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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ㅇ혜 Oct 13. 2022

의식과 주관(subject)

철학이나 심리학에서 말하는 의식은 광의로는 ‘꽃을 본다, 문제를 생각한다, 기쁨을 느낀다’ 등 개체가 현실에서 체험하는 모든 정신작용과 그 내용을 포함하는 일체의 경험 또는 현상을 말한다. 심리, 경험, 현상 등과 같은 의미로 자주 사용되기도 하며 또 ‘깨어 있는 상태’와 동일시된다. 협의로는 체험하고 있는 것을 특별히 느낄 때에 한해서 사용하고 그러한 자각이 없는 의식은 자각하는 가능성에 따라 전의식(前意識)과 무의식(無意識. 잠재의식) 등으로 부른다. 우리들은 각성과 수면과의 교체에서 느끼게 되는 여러 가지 의식수준을 경험하는데, 그 순간순간의 의식은 상호간에 관련이 없는 단편적인 연결이 아니라 일관성이 있는 연속체인 것이다.(맥락성) W.제임스는 이 점을 강조하여 ‘상상의 흐름’, ‘의식의 흐름’이라고 하였다. 의식이라는 용어는 일반적으로 정신(mental) 영역에 대해서 사용된다. 정신분석학에서 의식은 무의식(unconscious)과 대립하며 현상학에서 의식은 대상들의 중심이며 언제나 ‘무엇인가?’에 대한 의식이다. 의식의 흐름은 미국의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가 1890년에 사람의 정신 속에서 생각과 의식이 끊어지지 않고 연속된다는 것을 말하면서 처음 쓴 말이다. 현대소설, 특히 심리주의 소설의 창작 기법인 의식의 흐름은 소설 속 인물의 파편적이고 무질서하며 잡다한 의식세계를 자유로운 연상 작용을 통해 가감 없이 그려내는 방법을 말한다. 

독일어의 의식이라는 말은 18세기 초에 볼프가 데카르트 철학에서의 ‘콘스키엔치아(conscientia)’의 번역어로서 사용한 것에서 시작된다. 콘스키엔치아라는 말은 고대 말기로부터 중세를 통해 본래는 ‘도덕적 양심’이라는 의미에서 사용되었다. 그로부터 뜻이 변하여 일찍부터 ‘내면적 자기의식’이라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었다고 말해진다. 그러나 데카르트에서 비로소 콘스키엔치아란 말이 두드러지게 ‘의식’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다만 데카르트는 의식이라는 의미를 표현 하는 용어로 ‘코기토(cogito)’, 즉 ‘사유’라는 말을 더 많이 사용했다. 17세기 말의 데카르트 철학 해설서를 통해 의식 개념이 널리 유포되어 자아의 의식에 기초를 두는 근대 철학이 형성되기 시작했고 칸트를 거쳐 현대의 후설 현상학에까지 이르게 된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칸트의 의식 개념의 특색은 어디에 존재하는 것일까?' 칸트에서 의식은 경험적으로는 그 내용이 다양하게 변화하고 주관마다 다르며 특수하다고 생각된다. 그에 더하여 그 내용이 의식 되는 방식에서도 '정도의 다름'이 있으며 차이의 의식이 없어지면 표상은 애매한 것이 되고 의식이 소실되기까지 무한히 많은 정도가 있게 된다. 그렇지만 이와 달리 순수한 의식이 있다는 것이 칸트의 진면목이라 할 수 있다. 칸트에 의하면 모든 표상은 반드시 어떤 무언가의 가능적인 경험적 의식에 관계한다. 왜냐하면 만약 그렇지 않다면, 요컨대 그 표상을 스스로 의식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된다면 그 표상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칸트는 그뿐만 아니라 모든 경험적 의식은 더 나아가 모든 특수한 경험에 선행하는 하나의 초월론적 의식, 요컨대 나 자신의 의식, 그러한 근원적  통각에 필연적으로 관계되어야만 한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모든 의식은 나 자신이라는 하나의 의식에 속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칸트의 ‘다종다양한 모든 경험적 의식이 하나의 통일적인 자기의식 속에서 결합되어 있어야만 한다’는 종합적 명제는 우리의 사유 일반의 최초이자 종합적인 근본명제라고 단언한다. 물론 이 자기의식 내지 초월론적인 의식 또는 통각이 실제로 얼마만큼이나 사람들에 의해 명석하게 표상되는가는 문제로 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칸트가 이 의식이 없다면 모든 인식의 논리적 형식의 가능성이 상실된다고 보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의 의식은 자기 자신의 인식이 아니다’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 자기 자신의 의식은 표상의 다양의 초월론적 종합에서의, 요컨대 통각의 종합적인 근원적 통일에서의 나 자신의 의식이지 결코 내가 나에 대해서 현상하는 상태의 의식이 아니며, 또한 내가 나 자신에서 존재하는 상태의 의식도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현상으로서의 자아의 인식이나 사물 자체로서의 자아의 인식이 아니다. 다만 '나의 있음'의 의식인 것이다. 우리는 칸트의 의식 개념의 근저에 초월론적 주체의 의식이 숨어 있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주관(主觀)은 주체 또는 주어라고 번역되는 독일어 Subjekt이며 라틴어 subiectum은 근저에 놓여 있는 것 또는 근저에 있는 것을 의미하며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서의 ‘실체’, ‘기체’에 대응하는 말이다. 대상, 비아, 자연에 대응하는 주관, 자아, 인간을 의미하게 된 것은 17세기 이후이다. 자아주관에서는 인간적 활동의 국면들에 따라서 심리학적 주관, 논리적 인식주관, 실천적 행위주관(주체) 또는 감정적 미적주관 등이 생각되며 이것을 자아의 개체적 주관으로서 생각하면 사회성의 근본을 이루는 자기와 타자의 관계도 주관 개념으로부터 나오게 되는 것이다. 주관(主觀)은 감각하고 의식하고 사고하는 것이다. 객관에 대립되는 의식 그 자체를 말한다. 주관이 실천을 강조할 때에는 주체(主體)라고 말한다. 관념론에서 객관은 주관에 의하여 구성되고 주관에 좌우된다고 생각하여 주관의 우월성을 주장한다. 일반적으로 개인의 독특한 사적(私的) 경험을 반영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으며, 타인이 확인할 수 없는 개인의 경험을 의미하기도 해서 편파적이거나 비과학적인 뜻으로도 사용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주관적 경험도 여러 개인 사이에 일치를 보게 되면 문화적으로 객관성을 띠게 된다. 사회적으로 합의(合意)가 되었다고 해서 반드시 진리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사회적으로는 그것이 진실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주관성이 바람직하지 않은 것인가? 또는 피할 수 없는 것인가? 에 대한 해답은 구체적인 세계에 대한 인간관계의 특성에 대한 존재론적, 인식론적 전제에 의존한다.      

주관주의는 데카르트의 ‘생각하는 나’(cogito)를 심도 있게 개념화시켜 인식주관을 감성과 오성의 선험적 통일체로 파악한 칸트의 선험론적 인식론에서 철학적으로 체계화된다. 칸트에서 주관문제는 우선 인식론적 사유주관으로서의 ‘사유하는 자아’의 문제로부터 시작된다. 나는 생각한다라는 작용은 나의 모든 표상에 수반할 수 있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으면 내가 생각하지 않은 것이 나의 표상에 들어오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아는 자기의 사유의 절대적 주어이다. 즉 그것은 어떤 다른 것의 술어로서는 생각되지 않는 것이다. 모든 사유는 공통된 주어로서의 자아에 대한 관계 속에서 성립한다. 자아는 모든 사고 안에 있으며 그 표상은 모든 사유에서 언제나 반복하여 현전하지만, 그것은 멈춰 서 있는 직관이 아니다. 따라서 실체로서는 인식될 수 없다. “모든 판단에서 나는........언제나 판단을 구성하는 관계를 규정하는 주관이다. 사유하는 나는, 사유에서는 언제나 주어로서 그리고 단지 사유에 속하는 술어와 같은 것과는 다른, 어떤 것으로서 간주되어야만 한다.” 존재자 그 자체, 객관 일반, 사고의 주관, 사유의 근거로서의 사유하는 자아에서 “나는 사유하면서, 현실적으로 존재한다”는 명제가 성립 한다. 이것은 이미 단순한 논리적 기능이 아니라 규정하는 자기로서의 사유 주관의 존재방식(현존재)을 한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유하는 주관의 논리적 통일은, ‘영혼’이라는 실체의 실재적인 단순성과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사고의 전체는 많은 주관에 나누어 주어질 수 있다고 하더라도, 주관으로서의 ‘사유하는 자아’는 분할될 수도 나누어 주어질 수도 없다. 그것은 모든 표상과 의식의 형식적 통일이다. 사유의 주관은 ‘나’라는 말에 의해서 초월론적으로 특징지어지는 데 불과하다. 

사유하는 자아는 그 표상이 단순해야만 하는 어떤 것 일반(초월론적 주관)을 의미한다고 하더라도, 하나의 주관에 대한 표상의 단순성은 주관 그 자체의 단순성의 인식은 아니다. 모든 실체에서의 본래의 주체(실체적인 것)는 알려질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의 지성의 특징은 모든 것을 논변적으로, 개념에 의해서, 요컨대 단순한 술어에 의해서 생각하는 것을 본질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적 자아는 단지 지성적 사유주관으로서만이 아니라 의지적 행위주체로서도 존재한다. 이 경우에는 그것 자체가 무엇인가에 대한 지적 욕구를 잠시 미루어 놓고서 행위의 절대적 주체로서 활동할 수 있다. 왜냐하면 실천적 행위주체는 실현해야만 하는 이상적 자기를 스스로의 영원한 이념적 과제로서 설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인식론적 이론 이성의 관점에서 초월론적 주관, 실천 이성의 관점에서는 본래의 자기, 선의지로서 그 의미가 부여되는 것이다. 인간의 다양한 활동에 따라서 다종다양한 주관이 가능해진다는 것은 확실히 당연하다.     

인간의 주관에는 감성(색안경), 지성(데이터를 처리하는 능력), 이성(전체적인 것을 추론하는 능력), 이 세 가지로 이루어진 인식장치가 삽입되어 있으며 이것을 이용하여 대상을 인식할 수 있다. 지성은 때때로 감성에 의해 부여된 지각데이터에서 일탈하여 자신의 논리에 따라 작용, 즉 감성에 의해 데이터(경험)를 뒷받침 하지 않고 일반적인 판단을 하는데 이런 일탈을 칸트는 ‘가상’이라고 불렀다. 가상과 오인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오인은 깨달으면 고칠 수 있지만 가상은 의지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성은 감성이나 지성의 도움을 빌리지 않고 원리에서 출발하여 추론을 거듭함으로써 전체적인 것, 즉 이념을 파악한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하는데 주관은 지성의 가상에 속아 추론을 통해 도출된 이념을 마치 실존하는 것처럼 생각하고 이념을 현실세계에 적용시키려한다. 칸트는 이를 원리적으로 불가능한 시도라고 보았다. 즉, 세계의 시작과 끝이 어디인가에 대해  우리는 경험적으로 인식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감성, 지성, 이성 이들 장치는 분리할 수 없기 때문에 ‘물자체’가 무엇인지 인식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똑같은 인식장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현상의 수준에 있어서는 공통이해가 성립할 수 있다. 그러나 전체적인 것에 대한 이념을 실증하려고 하면 안티노미가 발생 하여 공통이해는 성립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념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것일까? 이념의 존재의미는 없는 것일까? 이성의 의의는 세계의 모습을 경험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다. 이성은 무엇이 도덕적인가를 밝히고 도덕적으로 행동하기 위한 능력이다. 이념은 이성에 그러한 기준을 부여하는 것이다. 이성은 인식능력밖에 있는 것을 사유하는 능력이다. 감성의 능력에 근거하지 않고 오로지 판단으로부터 추론하여 영혼, 신, 세계에 대해서 인식범위를 넘어 사유를 하는 것이다. 

칸트는 이런 이성을 인식능력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의 사유들을 비판적으로 검증하기를 제안한다. 그러나 우리인간은 아무리 이성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이성의 산물을 제거해도 다시 이성의 산물을 만들 수밖에 없는 운명에 놓여있다.            


“지식 모두가 경험에서 나오지는 않는다. 인간은 감성과 지성(오성)을 통해 인식한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인간이 알 수 있는 데는 많은 한계와 제한이 있다. 우리가 이성을 사용해서 이성의 한계점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성이 어떤 주장들을 판결할 수 있는가를 조사하지 않고 이성에 근거해서 주장하는 것은 매우 독단적이다. 합리적이기 위해서 이성은 그 자신의 영역을 검사해야한다"고 하였다. 칸트는 인식내용의 참과 거짓을 문제 삼기에 앞서 자신의 인식능력 자체, 즉  이성을 비판적으로 검토해보고자 한 것이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어떻게 하면 인간이 경험을 통해 얻은 지식이 보편성과 필연성을 갖게 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모든 지식은 경험과 함께 출발하지만 지식모두가 경험에서 나오지는 않는다”라는 주장은 칸트철학의 출발점이자 과제를 명확히 밝혀준다. 

칸트는 인간의 인식을 감성과 지성(오성)이라는 두 개념으로 설명한다. 감성이란 우리의 정신이 감각을 통해서 대상들을 받아들이는 능력이다. 지성(오성)이란 감성을 통해 받아들인 내용들을 정리하여 개념을 만들어 내는 능력이다. 감성과 지성은 경험에 의하여 후천적으로 생겨난 것이 아니고 태어날 때부터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는 능력이며 감성과 지성은 각각 고유의 형식을 가지고 있으며, 칸트는 이것들을 선천적으로 타고난 정신의 형식이라는 뜻으로 ‘본유형식’이라고 불렀다.

칸트는 “감성이 없으면 어떠한 대상도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을 것이며, 지성이 없으면 어떠한 대상도 사유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칸트는 인식론에서 인간을 주체로 만들었다. 인간바깥의 도움 없이 인간 안에서 인식주체를 구했다. 칸트는 신의 절대적 영역을 규명하려는 노력에 대하여 ‘이성의 한계’를 말한 사람이다. 이로써 칸트 철학은 절대적인 진리를 구할 수 없다는 회의에서 벗어나는 하나의 기점이 되었다. 즉 과학의 이론적 인식을 근거 지으면서 그것의 한계를 명시함으로써 인식의 실천적입장의 우위를 주장한 점이 칸트 철학의 인식론의 의의가 존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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