해서 내 삶이 아름다워지지 않는다는 것도 배웠다.


옷과 화장품은 환상을 판매한다. 너도 사랑받을 수 있다고, 운명의 남자를 만나게 될 것이라고. 너의 가치는 이를 통해 올라갈 것이라고. 나도 그런 환상을 벗어나려고 했지만 그 환상은 집요하게 오랫동안 날 놓아주지 않았다. 이 경계를 알기 힘든 두 가지 기만은 뼛속까지 새겨져, 나의 날들을 지배했다.


누군가는 한 살이라도 어릴 때 꾸미지 않으면 후회할 것이라고 하지만, 나는 나의 다른 가능성들을 더 치열하게 탐구하지 않았음이 후회된다. 그런 환상에 날 혹사시키고 괴롭혔던 날들이 더 후회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산만해서 이것저것 해보느라 그렇게까지 꾸미는 데에 몰입하진 않았던 점이랄까. 통탄스러운 것은 정말 안 꾸민 편인 나조차도 그토록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소모했다는 점이다.


만약에 내가 고등학교의 복도를 다시 걷게 된다면, 난 또각또각 대신 뚜벅뚜벅 걷고 싶다. 졸업하면 예뻐지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너의 가능성을 탐구하고, 더 나은 삶에 대해 고민해봐야 한다고 여자 후배들에게 이야기해주고 싶다. 그런 졸업생이 한 명이라도 있었더라면 내 삶도 조금은 달라질 수 있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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