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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ㅇ혜 Oct 13. 2022

존재와 존재자 그리고 현존재

철학에서 인간은 언제나 중요한 주제였고 근대 이후 서양 철학에서는 특히 중심 문제로 부각되었다. 서양 근대철학은 종래의 전통철학 및 당시의 지배적인 자연과학 이론 즉, 철학에서 라이프니츠, 볼프, 바움가르텐 등의 이성론(합리론)을 수용하고 자연과학에서는 뉴턴의 이론을 신봉했다. 일반적으로 이성론 철학과 뉴턴의 자연과학이 서로 상이한 분야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두 분야가 전혀 양립할 수 없는 이론을 주장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두 이론은 세계를 보는 관점에서 거의 일치하는 견해를 보이기도 한다. 우선 두 이론은 이 세계가 영원히 변하지 않는 동일한 본질을 지닌, 정신이든 물질이든 실체적 존재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파악한다. 그리고 자연의 존재들 중에서 인간이야말로 절대적인 신적 존재와 가장 유사하게 닮아 있으며 이로 인해 인간은 이 세계의 실체적 존재들을 인식할 수 있다고 보는 점에서 두 이론은 같은 길을 걷고 있다. 이성론 철학과 근대 자연과학의 주제는 ‘세계 속에 존재하는 영원한 본질을 지닌 실체들’이다. 물론 이들 학문이 모두 인간에 대해 관심은 갖고 있었지만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핵심주제는 아니었다. 

칸트는 전통철학의 영향에서 점점 벗어나 자신의 철학 이론을 확립해 가면서 인간 존재를 중심으로 한 철학을 펼치게 된다. 그러나 인간을 중심으로 전개된다고 해서 유아론적 독단론을 펼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유한한 인간의 한계를 인정함으로써 그의 철학은 인간의 겸허한 자세를 바탕으로 한다. 우리가 무엇을 인식한다고 할 때 그것은 인간 능력의 한계 안에서 이루어진다. 우리의 인식 대상이 무엇이건 간에 그것은 우리의 능력 범위 안에 있다. 이 범위를 뛰어넘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안다고 할 수 없다. 이렇게 볼 때 칸트철학은 인간의 인식 능력의 한계 안에서 전개되며 이러한 의미에서 칸트철학은 인간이 중심 주제라고 할 수 있다.                


형이상학이란 일체의 존재자(세계)의 궁극적 근거를 연구하는 것이다. 과학은 어떤 특수한 영역의 존재자(存在者)를 구성하는 원리를 탐구한다. 예컨대 경제학은 경제사상을 성립시키는 경제법칙을 연구하고 물리학은 물리사상을 성립시키는 물리법칙을 연구한다. 특수성은 과학적 인식의 본질에 의거한다. 과학은 어떤 특수한 시야(視 野), 즉 영역(領域)을 고정시킴으로써 그 대상과 방법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형이상학은 영역적, 부분적인 지식이 아니라 보편적, 전체적인 지식을 구한다. 이것은 특수과학의 지식의 총화도 아니고 특수과학의 지식을 성립시키는 주관적인 근거(인식론적 근거)의 지식도 아니다. 그것은 모든 존재자에 근거를 부여하는 궁극적 실재근거(實在根據)의 지식이다. 따라서 특수한 영역과 시야를 넘은 초월의 시야에서 얻어지는 초월적 지식이다. 이 초월의 시야는 인식하는 인간이 자기의 존재근거에 돌아가는 근원환귀(根源還歸)의 길에서 얻어진다. 시간을 초월한 영원도 거기서 알게 되며 인간존재가 궁극적으로 뿌리 내리는 근원도 거기서 발견할 수 있다. 형이상학을 학문으로서 최초로 확립한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이다. 그는 존재자에 관하여 보편적으로 제1의 원리라 하고, 원인을 탐구하는 학문을 제1철학이라 부르고 학문체계의 최고위에 두었다. 그것은 일체의 궁극적 실재근거로서의 신의 지식이기도 하고 고귀한 지식으로서 지혜(智慧. sophia)라고도 불렸다. 그러나 그 후 이 명칭은 생성소멸 하는 자연물(自然物)에 근거를 부여하는 영원불멸의 원리를 구하는 학문의 내용과 관련을 가지게 되었다. 변화하는 자연물 배후에 그 존재 근거로서 영원불멸의 실재를 구하려는 것은 그리스 철학에서 본질적인 것 이며 이러한 의미에서 그리스 철학은 형이상학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전 세계의 창조자로서 영원한 신을 인정하는 그리스도교에서도 적합한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의 형이상학은 중세 그리스도교 신학 체계에 대표적으로 수용(受容)되어 한층 심화 발전 하였다. 그러나 근대과학의 성립은 이러한 고대, 중세를 일관하는 통일적인 세계상(世界像)을 파괴하고 특수과학의 방법에 따라 얻어지는 것만이 유일한 실재인식으로서 인정하게 되었다. 이것은 형이상학의 붕괴이며, 칸트는 이론적인 학문으로서의 형이상학을 부정하였다. 오늘날에는 과학을 지식의 모범으로 보는 근대의 사고방식에 따르는 사람도 많지만 한편으로는 이것을 극복하여 철학을 과학과는 다른 근원의 지(知)로 보는 철학자도 많아졌다. 동시에 형이상학은 그 명예를 회복하고 형이상학의 역사는 새로운 의의를 획득하기에 이르렀다.      

일반적으로 존재론은 형이상학과 같은 뜻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 기원에서 말하자면 형이상학이 이미 고대에 가능 했던 말 인데 반해, 존재론은 17세기 중엽에 조어되어 18세기가 되어서야 비로소 그 지위를 확정한 철학용어이다. 이 점은 이 말이 근대의 철학적 상황에 대응하여 만들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데카르트파에 속하는 클라우베르크가 그의 저서 에서 ontosofia 또는 ontologia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정의를 내린 것이 근대적 철학용어의 출발점이다. 클라우베르크는 이 말에 대해 ‘특수한 존재들의 하나의 종이 아니라 그것들 모두를 포섭하는 공통 유로서 그것들에 내재하는 존재 그 자체를 대상으로 한다’라고 했다. 때문에 그와 같이 이름 붙여진 것이라는 명확한 사명을 부여하고 있다.

형이상학이 자연적 존재로부터 신에 이르기까지의 영역들을 상향적으로 포괄하는 절차에 근거하여 존재를 논하고 있는데 반해, 존재론은 그 존재의 영역들 모두에 공통된 것으로서의 존재라는 대단히 추상적인 대상을 미리 상향적 절차 없이 정립한 다음 그것에 초점을 맞추어 취급한다는 점에서 대조를 보이고 있다. 형식적으로는 존재 그 자체라는 형이상학의 최종적 테마가 독립되게 된 것이 존재론이라고 말 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수준에서 말해지는 존재라는 개념을 자기 스스로가 고유한 대상으로서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철학은 신학에서 원리를 구하는 것으로부터 해방되어 신학과는 별개의 입각점을 지니는 학으로서의 자각을 획득했던 것이다. 존재론 이라는 말의 등장은 그 사실과 자부심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존재론이라는 용어의 함축을 전면적으로 내세운 것이 볼프이다. 볼프의 제 1철학 또는 존재론에서는 존재 일반의 개념을 다룬 제1부와 존재의 다양한 종류를 논한 제2부로 이루어져 있다. 존재론 이라는 이름하에 협의의 존재론과 전통적 형이상학의 대상이 둘 다 받아들여져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칸트에 의하면 근대적인 색채를 농후하게 지니는 존재론이라는 말에 대해서 비판적이며,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대상을 인식하는 방식에 관계 한다”는 초월론철학의 정의에서도 이미 존재 그 자체를 무비판적으로 논하는 것은 배척된다. 그러나 이것은 칸트가 철학 그 자체로부터 존재론이라는 말을 배제하고자 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칸트는 존재론이라는 학에 대해 고유한 방법론을 부여하여 철학적으로 기초 짓고자 했다. 이를 위한 수단으로 대상을 인식하는 방식으로의 초월론적 전회이며, 그것을 거친 후에 칸트는 비판철학의 기반위에 선 새로운 형이상학의 체계를 제시하고 있다. 체계구성 자체가 입법자로서의 인간 이성이라는 칸트철학이 획득한 최고원리에 기초 하는 자연의 형이상학과 인륜의 형이상학으로의 구분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협의의 형이상학인 자연의 형이상학 속에 초월론철학을 내용으로 하는 존재론이 속하고 있다. 이것은 전적으로 독자적인 것으로 된다는 것이 근거에 놓이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에 존재론의 역사에서 칸트가 지니는 독창성이 놓여 있다.                

칸트에서 초월론적이란 말은 순수이성비판의 가장 중심적인 술어이며 선험적인 인식의 가능성을 묻는다고 하는 이 저작의 근본 짜임새를 나타내는 말이다. 순수 이성의 비판은 형이상학의 원천인 순수 이성 그 자체에 관계되지만, 이 비판은 순수 이성의 자기인식이다. 그리고 여기서 성립하는 순수 이성의 자기관계야말로 ‘초월론적’이라는 개념의 핵심을 이룬다. 칸트에서 초월론적 대상과 초월론적 사용 등등의 초월론적은 ‘경험의 한계를 넘어선’이라는 의미(어의)가 아니다. 그것은 직관에서 주어진 대상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사물 일반 내지 어떤 것 일반(실재성)의 개념을 포함하는 존재론적 개념들에 관계하는 순수 사유를 의미한다. “초월론적 자유, 초월론적 심리학 등의 표현은 우리가 가능적 경험을 벗어날 때 결코........주어진 객관에 이르지 못하며 단지 우리의 이성 안에 그 기원을 지니는 개념들에 관계 한다”는 사태를 언표 한다. 순수 이성의 존재론적 자기관계는 반드시 비판적이지는 않다. 그러나 비판적 형이상학에서 이성은 그 인식의 원천을 대상과 그 직관 안에서가 아니라.........자기 자신 안에 지니기 때문에 순수 이성의 자기관계는 초월론적 비판 전체의 근저에 존재한다. 또한 문제들의 비판적 해결 역시, 여기서의 과제가 초월론적 과제로서 주어진 대상으로부터 나오지 않고 순수 이성의 존재론적 자기관계로부터만 발현하는 까닭에 바로 우리 자신 안에서 초월론적 해답으로서 발견되어야만 한다는 통찰에 기초한다. 초월론적 비판은 주어진 대상을 상정(그 현존재를 전제)하면서 그것에 관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존재론적 인식양식에 관계함으로써 인식 대상이 주어져 있다는 것(현존재)의 의미를 개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현존재의 해석학으로서의 실존의 분석론을 전개한 하이데거에  따르면 “지금까지 서양의 형이상학의 역사는 존재와 존재자의 구별(존재론적 차이)을 망각(존재망각)한데서 성립한다. 인간의 감각과 지성에서 구체적으로 파악되는 것은 우선은 존재자이지 존재 그 자체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칸트에서는 현존재 개념이 하이데거처럼 인간 존재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또한 현존재(현실성)와 실재성의 구별에서 명확해지듯이 존재와 존재자가 확연히 구별된다. 칸트에 따르면 현존재는 우선 사물이 무엇인가라는 것에 관한 본질 존재와 형이상학적 존재 등과는 달리, 사람과 사물과 사태가 일정한 시, 공간적 장소(Da)를 점하는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을 의미한다. 칸트에서 현존재는 실존재, 현실성 등과 같은 뜻이다. 칸트가 “존재는 어떠한 실재적 술어도 아니다”라고 하고 있듯이 현존재, 현실성, 실존성의 개념과 실재성의 개념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현실성은 양상의 범주이고 실재성은 질의 범주인 것에서 분명한 것처럼, ‘현존재는 사물의 본질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이 어떻게 존재 하는가?’라는 사물의 양상을 나타낼 뿐이다. 이에 반해 ‘실재성은 사물이 무엇인가?’, 즉 사물의 본질로서의 실체의 실체성을 결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현존재를 지니지 않는 사물은 인간에게 있어 현실적 인식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따라서 모든 경험의 대상은 인간에 의해 인식되기 위해서는 현존재로서 시, 공간 내에서 현상하여 현실적으로 감각되고 지각되지 않으면 안 된다. 요컨대 “사물의 단순한 개념 속에서는 사물의 현존재의 어떠한 성격도 발견되지 않는다”, “지각(감각)이란 현실성의 유일한 성격이다”, “대상의 현존재와 관련 하여 단순한 개념으로부터 다른 대상의 현존재에 도달할 수 없다”, “선험적인 개념은 사유의 대상을 산출하지만 그것은 사유의 형식에 관해서일 뿐이며 현존재에 관해서는 아니다”. 따라서 경험적 사유 일반의 요청들의 원칙의 세 종류는 사물의 가능성, 사물의 현실성, 사물의 필연성이라는 식으로 사물에 관계하는 것이다. 사물은 어디까지나 단순한 개념의 존재와는 달리 시간적, 공간적 현상물이다. 현상이라든가 실체라든가 지속성이라고 말해지는 것도(변화에서조차) 모두 현존재를 전제해서만 비로소 말해질 수 있는 것이다. 실체 개념으로서의 지속성은 “(현상에서의) 사물의 현존재를 표상하는 방식에 다름 아니다”, “실체의 개념은 현존재의 모든 규정의 근저에 있다”, “지속적인 것을 통해서만 현존재는 시간계열의 다양한 부분들에서 교호적으로 양을 획득 한다”. 또한 칸트는 이러한 현실성의 요청 부분에서 데카르트와 버클리의 관념론을 논박하기 위해 사유하는 자아의 현존재와 외적 사물의 현존재의 확실성 내지 양자의 상호연관성을 증명하고 있다. 여기서 칸트가 밝히고자 하는 것은 자아 주관의 객관적 인식은 불가능하다 할지라도 자기의식의 현실성은 사물의 현존재와 마찬가지일 정도로 확실하다는 것이다. 나아가 신의 현존재, 즉 ‘신이 있다는 것이 어떠한 방식으로 주장 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이 칸트의 체계적 관심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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