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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익명 Aug 07. 2020

비상식과의 오랜 싸움이 우리에게 남긴 것

우리, 아니면 없애야 할 적.

촛불 혁명을 이뤄낸 우리는 모두 같은 꿈을 꿨을까. 지금의 사회는 그에 대해 '아니었다'라고 응답하고 있다.사실상 모든 진보적 움직임은 한 거대 여당의 집권으로 귀결되었고, 이에 함께 했던 수많은 주체들(여성, 20대-30대)은 사실상 그러한 집권층이 보이는 여러 비상식적 행보에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재미있는 건, 이러한 실망이나 비판이 절대 수용하지 못할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분위기이다. 이는 오랫동안 한국사회에 있어온 '적과의 싸움'이 남긴 반갑지 않은 선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이전부터 거대 정당들의 싸움이 보수와 진보의 싸움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 그저 비상식과 그나마 좀 더 상식적인 집단의 싸움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거대한 비상식의 세력을 무대 밖으로 몰아내고 나면, 그 때부터는 정말로 상식적인 정당들 간의 생산적인 비판과 견제를 바탕으로 한 건전한 정치가 펼쳐질 것이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권력이라는 것은 그렇지 못했다. 누가 주체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누가 어느 정도의 권력을 쥐고 있느냐의 문제였을까. 권력을 쥐고, 잃을 것이 많아진 집단은 필연적으로 기존의 질서를 옹호하는 데 주력하게 되는 것일까. 뿐만 아니라 가장 큰 문제는 상식적인 정치 파트너를 만들지 않는 양태였다. 여전히 언론에서는 무대에서 쫓아내야 할 비상식적 집단과의 양자 대결 구도를 부추기고, 사실상 정치 주체들도 이를 오히려 장려하고 있는 듯 하다. 물론 소수 정당을 지지하는 사람들도 소위 '뭐만 하면 다 까는' 트집 잡기야 당연히 지양해야 할 것이다. '고쳐야 할 것'과 '없애야 할 적'을 모두 같은 시각으로 대하는 것은 오히려 결과적으로 부정의에 협력하게 된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그런 목소리를 내기만 해도 짓밟히는 분위기여서, 딱히 별 힘이 있는 것 같지도 않다. (하지만 그럼에도 저런 태도는 지양해야 한다. 이는 '주체가 누구냐'의 문제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누구라도 그러한 지위가 생겼을 때 지양해야 하는 태도인만큼.) 이럴 때일수록, 한 주체가 가진 권력의 크기가 커질수록 더 좋은 발전을 위해 필요한 것은 건전한 비판이며, 다양한 주체의 시선이다. 


나는 많은 주체들이 양립가능했으면 좋겠다. 물론 내가 항상 밝혀왔듯 최소한의 약자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비상식적 세력들은 별로 같이 양립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을 없애고 나면 우리는 나와 다른 주체는 다 없애버려야 하는, 사실상 퇴치하려고 하는 태도를 접어둬야 한다. 어떤 경우에도 한 주체에 의한 온전한 독점을 장려해서는 좋은 결과를 보기가 어렵다. 하지만 워낙에 '적 제거와 패기'에 익숙해온 우리들은, 상대방이 온전히 적이 아닐지라도 뭉개버리고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데에 더 익숙하다. 나 아니면 너, 우리 아니면 적이라는 분류 방식은 매우 편리하기 때문이다. 또한 정치적 시각이나 사회를 보는 시선을 적립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태도를 아주 깊게, 오랫동안 스스로 체화시켜왔기 때문이다. (이는 정치 세력 간의 싸움 외에도 다른 계급 싸움에도 적용이 된다.)


집단적인 비상식은 그것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권력이 있어야만 존립 가능하다. 그만한 권력이 없다면 비상식적일지라도 그 비상식은 비난 속에서 위력을 발휘할 수 없어 사라지게 되기 때문이다. 다른 한 편으로, 그런 비상식을 만드는 요소 중 한가지도 무소불위의 권력이다. 비판을 불가능하게하는 독점은 결국 비상식 조차 유지 가능하게 만드는 큰 동력이다. 나는 촛불 혁명을 함께 만들어간 우리가 그런 실수를 다시는 반복하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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