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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익명 May 28. 2020

심장에 수놓은 이야기

구병모 작가의 소설

구병모 작가님에 대한 소개나 추천작은 많이 들어봤는데, 내가 사용하는 서비스에서 여성 작가들의 유명한 소설들을 찾는 것이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던 중 <심장에 수놓은 이야기>라는 소설을 발견하게 되었고, 굉장히 짧은 소설이기에 금방 읽어내려갔다. 그리고 정말 짧은 글이지만 잊을 수 없는 감명을 받았다. 뭔가 내가 ‘상상력이 뛰어나다’같은 평가는 감히 할 수 없는 종류의, 그보다는 읽으면 읽을수록 먹먹해지는 느낌이었다.


소개

범인을 찾을 수 없는 사건들이 벌어진다. 현장에는 피해자뿐, 사실 그들에게 죽은 사람을 해할 수 있는 힘과 권력은 찾아보기 힘들다. 소설은 두 가지 이야기가 함께 흘러가는데, 사건들과 더불어 목에 샐러맨더 문신을 새긴 화인을 직장에 맞이하게 된 시미의 이야기이다. 줄거리만 소개하자면 소설의 재미를 느끼기 어려워질 것 같아 자세한 내용은 쓰지 않겠다.


*


실은 피부에 새겨진 건 자신의 심장에도 새겨지는 겁니다. 상흔처럼요.
몸에 입은 고통은 언제까지고 그 몸과 영혼을 떠나지 않고 맴돌아요. 아무리 잊은 것처럼 보이더라도 말이지요.


피부에 무언가를 새기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옛날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쁜 기운을 물리치기 위해 피부 위에 맹수를 새기기도 하고, 병을 낫게 하기 위해 피부에 무언가를 새기기도 했다. 오늘날 문신, 타투는 그런 기대를 하고 새기지는 않지만, 어쨌든 피부를 바늘로 찌르는 아픔을 감수하고 이뤄내는 간절함이 담겨있다.


세상은 엉망이다. 많은 약자들은 끝없는 폭력에 노출되며 마지막 순간에는 목숨까지 빼앗길 위험에 놓인다. 만나주지 않는다며 안 만나주면 자신이 죽겠다던가 나를 죽이겠다는 사람,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자식을 학대하고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 회사에서의 직위를 기반으로 사람들을 노예처럼 폭행하는, 소위 엄청난 갑질을 하는 사람. 이러한 위협들에게서 나를 지켜주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법과 사회는 이러한 약자들을 충분히 보호하고 있지 못하다. 마치 그 옛날 피할 수 없는 고통에 노출되어 결국은 미신에 기댈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처럼. 우리는 그러한 순간 간절함을 느낀다. 무언가가 나를 보호해주기를, 나를 고통과 폭력으로부터 구해주기를.


소설 속에서, 그 간절함은 마치 부적처럼- 하지만 단순히 종이에 새기는 편리함이 아니라 피부에 피 흘리며 새기는 간절함으로- 결국 샐러맨더의 모습으로, 표범의 모습으로 마지막 순간에 나에게 그 모습을 드러낸다.


“어떤 존재가 당신을 지켜주었나요. 당신은 살아오면서 어떤 호의와······
얼마만 한 경멸과 때로는 악의를 만나왔기에, 자신을 지키는 부적을 온몸에 그릴 수밖에 없었을까요.”
스스로가 빛나지 않는다면, 시미는 다만 몇 발자국 앞이나마 비추어줄 한 점의 빛을 보고 싶었다. 바라는 건 그뿐이었다.


하지만 나의 삶을 구하기 위해 꼭 누군가를 없애야 하는 것이 아니어도, 내가 꼭 9시 뉴스에 나올만큼 절박한 비극을 갖고 있지 않더라도 그 간절함은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 시미는 그런 사람이다. 평범한 고통을 몸에 새기고 살아가는 사람들, 사실은 그 고통이 심장에 깊게 새겨진 사람들. 자신이 낳은 아이를 빼앗기고, 직장에서는 여성이라며 편의에 따라 때로는 ‘젊고 개념 없는 여성’ 취급을 받고 때로는 ‘나이 든 아줌마’라며 무시를 당하는, 범죄 사건에 연루되거나 텔레비전에 나올만한 사연은 아니지만, 묵묵한 아픔과 고통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삶에 대한 간절한 마음은 빛나는 별로서 나타난다. 마치 ‘시들은’ 상태에 비유되던 시미의 삶이 다시 ‘충동이라는 에너지’를 통해 별빛으로 희미하게 빛나게 되듯. 소설이라는 공간에서 이 작은 희망은 그렇게 모습을 드러낸다. 그 빛은 우리가 어렸을 적 읽던 동화처럼 우리의 삶을 획기적으로 반전시켜주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몇 발자국 앞이나마’ 잔잔하게 비추어주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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