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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익명 Jul 18. 2020

어릴 적의 놀이들은 어디로 갔을까

당시 그 놀이들이 재미있었던 이유

어린 시절 친구들과 놀 때, 옆에서 어머니들이 모여 차를 마시며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서 (예전에는 집에서 만나고 모이는 경우가 상대적으로 많았던 것 같다.) '엄마들은 인형 놀이도 안 하고, 어른들은 뭘 하고 노는걸까?'라는 강렬한 의문이 들었다. 더 이상 인형놀이나 소꿉놀이를 하지 않게 된 성인이 되어서도 과연 어린시절의 놀이와 어른들이 노는 양상은 왜 , 어떻게 다른지에 대한 의문은 계속되었다. 


해당 주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아마도 요한 하위징아의 <호모 루덴스>를 떠올렸을 것이다. 스스로가 어른이 된 후에도 잘 풀리지 않은, '어른을 위한 놀이터는 왜 없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해당 책을 사서 읽었었다. 그런데 놀이의 본질 중 무목적성 외에는 크게 기억에 남는 것이 없었다. 무목적성 얘기가 그 책에 나왔는지도 기억이 뚜렷하지 않다. 언어적 기원을 통해 말 그대로 뭔가 폭넓은 의미의 '놀이play와 게임game'의 경쟁적 본질을 탐험하는 내용이어서, 내가 생각하는 직관적인 놀이와는 다루는 개념의 방향이 달랐던 것 같다. 발달 심리학에서 말하는 학습으로서의 놀이는 기능이지 놀이 자체의 재미와는 상관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러다 어느 평소보다도 더 우울한 하루, 불현듯 그네가 타고 싶어졌다. 그리고 어렴풋하게 내가 생각해왔던 어린 시절의 놀이의 본질 중 몇 가지가 머릿속에 정리되어 떠오르기 시작했다.


1) 경험의 확장 : 서사


기본적으로 놀이의 특징 중 하나는 경험의 확장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대부분 지루한 인생을 산다. 블록버스터 영화와 같은 드라마틱한 삶을 사는 건 극소수이고, 지나치게 드라마틱한 삶은 불행할 뿐이다. 하지만 우리의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우리는 보통 이보다도 좀 더 단조로운 일상을 살아간다. 대부분(아마도..) 직접 치정 관계에 엮일 일도 없고, 내가 세상을 구할 일은 더더욱 없다. 다 똑같이 생긴 아파트나 빌라에 살면서, 비슷비슷한 배경의 친구들을 만나 매일매일 크게 다를 것이 없는 하루하루를 산다. 이 때 놀이는 '말도 안 되는 서사'의 창구가 될 수 있다. 그 말도 안되는 범지구적 스케일 서사의 주인공이 나와 친구들이 될 수 있고, 줄거리도 내 마음대로 바꿔나갈 수 있다. 인형 놀이나 소꿉 놀이, 컴퓨터 게임 모두 그런 속성을 가지고 있다. 게임의 경우 좀 더 경쟁과 성취의 성향, '나' 중심적 세계관 운영과 같은 경험의 성향이 강하다. 소꿉놀이나 역할 놀이의 경우 역할 변화와 서사의 성향이 크다. 어렸을 적 소꿉놀이나 인형 놀이를 생각해보면, 다양한 역할을 설정한 뒤 악역은 혹독하게 참패시키고 정의(라기 보다는 나와 친구의 대변인)가 승리하는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주를 이뤘다. 사실 뭐 주인공이 로보트라고 해도 뭐가 다른가. 술래 잡기와 같은 놀이도 경찰을 만들고, 도둑을 만들고 소위 힐러 역할도 있고. 다양한 역할과 서사가 자리잡을 여지가 있었다. 이 때 성인기 놀이 소비와의 차이점은 폭넓은 주체적 상상의 여지라고 생각한다.


사춘기를 지나 어른이 되어가면서 우리의 삶은 다양한 직접 경험으로 가득차게 된다. 내가 치정 관계에 얽히고, 다양한 악역과 조력자를 만나고 원치않는 드라마틱의 세상을 살아가게 된다. 점점 내 삶에서 이미 직접 경험한 서사를 복기하는 것이 (친구들과 직장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한다거나, SNS를 사용한다거나) 내가 느끼는 재미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게 되고(이 때는 놀이라고 부르기도 애매한 것 같다), 내가 만든 가상 기승전결의 역할 놀이에서 느끼는 매력이 점점 더 줄어든다.  


그렇다고 해도 이러한 놀이의 흔적(애초에 모두 유아기의 전유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은 성인이 된 뒤에도 우리의 삶 속에 남아있다. 가상 세계를 배경으로 한 온라인 게임, 나에게는 불가능한 SF서사의 영화. 캐릭터가 분명하고 흥미로운 줄거리를 가진 소설과 드라마 등. 이 때 우리의 역할은 어느 정도 시각적으로, 서사적으로 완결되어 있는 창작물에 대한 소비자로서 규정지어진다. (운영자가 아니라) 하지만 어쨌든 우리는 간접 경험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는다.



2) 신체 활동


어린 시절 놀이의 중요한 또 다른 특징 중 하나는 신체 활동이 아닐까 싶다. 이는 위에 언급되었던 술래잡기와 그 변형(고래잡기나 미키마우스나 땅 따먹기나..), 놀이터에서 벌어지는 각종 놀이(그네, 피구,축구 등)에서 강하게 드러나는 특징이라고 생각한다. 어렸을 때는 <스케치북>이라는 게임을 정말 많이 했는데, (항상 밥 먹고 뛰어가서 하다가 종 치면 겨우 들어오곤 했다.) 능목이라는 사실상 사다리에 가까운 기구를 활용해서, 만약 술래가 무엇을 n개 그리라고 하면 술래는 능목 주변을 n-1바퀴 돌고, 그 사이에 우리는 바닥에 나뭇가지로 n개의 무엇을 그리고 능목 위로 올라가는 놀이였다. 늦게 올라가면 잡히고, 만약 올라갔더라도 제대로 못 올라가면 잡혔다. 당시 인기 '무엇'은 <자전거 타는 사람>이었는데 그 당시에 떠올릴 수 있는 가장 그리기 복잡한 대상이었던 것 같다. 우울증에 유일하게 거의 확실하게 효과를 줄 수 있는 활동은 땀을 흘리는 신체 활동이라고 한다. 우리는 물론 물리적으로 건강하기 위해서도 신체 활동을 필요로 하지만, 그 자체에서 오는 스트레스 해소 효과를 무시할 수 없다. (엔도르핀이 나오고 .. 이런 설명은 넣어두더라도.) 이러한 신체 활동은 나이 들어갈수록 같이 술래잡기할 친구들은 없어져가는 가운데, 주로 혼자 하는 신체 활동(헬스)이나 성인에게 허용된 신체적 활동(동호회 - 자전거, 춤, 요가, 달리기 등)의 범위로 좁혀진다. 또한 즐거움 뿐 아니라 건강 관리에 방점이 찍히게 된다. 그럼에도 오랜만에 탄 그네는 정말 재미있었다. 동네 놀이터 바로 옆에 음식물 처리기가 자리잡고 텅 빈 놀이터를 보면서 코로나 시국이긴 하지만 오늘날을 사는 어린이들에게 신체 활동을 수반한 놀이가 설 자리를 잃어가는 것 같아 조금은 아쉬웠다. 



3) 사회적 교류


사회적 교류는 사실상 이전에 언급된 다른 요인들과 함께 어우러져서 나타난다. 우리는 보통 앉아서 컴퓨터 게임을 하는 어린이를 보며 '사회적 활동을 전혀 하지 않는다'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온라인 게임이 보편화된 요즈음, 온라인 게임은 사실상 사회적 교류를 수반한다. 오히려 온라인상의 사회적 교류가 새로운 세대에게는 더 편안하고 익숙한 방식의 교류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그걸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지와는 별개로 인간은 다른 사람과 함께 하는 것을 더 즐거워하는 경향이 있다. 그 저변에 있는 기대는 다른 세계인 상대방의 예측 불가능성과의 상호작용 때문일수도, 관계의 발전에 대한 기대일 수도 있다. 물론 어떤 교류의 관계도 성애의 관계로 환원시키려는 몇몇 관계 지향적 시도는 매우 불쾌하고 척결되어야 할 대상이지만, 어쨌든 사회적 교류 자체가 어떤 활동을 인간에게 더 재미있게 만들어주는 것은 분명해보인다. 물론 일적인 관계로 만나 다른 사람과 상호작용하는 것은 오히려 권력 관계로 인해 재미가 없다. (내 의지로 바꿀 수 있는 여지가 적고 상대방의 악행에 대한 견제가 불가능) 일반적으로 재미있는 상호작용의 관계는 권력 불균형이 개입되지 않은 평등한 관계이다. 




+ 그 외 

바둑이나 핵사(애니팡?)같은 게임은 어떤 성질을 갖고 있었나 고민을 해봤는데, 규범을 지키면서 그 규범 안에서 성취하고 이에 대한 보상(레벨업, 점수, 순위, 시각적 자극 등)을 받는 기제를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린 시절의 놀이 특징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것 같아서 따로 적었다. 요즘 많은 온라인 게임들은 그러한 게임의 성질에 사회적 교류 (비교, 경쟁 등)의 성질을 덧씌우려는 시도를 많이 하고 있다. 내가 하는 온라인 게임도 사실 혼자서 열심히 가상의 캐릭터를 잡아들이는 게임이었는데, 친구 기능을 넣어 다른 사람들과 교류하도록 만들어 중독성을 높이려는 것 같았다. (실제로 이것 때문에 관두기가 더 어려웠다) 애니팡과 같은 게임도 기존에 있던 단순한 핵사 게임의 룰에 화려한 시각적 자극(빠르고 직관적인 보상-도파민을 뿜어내는 심리학적 의미의 보상), 그리고 사회적 교류의 기능(친구에게 하트를 받는다거나)을 넣어 중독성을 강화시켰다고 생각한다. 다른 게임들도 기본적으로 이런 성질을 공통적으로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오늘날의 온라인 게임과 스마트폰 중독에 대해서는 직관적 활용과 즉각적 보상(변화)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는데, 이 글에서는 어린 시절의 놀이의 상대적 특징을 중심으로 다루기 위해 뺐다. 




어른들이 어린이처럼 놀 수 있는 놀이터는 없을까. 러버덕(좀 옛날인가?)에 열광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사실 우리는 어린 시절의 놀이를 충분히 누리지 못했고, 지금도 우리의 삶에는 그런 '놀이'가 필요한 게 아닐까 생각했다. 어른이 되어서 함께 술래잡기를 할 친구들은 이제 없지만, 점점 내 의지를 직접 경험과 맞닿도록 하여 삶으로 끌어들이면서, 어린 시절 놀이에 몰두했듯 재미에 몰두하는 삶을 계속해서 살고 싶다. 하지만 때때로는 단순하게 놀이터에서 옛날처럼 그네를 타는 것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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