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익명 Aug 23. 2020

우리는 속아서 결정한다

당신의 정치적 입장을 결정할 때

나는 사람의 정치적 입장이 결정되는 과정에 세 가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이익에 따르는 입장

-무엇이 옳은가(무엇이 약자를, 혹은 대다수를 위한 것일 것인가)를 따져서 결정한 입장

-속거나 답습하여 결정한 입장 (프레이밍된 감정적 인상을 통해서 혹은 정보를 통해서)

이 세가지가 서로 상호작용하면서 개개인의 정치적 입장이 결정된다고 생각한다.


일반적으로 민주주의에 대해서 사람들은 대부분의 사람이 자신의 계급이익(성별,사회적 계층, 경제적 계층)을 대변하는 선택을 내릴 것이라고 가정하며 때문에 대다수의 이익을 대변하는 민주적 정부가 결성될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내 생각에는 그 외에 여러 변인이 영향을 미친다. 주변을 둘러보면, 속거나 답습하는 변인이 가장 크고, 그 다음이 자신의 이익, 그 다음이 무엇이 옳은가의 순서로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 그리고 대부분은 이 셋을 구분하지 못하며 100% 자신이 결정을 내렸다고 믿는다. 자신의 이익에 따르면서 그것이 옳기 때문에 지지한다고 믿기도 하고, 속으면서 그것이 자신의 이익을 대변한다고 믿기도 한다. 


계급배반투표 : 나의 계급에 반하는 투표

개인이 투표를 통해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대변한다는 가정에 대한 반례로서 가장 많이 주목을 받았던 현상은 계급배반투표였을 것이다. 이에 대해 심리학자 김태형은 <불안증폭사회>에서 준거집단이라는 개념으로 이 현상을 설명했다. 준거집단(reference group)이란 자신이 속하지 않았더라도 '닮고 싶은' 집단으로 이해하면 된다. 나는 수중에 천 만원도 없지만, 내가 기준으로 삼는 삶의 모습은 '수도권에 30평대 아파트를 한 채 가지고 사는 여유로운 시민들'이라면 이를 준거 집단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김태형은 많은 한국인들이 갖고 있는 '중산층'의 환상을 언급한다. 수도권에 아파트를 가지고 대기업에 다니며, 자녀를 양육하는 4인 가정. 사람들이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든 상관 없이 자신의 준거집단을 이러한 중산층으로 두고 정치적 선택 또한 이에 맞춰 하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사회적 경제적 지위를 평가할 때 대부분 평균 이상으로 평가했다는 유명한 조사 결과도 있다. 


우리는 대부분 속는다

이에 더하여 많은 사람들은 '속는다'. 자본가는 극소수이다. 그리고 이 격차는 점점 더 커졌다. IMF 이후, 더 적은 수의 자본가가 더 많은 부를 차지하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굉장히 오랜 시간, 지금도, 많이 극소수의 자본가를 위해 투표한다. 민주주의에서 기대하는 희망에 따르면, 많은 사람이 가난해졌으니 자신을 위해 이를 뒤집을 투표를 해야 한다. 분배에 중점을 두는 정책, 자본 증식을 억제하는 정책을 지지해야 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재밌는 건, 한국에서의 포퓰리즘은 보수적(난 보수적이라는 표현을 쓰기 싫다. 이건 보수가 아니라 소수의 탐욕을 위한 정책이라고 봐야 맞다)인 정책이다. 사람들은 소수의 탐욕을 응원하는 정책에 열광한다. 그것이 더 이성적이며, 더 자신을 위한 판단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친-노동적 정책은 배척당하며 오히려 최저임금을 받는 노동자들이 발벗고 나서 욕을 한다. (이는 이들끼리의 싸움이 되도록 만들어놓은 거대 자본의 승리이기도 하다) 부동산 종부세를 올리면 이를 욕하는 건 임대사업자들뿐이 아니다. '내 집 마련'에 방해가 될 것이라며 사실상 크게 신경쓰지 않아도 될 수많은 '중산층'들도 자신에게 큰 일이 생긴양 호들갑을 떤다. 그리고 이 뒤에는 항상 언론이 있다. 그리고 그 언론 뒤에는 이러한 정책으로 실질적으로 이익을 얻는 자본가들이 있다. '분배대신 성장 위주'에서 말하는 성장은 당신을 쥐어짜고 있는 극소수 자본가의 성장이다. '자유로운 경쟁'은 사실상 출발선이 다른 싸움에서 약자들을 짓밟겠다는 의미다. 결코 그들은 사실대로 말하지 않으며, 이는 수십번 증명되었다. IMF 이후 한국의 사회적 경제적 사회구조가 어떻게 변화했는가? 이제 근로기준법으로조차 보호받을 수 없는 노동은 얼마나 증가하였으며 그 동안 이들을 이용하는 기업은 하청 등을 통해 얼마나 막대한 이익을 챙겼는가? 그들이 그러는동안 끄트머리에 던져진 사람들은 얼마나 많이 죽어갔는가? 


광복, 나는 무엇을 했을까

인간이 스스로 믿는 이성이라는 것은 얼마나 나약한가? 이는 굉장히 쉽게 손에 넣고 휘두를 수 있는 것이며, 돈이 많다면 수천의, 수만명의 마음을 조정하는 건 참 쉬운 일이다. 우리는 광복절을 맞아 광복의 역사에서 독립투사들이 얼마나 잔인하게 고문당했는지에만 집중해서 보도하지(난 진짜 이런 게 너무 싫다. 무슨 중세시대 종교화에서 향유하던 사도마조히즘같다.) 그 때 평범한 사람들이 어떻게 이용당했는가는 배우지 않는다. 어차피 우리 대부분은 위대한 독립투사가 될 수 없을 것이다(없다는 게 아니다, 역사에서 기록하지 않은 항일 운동을 배제하자는 것도 아니며, 평범하게 정말 당시에 선택지 없이 삶을 영위해갈 수 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그 때 평범한 사람들은 그럼 어떻게 생각했을까?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오히려 여기에 있지 않은가. 무장 독립운동을 보며 '저렇게 까지 과격할 필요 있나?'라고 생각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며, 친일파가 베풀어주는 온정을 받으며 '그래, 저 사람이 나쁜 사람은 아니지'라고 생각했을 것이며, 일제가 선전하는 선전물을 보며 '그래 일본이 지배하는 게 꼭 나쁜 일만은 아닐 수 있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살기 위해 일제가 운영하는 기업에서 일을 하기도 했을 것이며(이들을 비난하려는 건 아니다), 거국적 항일 운동(삼일운동 같은)에 참여하는 친구를 보며 '그래도 안전을 위해 넌 참여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라고 이야기했을 수 있다. 일제는 지식인을 매수했다. 교사, 학자, 존경받는 예술가들을 영입하고 이들에게 친일의 메시지를 전파하도록 했다. 우리가 배워야 할 역사는 이런 것이다. 일제 시대에는 적어도 누가 날 위협하는가 주체는 명확한 편이었다. 위선조차 포기한 일제의 포악함에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를 지지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래도 정확한 상황을 알기 힘들었을 것이다. (물론 속는 것만으로는 죄가 아니며, 당시에는 선택조차 불가능한 상황이었고 적과 나의 구분이 훨씬 명백했다.) 이미 다 지나고 독립운동가는 훌륭했고 친일파들은 나빴다는 평가가 내려진 역사책을 보고 공부하고 나서야 우리는 그런 생각을 할 수 있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스스로에 대해 그런 의심이 들지 않는가? 아직도 조금만 가까운 지점으로 넘어가면 평가가 갈리는 것이 역사가 아닌가.


어떤 것이든 시작은

사실 현재의 정치란 주관식이 아닌 객관식에 가깝다. 내 정치적 입장은 누굴 지지하는가로 결정된다. 그리고 그 정치인에 대한 신격화가 일어나기도 하고, 아니면 단순히 어떤 정치인이 감정적으로 싫다는 이유로 반대편 답안지를 고르기도 한다. 그래서 사실상 인기 투표에 가까워지고 있는 것이 현재의 대의 민주주의의 모습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나는 선택은 객관식으로 하더라도 당신만의 주관식 입장을 꼭 가졌으면 좋겠다. 결국에 아무리 노력해도 감정에 따라갈 가능성이 많지만, 세뇌된 흐름을 따라갈 가능성이 높지만, 그래도 스스로를 꼭 의심해봤으면 좋겠다. 어느 누구와도 완전히 똑같지 않은, 여러가지가 혼합된 어떤 나의 의견을 형성해보고, 그 근거를 스스로 찾고 판단해보라. 요즈음은 인터넷의 발달로 당신이 이미 결정한 입장에 대해 지지하는 의견들만을 모아서 볼 수 있다. 가짜 뉴스도 사람들의 수요를 채우고도 남을만큼 쏟아져나온다. 그래서 어려울 것이며 세상에 100% 옳은 의견도, 100% 주관적 감정을 제외한 의견도 없다(게다가 감정의 부재는 오히려 비도덕적인 판단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하지만 최대한 세뇌의 마수를 걷어내고 당신을 대변할 수 있는 답변, 조금은 약자의 입장도 생각해본 답변을 고려해봤으면 좋겠다. 적어도, 지금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역사 속에서 나는 위대한 독립운동가는 아닐 가능성이 높고 '쉽게 속는 평범한 인간'이라는 것이다. 그걸 인지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