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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익명 Feb 03. 2021

아픔의 뒷면

내가 온전히 싫어하는 것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사실 정신적 병리현상이란, 인간에게 없던 특성이 새롭게 등장한 것이 아니라 기존 인간이 필수적으로 가지고 있던 특성이 과다하게, 혹은 과소하게 발현된 것에 가깝다. 그것이 사회적 적응과 개인의 정신건강에 악영향을 미칠 때, 일련의 평가과정을 거쳐 이를 정신병리학적 현상으로 다룬다. 행동주의적 이론에 따르면, 인지 및 행동은 그에 대한 보상에 의해 강화된다. 예를 들면 어떤 행동으로 내가 이익을 본다면, 그 행동이 다음에 발생한 빈도가 높아지는 것이다. 우리가 스스로에게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의 반대편은 사실 내가 중독되어 있는, 내가 좋아하는 모습일 수 있다. 


나는 이전에 여성 ADHD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그리고 많은 여성들은 사회가 들이대는 잣대에 맞춰 강박적으로 자신을 검열함으로서 그러한 ADHD의 증상을 무마시키려 애쓴다는 것도. 현재 조직을 운영하며 의견을 표명하고, 검토하고, 글을 쓰고, 신분에 내 삶이 종속되는(물론 아무도 모를.. 굉장히 작은 규모이다. 유명인 절대 아님)일을 하면서 나는 기존에 갖고 있던 강박적 성향이 극심해지고 있음을 느끼게 되었다. (내가 실수하거나 잘못하면 단체를 욕 먹이는 거야..!) 여기서 말하는 강박적 성향은 단편적인 행동의 반복을 통해 불안을 경감시키는 행동 뿐 아니라 완벽주의와도 관련이 있다. 모두가 논리적으로 완벽하며 모순이 없는 주장을 펼쳐야하고, 도덕적 결함이 없어야한다는 인지적 강박. 보통은 '소심하다'는 말로 표현되기도 하는데, 소심한 사람인데 문제제기를 할 때에는 그 주장에 대해 수십번씩 검토하고 수십번씩 스스로 썼다 지워보게 되는 것이다. 스스로를 검열하다보니 부정적인 평가를 남기게 될까봐 사람과 만나는 일을 피하게 된다. 그리고 가만히 있으면 몰려드는 불안과 부정적 감정을 외면하고 싶어 끊임없이 새로운 정보를 찾는 (스마트폰을 통해 혹은 다른 정보자극을 통해) 데 골몰하여 진정한 휴식의 의미를 잊어간다. 다음날 낮에 중요한 일정이 있으면 알람을 맞출 필요가 없다. 새벽부터 십분 간격으로 깨면서, 혹시라도 늦게 일어날까봐 걱정하고 끊임없이 해당 일정을 꿈으로 시뮬레이션하니까. 어느 때부터 꿈에서조차 논리적으로 앞뒤가 맞는 소리를 하고 주장을 펼치는 '맨정신'이 되어갔다. 가장 큰 문제는 내가 이를 즐겼다는 것이다. 꿈에서조차 더 맞는 것 같은 소리를 하게 되는 것을, 스스로를 혹독하게 검열해서 더 나아보이는 주장을 하게 되는 것을,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 이를 요구하고 비판하는 것을. 결국 눈으로 보이는 성과가 나아지는 것처럼 보이고, 내 자신이 그만큼 '완전'하다고 생각하는 상에 가까워지는 모습을 분명 나의 일부는 바람직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모든 내가 싫어한다고 생각하지만 쉽게 떨치지 못하는 행동과 생각에는 반대편에, 이토록 내가 좋아하는 습성이 자리하고 있다. 이는 굉장한 위험이며, 나도 오랫동안 눈치채지 못했다. 그저 내가 완전함에 가까워지고 있다고 착각했을 뿐. 


내가 가지고 있는 강박이 어느 정도였냐면(지금도.. 이제부터 바꾸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두 마디 안에 상대방을 논리적으로 설득하는데, 혹은 그 안에 나에게 좋은 생각이 있다고 밝히는 데 성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워낙에 외양이나 하고 다니는 꼬라지(?)로 개무시를 당해왔던 과거와 결합하여 나는 점점 더 그런 완벽주의에 스스로 도취되어 왔던 것 같다. 하지만 결국 이렇게 스스로 채찍질하는 완벽주의는 단기적으로는 성과를 낼 수 있으나 장기적으로는 소모와 그로 인한 성과의 악화를 불러온다. 또한 다양한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힘을 잃고, 이해심을 잊게 된다. 그럼 넓은 시각을 잃게 되고, 그렇게 나이들면 소위 '꼰대'가 되는 것이다. 내가 가진 정보도 언젠가는 구시대적인 것이 된다. 새로운 시각을 포용하고 다양한 관점과 인간을 이해할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변치 않는 중요한 자산이다. 


나는 불완전하고 때때로 잘난척을 한다던가, 이기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하며 도덕적으로 완전하지 못하다. 누군가는 나를 싫어할 수 있고, 기본적으로 나는 모두와 같이, 부족한 사람이다. 나와 같은 고민을 겪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함께 외쳐보자. 대충 살자.. 관자놀이에 헤드폰을 끼고 듣는 아서처럼.



물론 마법처럼 한마디로 내 오랜 어려움이 끝나지 않겠지만, 완벽주의라는 것이 사실 진정한 완벽에 가까워지는 것이 아닌 삶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임을. 또한 내가 그러한 완벽주의로부터 고통 뿐 아니라 만족도 느끼고 있음을 스스로 인정함으로서(물론 이러한 만족이 개선에 대한 의지를 초과해서는 안 된다) 변화로의 첫 걸음을 내딛을 것이다. 


그 시작으로 오늘 내가 한탄한 내용에 대해 상대방이 어떻게 생각할까 고민하느라 계속해서 잠을 설치지 않도록 노력해보겠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이 왜 일을 완벽하게 하지 않는지 스트레스 받기를 그만두고 나 자신에게도 그 기대를 내려놓도록 노력하는 하루가 되도록 하겠다. 그리고 혹여나 내가 이 글에 비문을 썼더라도 그냥 졸리므로 잘 것이다. 여기서부터 시작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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