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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익명 Jan 28. 2021

케빈에 대하여

가장 큰 피해자는 누구인가

* 해당 리뷰는 결말 등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으며, 제 주관적인 해석으로, 원작자의 의도와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케빈에 대하여 we need to talk about Kevin>라는 제목은 제목만으로도 의미심장하다. 하지만 사실 영화는 케빈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보다는 에바(케빈의 어머니)의 입장에서 그려진다. 사실 이 영화의 초점은 에바에 맞춰져 있고, 영화가 끝난 뒤에도 관객들은 '케빈이 왜 그랬을까'에 대한 답을 명확하게 알지 못한다. 그리고..


영화의 리뷰

영화의 리뷰 창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로 가득했다. "에바가 사이코패스여서 아들 케빈이 닮은 것 아니었을까? 소름 돋는다." "사실 에바가 사이코패스다." "아빠는 완전한 사랑을 줬는데 왜 케빈이 삐뚤어졌지? 엄마가 너무 잔인하고 차갑다." 

때때로 영화나 미디어는 그 자체로서 작품이 되기도 하지만, 그에 대한 반응까지 그 기획의 범위가 확장된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있다. 이때까지 봤던 작품들 중 (추정) 이런 의도를 가졌다고 생각했던 작품 중 기억에 남는 것은 매미와 희세 작가의 웹툰 <마스크 걸>이었다. 영화의 리뷰 댓글을 본 뒤에 <케빈에 대하여> 또한 혹시 감독이 그런 의도를 가졌었고, 사람들이 그 예상했던 반응을 보였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모성애 신화

여성은 마치 태어나자마자 완벽한 어머니, 가정주부로서 내재된 속성을 가진 것처럼 해석된다. 여자 아이이기 때문에 돌봄이 필요한 아기 인형과 소꿉놀이를 쥐여주고, 자라서는 조직 내에서 '돌봄'의 역할을 할 것을 기대받으며, 성인이 되어서는 아이를 낳고 완전한 어머니가 될 것을 요구받는다. 출산과정은 미화되며(아버지가 성욕이 떨어질까 봐 출산 장면을 봐서는 안 된다는 소리는 하면서), 아이를 키우는 과정에 대해서는 "그래도 보람차요"라는 한 마디 외에는 공개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뒤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우리는 알지 못한다. 최근 (자꾸 웹툰이 나오는데) 당사자로서 솔직한 임신, 출산 과정을 다룬 쇼쇼 작가의 <아기 낳는 만화>는 검색만 하면 "나무 위키"의 '아기 낳는 만화-논란과 비판' 창이 먼저 뜬다. 이처럼 모성이라는 아름다운 이름 하에 가려진 장막을 들춰내려는 자에게 사회는 '남성 혐오주의자'라는 낙인을 찍어준다. 그처럼 그들이 숨기고 싶어 하는 '자동으로 엄마가 되는' 과정. 당사자도 아니면서 그들이 그 내막을 그렇게까지 가리기 위해 애쓰는 것을 보면, 진실은 어느 쪽 일지 추정이 가능하다. 완벽한 어머니는 없으며, 어머니 또한 인간이고, 출산과 육아는 여성에게 전혀 자연스럽고 행복하기만 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에바의 이야기

사람들은 에바의 이야기에서 계속해서 '그 여자 아들내미가 사이코패스가 된 이유'를 찾아내려 한다. 에바가 여행가였다는 점은, '그 자유를 더 못 누리게 되어서 아들한테 복수하고 막 대한 것 아냐?'라는 의심의 증거가 된다. 그 근거로 미취학 아동과 싸우다가 지쳐 '너 때문에 내 삶이 힘들어졌다'라고 외치는 장면을 보고 확신한다. '아 에바가 자신의 자유가 속박된 데 대해 아들에게 복수한 거고, 그래서 아들이 비뚤어졌구나.' 자신의 삶이었던 지도를 가두어 방을 만들고, 늘 케빈과 화해하려 했던 에바의 노력은 당연한 것이 된다. 끊임없이 반항하고 자신을 거부하는 아들에게 다가가려 노력한 에바의 노력은 마치 내용 없는 배경처럼 인식된다. 일부러 에바를 속이고, 에바를 골탕 먹이는 케빈은 그 자체가 고의적이지만 관객의 눈에 이는 원인이 아닌 결과로써만 인식된다. 에바는 케빈이 뭔가 다른 아이와 다르다고 생각했고, 병원에 데려가고, 남편에게도 이야기했지만, 사실 이를 묵살한 것은 남성인 그들이었다. 케빈의 비정상적인 행동은 가장 가까운 양육자였던 에바에게만 보였으니까. 아무도 케빈에게 활을 사주거나 케빈의 이상을 눈치채지 못한 아버지는 탓하지 않는다. 또한 에바의 인성(?)과 양육방식 자체가 문제였다면 둘째 아이는 왜 정서적인 문제를 전혀 보이지 않았을까. 에바와 똑 닮은 머리색을 가진 케빈은, 우리 눈에는 '온전한 에바의 잘못'으로만 보일 뿐이다. 


하지만 가장 큰 피해자는 누구였을까

영화는 계속해서 붉은색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여러 의미와 미적 함의가 있겠지만, 내 기억에 강렬하게 남는 이미지는 에바가 붉은색을 계속해서 지우는 장면이다. 케빈은 피를 흘리게 하고, 에바는 닦는다. 계속해서 닦는다. 에바의 세상(지도로 도배한 방)이 케빈에 의해 망가지고, 케빈의 테러로 사망한 유족들의 붉은 페인트가 에바의 삶을 뒤덮으면, 에바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이를 닦고, 지우고, 복원하는 일이다. 케빈의 잔인함이 낳은 가장 큰 피해자는 누구인가. 사실 에바이다. 사실 관객들은 에바에게서 '케빈이 사이코패스가 된 이유'를 찾는 데 혈안이 되어서 에바가 입은 피해에는 관심이 없다. 에바는 남편을 잃었고, 자식을 잃었으나 케빈의 어머니라는 이유로 슬퍼할 자격도 박탈된다. 슬퍼할 틈도 주지 않고 세상은 그녀를 손가락질하고, 공격하고, 욕한다. 세상은 우리에게 좋은 어머니가 되는 법도, 그럴 수 있는 시간과 자원도 준 적이 없지만 그 결과에 대해서는 무겁게 책임을 지운다. 


이 세상에서 케빈이 흘리게 한 피를 닦아내야 하는 것은 에바이다.


케빈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은 <케빈에 대하여 이야기해야 한다>는 원 제목을, 에바가 케빈과 대화하려고 하지 않았고, 그래서 케빈이 사이코패스가 되었으며, 이제 에바가 케빈과 대화하려는 시도를 해야 한다, 는 의미로 해석한다. 하지만 나는 사실 이 제목이 우리는 케빈의 잘못에 대해, 에바에게서 그 원인을 온전히 찾을 것이 아니라, <케빈에 대하여> 이야기해보아야 한다는 제안으로 보인다. 원 의도와는 다를 수 있지만(일부러 리뷰를 쓰기 전에 찾아보지 않았다), 어쨌든 이제는 케빈에 대해 이야기해봐야 할 때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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