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불태운다면 넌 우리와 함께 불탈 것이다"
악몽을 꿨다. 다시 나는 학생이었고, 수업시간에 <거꾸로 가는 남자>와 같은 콘텐츠를 봤는데(굉장히 구체적) 내가 영화가 마음에 든다고 말했다가 이를 들은 한 남학생에게 위협을 당하는 꿈이었다. 하지만 이게 그냥 악몽이기만 할까. 일부는 실제로 내가 겪은 일이고 일부는 현재 교실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이 국가는, 정확히 말하면 언론, 정치, 경제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이 국가를 지배하고 있는 나이 든 남성들은 어린 남성들에게 가부장제의 권력을 승계해주고 싶어한다. 그래서 '이대남'같은 키워드를 만들어 '그들을 달래야 한다'며 여성과 페미니즘을 압박하기 위한 움직임을 계속해나가고 있다. 백래시, 안티페미니즘은 현장에서 젊은 남성들을 선동하며 여성들의 삶을 더욱 더 피곤하게 하고 있다. 늙은 남성들과 합작하여 여성의 물리적, 경제적 생존을 위협함과 동시에.
일단 생존이라는 관점에서 현재 여성들은 소수 시민 사회 활동 속에서나 페미니즘 활동을 할 수 있거나, 사회경제적으로 남성에게 '잘 보이지 않으면 안 되는' 시스템에서 도망칠 수밖에 없다. 전자는 극소수이므로, 후자에 대해 이야기해보자면 여성들 사이에서 소위 말하는 '야망'과 '자립'이라는 키워드로 연결되고 있고, 이 과정에서 오히려 성별로 차별받지 않을 수 있는 수익 방법(ex. 자본소득)에 열광하게 되는 것도 그 현상 중 하나이다(물론 자본소득이 궁극의 해결책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젊은 여성들의 행복도가 가장 낮고 여성들이 행복한 거주지 2위가 해외인 이 나라에서(about H 대한민국 행복 리포트 2019 참고), 그렇다면 한국 여성들은 어떤 생각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나? 내가 우리가 처한 현실을 직시하고 있는 젊은 한국 여성들과 만나며 국가도 사회도 어느 주체도 우리 편이 아님을 깨닫는 과정 속에 우리가 느끼는 한 가지 공통된 감정은 이것임을 알았다 : 복수심. 국가에 대한 복수심. 우리와 같은 피해자를 양산하는 이 사회, 잘못된 점을 바로잡을 생각이 없는 이 사회가 해체되길 바라는 마음.
저항의 수단을 뺏겼을 때 약자는 그 사회 질서를 향한 최후의 공격을 퍼붓는다. 어떤 기대도 하지 않으며 더 이상 사회가 나에게 지운 의무를 따르지 않는 것. 대한민국 N포 세대가 그랬는데, 나는 이보다 중국의 '탕핑' 세대가 좀 더 '제도적 저항의 수단이 말살'된 쪽에 가깝다고 여겨졌다(그리고 그 수단으로서 가시적 저항보다 의무를 저버리는 쪽에 좀 더 집중한다는 면에서). 노동에서 최후의 저항 수단은 파업이듯(우리 세대에게는 퇴사), 이제 우리는 사회에서 우리에게 기대한 역할을 저버림으로서 이 사회에 복수하려고 하는 것이다.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code=124&artid=202106111440351
이 사회가 한국 여성에게 부과한 대표적인 의무는 '남자를 보필하는 것'이다. 스스로를 옥죄며 예쁘게 꾸며서 남성들의 눈을 즐겁게 하고, 남성을 만나 그의 성을 딴 아이를 낳고 남편과 아이를 위해 자신의 삶을 헌신하는 동시에 남성이 경제적으로 부담되지 않도록 돈도 벌어올 것, 여성세가 붙은 상품들을 소비하며 남성 사업가들의 주머니를 두둑하게 해주고 이 구조에 대해서는 절대 눈치채지 말 것.
여기서 한 가지 짚고 싶은 것은, 예나 지금이나 남성들은 여성을 조롱해왔다는 점이다. 그런 게 없었던 적은 없다. '김치녀'에 대한 조롱이 '한국 페미'에 대한 조롱으로 바뀌었을 뿐. 하지만 남성들의 조롱에서 이제 초조함이 느껴지는 이유는 여성들이 정확히 그들이 원하고 기대하는 것을 찾아냈고, 저버렸기 때문이다. 과거에 남성들이 '여성들'의 특성이라고 비난했던 '나약하고 예쁘게 꾸미기나 한다고 남편 등골 빨아먹거나 남자친구에게 명품백을 사달라고 조르는 개념없음' 따위가 사실이라면 지금의 페미니즘 운동을(경제적 자립, 비혼, 비출산, 탈코르셋, 신체적으로 강해지기 위한 운동) 환영해야 함에도. 그것이 거짓이며 실제로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여성들이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대놓고 저항할 수 없다면, 우리는 조용히 복수한다. 국가와 사회는 끝까지 남성의 편만을 들 것이다. 그들의 기분이 우리의 논리적 주장보다 중요할 것이고, 그들의 성적 만족이 우리의 생존보다 우선될 것이다. 우리는 이제 기존 질서를 전부 해체해버리길 바란다. 피해자로서 딸을 낳고 싶지 않고, 가해자 사회에 편입될 아들 또한 낳고 싶지 않다. 마지막으로 홍콩의 2019년 시위대의 말을 인용하며 글을 마친다.
“네가 불태운다면 넌 우리와 함께 불탈 것이다(If you burn, you burn with 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