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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ㅇ혜 Oct 13. 2022

임마누엘 칸트의 사유하는 자아

칸트 이전의 근대 철학자들은 판단으로 성립되기 이전의 관념(표상), 그것만으로 인식가치를 지닌다고 생각하며 그에 준거하여 철학적 문제를 고찰했다. 이에 반해 칸트는 이론철학의 과제를 '어떻게 해서 선험적 종합판단은 가능한가?'라는 물음에 집약한 데서도 알 수 있듯, 판단을 제1차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이러한 전회는 존재론적으로 말하면 세계가 사물의 모임이 아니라 사실의 모임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는 말은 문장 중에서만 의미를 지닌다고 하는 현대 분석철학의 사고방식과도 통한다.       

칸트에게 있어 사유는 본질적으로 판단작용이다. 칸트는 판단이란 '하나의 의식 속에서의 표상의 합일'이라고 생각한다. 표상의 결합은 대상 그 자체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이러한 결합이 없으면 경험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표상의 결합은 주관의 자발적 활동 즉, 지성에 의해서 산출되지 않으면 안 된다. 지성의 모든 활동은 판단으로 환원된다. 표상의 결합으로서의 판단은 세 가지 요인으로 이루어진다.      

(1)감성에 의해서 수용된 대상의 직접적 표상, 즉 직관의 다양.      

(2)이 다양을 초월론적 상상력에 의해서 서로 관련지어 합치는 것, 즉 종합.      

(3)이 종합을 개념 하에서 하나인 대상으로 규정하는 것, 즉 통일.      


종합적 통일이 가능해지기 위해서는 소여의 표상이 하나의 의식 속에서 나의 표상으로 되어있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을 보증하는 것이 모든 표상에 수반해야만 하는 나는 생각한다라는 형식적 의식 즉, 근원적 통각(자기의식)의 초월론적 통일이다. 감성에서 주어진 직관의 다양은 이상과 같은 종합적 통일에 의해서 ‘이것은 무엇 무엇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유의미한 통일을 이룬다. 즉 판단에 의해서 대상은 비로소 규정된 특정한 대상으로서 나타난다. 

통각이란 지각에 항상 동반하면서 다양한 지각들을 통일하는 의식을 말한다. 따라서 통각은 ‘지각에 의거하여, 지각에 대해서’라는 식으로 지각과의 관계없이는 통각의 개념 그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통각은 라이프니츠가 단자론에서 최초로 사용한 개념으로 물질적 상태에 있는 단자의 어둡고 무의식적인 표상작용에 대하여 인간의 이성에 대응하는 정신적 상태에 해당하는 단자의 밝은 의식적 표상작용을 통각이라 명명하였다. 라이프니츠에 따르면 지각은 외부세계를 비추는 내적상태이며 통각은 모나드의 내적상태의 의식적 반성이다. 

칸트에서 통각은 경험적 통각과 순수한 근원적 통각으로 나누어진다. 경험적 통각은 경험적이고 심리적인 상대적 자기의식이며 순수한 근원적 통각은 초월론적 통각으로서 모든 인식내용으로서의 지각을 통일하면서 자기 자신을 통일하는 양면성을 지닌다. 칸트에서의 통각은 ‘나는 생각한다’라는 사유하는 자아의 활동 없이는 불가능하다. 칸트는 사유하는 자아를 초월론적 통각으로 직관, 상상력, 지성을 자기의 내용으로 포섭할 수 있다는 것에서 근거 짓고자 했다. 사유하는 자아를 통각으로서 파악한 점이 칸트 인식론의 커다란 특색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인간적 사유에서는 모든 개념(범주)의 운반체로서의 통각이 주연을 담당함으로써 통각은 경험적 요소로서의 지각을 범주로 구사하여 통일로 가져오고, 지각과 지성을 매개하며 스스로는 지각을 포함한 지성으로서 활동하고 있는 것이다. 통각 개념 안에는 바로 경험적 실재론이자 초월론적 관념론으로서의 칸트 비판철학의 진면목이 간직되어 있는 것이다. 나는 생각한다(Ich denke)라는 것은 나의 모든 표상에 수반되어야만 한다. 순수 통각의 항존 불변의 ‘자아는 우리의 모든 표상의 상관자를 이룬다’라고 칸트가 말하고 있듯이 통각은 언제나 표상 내용, 즉 지각을 종합하고 통일한다.      

일반적으로 인간의 인식 내용(표상)은 판단 형식에 의해서 표현된다. 즉 판단 주어와 판단 술어의 결합에 의해서 인식 내용이 말해진다. 나아가 그 인식을 스스로 지각하는 판단(인식) 주관이, 판단(인식) 활동의 처음부터 끝까지 전제되고 있다. 따라서 '표상의 다양의 종합에서의 의식의 형식적 통일'이라는 표현 안에는 인식 내용을 이루는 바의 판단 주어(대상)의 통일(초월론적 대상)과 판단 술어의 통일(순수지성 개념) 및 인식 주관의 통일(초월론적 통각)의 동시적인 성립이 함의되어 있다. 여기서 보이는 판단 내용(판단 주어+판단 술어)과 판단 주관과의 상관관계는 객관(대상)과 개념(범주)과 주관(자기)의 정립(鼎立)적 관계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것은 진리가 인식(개념)과 객관과의 합치라고 말해지는 까닭이다. 인식론상이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라고 말해지는 것의 내실이 통각을 중심으로 한 자아(주관)와 개념(범주)과 대상(객관)의 3자의 동시성과 상호관계 안에 있다는 점에 있으며, 이 점이 칸트의 인식론으로서의 초월론적 철학이 단순한 주관주의가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이와 같이 통각의 종합적 통일은 사람들이 모든 지성사용을 전체 논리학뿐만 아니라 나아가 그 논리학에 따라서 초월론철학을 통각의 종합적 통일로 결부시켜야만 하는 최고점이며, 통각의 종합적 통일의 원칙은 모든 지성사용의 최상의 원리이다. 

나는 생각한다(Ich denke)라는 명제에서의 자아는 한편으로 모든 사고의 논리적 통일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내가 생각하고 있는 하나의 대상으로서, 요컨대 나 자신과 또한 나 자신의 무제약적 통일로서 표상된다. 모든 사유와 판단의 불변적 주관으로서의 자아의 사유는 경험적 직관의 대상으로 될 수 없기 때문에 그 자신은 어떠한 내용적 표상도 아니며 단순한 형식적 표상이다. 이에 의해 통각은 자기의 단일성과 동일성을 지닌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나는 생각한다라는 근원적 통각은 여러 가지 표상으로서의 대상의식처럼 그때마다 서로 다른 하나하나의 특수한 표상도 아니고 또 현실적 경험인 것도 아니기 때문에 유일한 것이자 전체적인 것이다. 이러한 순수한, 근원적인 불변의 의식은 순수 통각의 항존 불변의 자아, 즉 동일한 자기이다. 그러나 항존 불변의 자아는 실체적 존재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기능의 동일성, 자기 자신의 활동의 동일성으로서만 파악된다. 자아 즉 나는 생각한다는 작용, 그것도 자기 활동성의 작용은 자발성의 작용이며 나아가 통각은 하나의 능력이다.      

근대 독일철학에서 ‘나는 생각한다(Ich denke)’라는 데카르트적 코기토의 수용사에서 칸트의 입장과 라이프니츠의 입장은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 라이프니츠는 데카르트가 이야기한 자기의식의 특권적 명증성을 의식 일반의 명증성 안에서 해소 시켜 자기의식 중심적인 근거 짓기 프로그램을 모나드의 다원론으로 해체하는 한편, 단순한 자기의식에 의한 자기인식, 요컨대 반성적 자아인식의 가능성을 인정한다. 이에 반해 칸트는 이성적 심리학 비판에서 단순한 자기의식에 의한 자기인식을 순수 이성의 오류추리로서 엄혹하게 논박하지만, 데카르트적 코기토가 지니는 자기의식 중심주의를 초월론적 통각의 교설로서 계승 한다. 나는 생각한다는, 범주표 안에서 명시적으로 제시되고 있지는 않지만, 거기에 산입되어야만 한다는 특수한 위치를 지니는 개념(내지는 판단)이다. 요컨대 이 개념은 개념 일반의 운반체로서 모든 범주 하에 함께 포괄되어 있으며 모든 사유가 하나의 의식에 귀속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시 말하면 나는 생각한다가 나의 모든 표상에 보편적으로 수반함으로써 다양은 통일로 가져와지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칸트의 경우 나는 생각한다는 초월론적 통각 내지는 순수 통각과 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 그러나 나는 생각한다의 자아가 함의하는 통일은 실체적인 의미에서 이해되어서는 안 되는바, 어디까지나 인식을 위한 논리적 통일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자아는 그것 자신만으로는 아무런 내용이 없는 공허한 표상이며, 엄밀하게는 개념이라고 불릴 수도 없는 모든 개념에 수반하는 단순한 의식이다. 따라서 나는 생각한다를 유일한 텍스트로 하여 이로부터 자아의 실재성을 추론하고자 하는 이성적 심리학의 시도는 오류추리로서 비판되어야만 한다. 초월론적 통각으로서의 '나의 자기인식'의 가능성에 관한 칸트의 적극적인 주장은 일의적이지 않다. “내가 나를 의식하는 것은 내가 나에게 현상하는 대로 의식하는 것이 아니며, 내가 나 자신에서 존재 하는 대로 의식하는 것도 아니고, 오로지 내가 존재한다는 것만을 의식한다.”       

'이론적 인식론적으로는 소극적으로밖에 파악될 수 없는 자아 그 자체가 어떻게 해서 초월론적 통각으로서 현상 인식의 정점에 설 수 있는 것일까?' 자기 자신에 관해 무한정적인 방식으로 밖에 파악될 수 없었다고 하는 사실은 자아가 어디까지나 사유하는 주관이어서 그 이외의 모든 것을 한정할 수 있지만, 자기 자신은 타자에 의해서 한정될 수밖에 없다고 하는 자기의 한정능력의 무진장성, 무한성을 증시 하고 있다. 이와 같이 직관되지 않고 다만 사유하는 활동의 주관으로서의 자아는 이것을 한정하고자 해도 영원히 지적으로는 규정할 수 없는 잉여이다. 기껏해야 어떤 것 일반, 의식의 단순한 형식, 가장 내용이 공허한 표상, 가장 빈약하면서 최소의 표상, 비경험적인 대상이어서 단순한 자기의식에 그쳤다. 그러므로 경험적 통각의 근저에 항존 불변의 자아로서 초월론적 통각을 전제한다고 하더라도, 초월론적 통각은 어디까지나 이론적 인식론적 주관의 기능의 동일성으로서만 이해되어야만 하며 객체적 실체처럼 단독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즉 사유하는 자아는 자기 자신을 범주에 의해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범주를 그리고 범주에 의해서 모든 대상을 통각의 절대적 통일에서, 요컨대 자기 자신에 의해서 인식한다. 사유하는 자아의 통각적 자각은 현상도 사물 자체도 아닌 자아의 존재방식, 즉 다만 내가 있다는 것에 불과하며 그것은 자아의 현존재의 근원적 사실이지만 실체적 인식은 아니다. 예컨대, 칸트에서 통각이란 감성적인 소여들을 하나의 의식 속에서 통일하는 의식, 즉 모든 경험에 수반하는 자기의식을  말하는 것이다.      

칸트에서 자아는 통각으로서 파악된다. 자아는 순수 통각이나 초월론적 통각이라고 불린다. 양자는 단순하게는 동일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생각한다는 모든 나의 표상에 수반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나는 생각한다의 기능(순수 통각)으로부터는 결코 객관적 타당성을 지닌 하나의 경험을 구성하는 능력은 도출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을 위해서는 꿈과 착각을 포함한 다양한 표상계열 속에서, 특히 대상에 적중한 표상계열, 즉 하나의 경험을 구성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이러한 능력을 적극적으로 지닌 것으로서 등장하는 것이 ‘초월론적 통각’이다. 따라서 그것은 ‘초월론적 상상력’의 초월론적 종합작용, 즉 객관적 시간의 구성작용을 이미 안에 포함하고 있는 능력이다. 초월론적 통각은 현상의 객관적 시간질서를 구성하는 능력이며, 어디까지나 구체적인 사실적 세계로 향한 능력이다. 칸트의 초월론적 통각은 내감(경험적 통각)을 촉발하는 ‘자기촉발’이라는 개념 하에서 실행하고 있다. 자기촉발에 의해 비로소 초월론적 통각은 각각의 개별적인 자아의 구체적인 체험계열, 즉 ‘내적 경험’을 손에 넣는다. 초월론적 통각 그 자체는 어떠한 의미에서도 인간적 자아는 아니다. 그것은 내감에 작용함으로써 비로소 인간적 자아일 수 있는 것이다. 칸트가 말하는 내감이란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에 대응하는 외감에 반해 이들 외관으로는 파악되지 않는 ‘영혼’이라는 대상을 파악하는 기관이다. 이 경우 영혼은 이성적 심리학의 주제인 실체로서의 영혼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신체가 존속하는 한, 존속하는 경험적 자기라는 대상으로 간주되고 있다.                


18세기 영혼은 단순한(그러므로 물질의 변화에 영향 받지 않는) 실체로 되며 감각, 구상, 개념 형성과 판단, 그리고 욕구 등의 작용들이 유래하는 하나의 근원적인 힘을 지니는 것이었다. 영혼(프쉬케)의 학을 의미하는 심리학이라는 용어는 16세기에 처음으로 사용되었지만, 영혼에 관한 학문적 연구는 고대 그리스 철학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에 대하여>는 심리학에 관한 최초의 체계적 논구이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이성적 심리학, 즉 형이상학적 영혼론을 비판하고 있다. 이 학의 대상인 ‘실체로서의 영혼’은 이성이 주관적 실재성을 지니는데 불과한 것에 객관적 실재성을 부여함으로써 성립 된 것이며, 초월론적 가상의 하나라고 결론짓고 있다. 즉, 칸트에 의하면 이성적 심리학은 나는 생각한다라는 유일한 명제 위에 세워지며 그것을 유일한 원천으로 하는 학이다. 칸트에 의하면 우리의 일체의 사유에 수반되는 나의 표상은 전적으로 내용이 없는 것이며 모든 사유의 초월론적 주어, 다시 말하면 단순한 사유의 논리적 내지 문법적 기능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자기의식을 그대로 자기인식으로 잘못 받아들임으로써 이성적 심리학이 성립했다고 말한다. 이성적 심리학의 기본명제들 '영혼은 실체다, 영혼은 그 성질상 단순하다, 영혼은 그것이 거기서 존재하는 상이한 시간에 입각하여 수적으로 동일 즉 단일하다, 영혼은 공간에서의 가능적 대상들과 관계 지어져 있다'는 어느 것이든 (이성적 심리학이 주장 하는 바에 반하여) 자기의식으로부터의 추론에 의해서는 도달되지 않는다. 한 마디로 말하면 이성적 심리학의 전체가 사유 일반의 논리적 해명을 객관, 대상의 형이상학적 규정으로 간주하는 오류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인식이란 단순히 나는 생각한다라는 자기의식이 아니라 자기를 객관적 세계 속에 위치 짓는 것이고 이것은 자기촉발이라는 외적경험을 구성하는 초월론적 통각의 초월론적 종합작용이 내감을 촉발하여 내적경험을 구성하는 것이다. 이것은 내적경험은 외적경험에 의존한다라는 테제에 직결되며, 자기촉발이 도덕법칙에서 존경이라는 개념에까지 미칠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내감은 이러한 기관에 그치지 않고 초월론적 통각과 구별된 자아의 존재방식으로 이해된다. 자아는 초월론적 통각이라는 초개인적 존재방식만이 아니라 각자의 개별적인 존재방식이기도 해야만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내감은 자주 경험적 통각이라고 바꿔 말해지고 있다. 특히, <인간학>에서 내감은 통각(일반)과 대립하는 자아의 상이한 기능 내지 측면으로 이해된다. 즉 통각이 '사유의 의식' 내지 ‘지성적 자기의식’이라고 불리는 데 반해, 내감은 ‘내적 지각의 의식’ 내지 ‘경험적 자기의식’이라고 불린다. 내감은 또한 초월론적 통각의 자발성에 대립된 수동성이라는 의미도 짊어지는 ‘수동적 주관’이라고도 불린다. 자기촉발론에서 자발적인 초월론적 통각이 수동적인 내감을 촉발한다고 하는 관계가 그것의 전형이다. 내감은 시간과의 연관에서 말해진다. 시간은 ‘내감의 형식’ 즉, 영혼=경험적 자기를 파악하는 형식이다. 인간적 자아는 자기와 타자의 체험의 구별을 이룰 수 있는 것이어야만 하며, 그것은 현실의 체험계열인 ‘내적 경험’을 구성함으로써 비로소 가능하다. 내감이란 자아가 일반이라는 추상물을 파악하는 기관인 것이 아니라 현실의 체험을 거듭해가는 개개의 인간적 자아를 파악 하는 기관인 것이며, 나아가 이러한 장면에서 다양한 변형을 지니고서 사용된다. 즉 그것은 개개의 인간적 자아(경험적 통각)이며, 또한 그 개개의 자아의 차이성을 형성하는 측면이고(경험적 자기의식), 그 대상으로서의 개개의 자아(수동적 주관)이다.     


사물(Ding)이 존재론적 개념인 데 반해 대상 또는 객관은 지성과의 관계를 포함하는 인식론적 개념이다. 그러나 인식 자신에 의해 대상을 창조하는 무한한 지성에게는 그것이 향하는 어떠한 기존의 존재도 대립할 수 없기 때문에 대상은 정확하게는 유한한 지성에 대해서만 존재한다는 하이데거의 지적도 있다. 하이데거는 시간 , 공간, 범주라는 형식에 의해 인식되는 한에서 사물이 현상인 것이며, 대상의 본질에는 대향(對向. 마주봄)과 입상(立象. Stand)이 있다고 하였다. 대상성립에 관련하여 동일한 범주라고 하더라도 수학적 범주와 동역학적 범주의 역할을 구별하였다. 수학적 범주는 대상의 대향성에, 동역학적 범주는 입상성에 관계된다고 말한다. 그것은 전자가 직관적 소여, 즉 무엇이든 의식에 대한, 의식을 향한 직접적 소여의 가능성에 관계하고, 후자가 이 소여를 매개로 하여 규정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객관적이고 항상적으로 서 있는 것, 즉 대상의 현존재의 가능성에 관계되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초월론적 대상은 한편으로는 경험의 대상을 개별화 하는 직관으로부터 분리하여 일반적으로 사유한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것은 감성적이지 않은 무언가 특수한 직관의 대상이 아니며 사물 자체도 아니다. 그것은 어떠한 경험적 규정성도 지니지 않는다는 의미에서는 전적으로 무이지만 직관을 종합, 통일하여 진위를 물을 수 있는 판단을 내릴 때 의식의 형식적 통일을 필연적이게끔 하는 대립의 지평이자 통각의 통일의 상관자인 것이다. 초월론적 대상은 또한 경험의 질료와도 관련하여 말해진다. 개개의 경험판단이 내려진 경우 그 진위는 판단의 내용, 질료에 관계되며 모든 현실적 경험의 기준들과 관련시켜 어디까지 하나의 경험에서 공존할 수 있는가에서 결정된다.      

사물을 현상과 사물 자체(Ding an sich)의 이중의 관점에서 보고자 하는 것이 칸트의 근본적 주장이다. 그렇게 하면 한편으로 순수 지성 개념(범주)의 객관적 실재성 및 경험의 대상에 관한 선험적인 인식의 가능성을 증명할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 신, 자유, 불사 등의 무제약자의 이념에 대해 이론적 영역에서는 지성 사용의 규제적 원리라는 의미밖에 부여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실천적 영역에서는 도덕성과 관련하여 객관적 실재성을 증명할 수 있다. 이리하여 학으로서의 형이상학의 목적이 달성될 수 있다는 것이다.               


모든 것은 그것이 의식되는 한에서 우선 대상이라고 불린다. 시간, 공간을 형식으로 하는 경험적 직관이나 이 직관의 아직 현존재가 규정되어 있지 않은 대상으로서의 현상은 이런 의미에서 대상이다. 현상은 한편으로는 경험적 직관 및 그 대상을 의미한다. 또한 현상은 지성(통각)이 직관을 범주에 의해 종합, 통일하는 것에서 성립하는 경험의 대상이다. 양자의 관계는 “현상은 이것이 대상으로서 범주들의 통일에 따라서 사유되는 한에서 페노메나라고 불린다”는 형태로 적확하게 표현된다. 칸트는 페노메나와 누메나(Phenomena and Noumena. 현상과 본체)를 통해 우리가 인지하는 것들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는 누메나(물자체)와 페노메나(보이는 사물)를 구분했고 누메나의 존재는 필연적이지만 지식은 오직 페노메나로부터 얻을 수 있다고 하였다.      

본체(Noumenon. 本體)란 현상(phenomenon)에 대응하는 말로 이것은 감성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이성에 의해 받아들여지는 것을 말한다. 플라톤이 최초로 이 말을 사용했다. 그는 자기 자신에 의해 존재하고 이성적 인식의 대상인 것 즉, 이데아를 본체라고 말했다. 칸트도 같은 생각을 갖고 인간의 경험에 의해서 파악할 수 없는 ‘물자체’를 본체라고 했다. 왜냐하면 인간에 의해 얻어질 수 있는 경험은 감성적인 것에 의하기 때문이다. 사물이 일정한 사물이기 위해서 다른 사물과는 달리 그 사물을 성립 시키고 그 사물에만 내재하는 고유한 존재를 본질(essentia, 本質)이라 한다. 본질이 사물의 본원적 구성요소라는 점으로 미루어 본다면 본질은 사물의 본성이다. 따라서 이것은 사물의 존재를 규정하는 원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으로써 제기 되는 것을 사물의 본질이라 하고, 또 이것이 그 사물의 존재 그 자체라는 의미로 이것을 사물의 실체(實體. ūsia)라고 불렀다. 본질은 사물의 본래의 구성요소로서 사물의 지속성, 본래성을 표현하는 것으로 그것은 '사물이 본래 무엇 이었던가?'라고도 한다. 이에 대하여 이 말의 라틴어 번역인 ‘essentia’는 ‘esse(존재하다)’에서 유래하는 말로 ‘진정으로 그것이라는 것’의 의미 이다. 본질은 유(有)와 종(種. 씨. 혈통)의 차이로 정의된다. 예를 들면 인간의 본질은 인간성이며, 이것은 이성적 동물로서 정의된다. 중세에는 신은 ‘그 본질’과 ‘그 존재’가 구별되지 않는 것이지만 그밖의 사물에서는 이것이 서로 구별되어 개개의 사물은 고유한 본질을 가지고 그것에 존재의 움직임이 부여되어 현실로서 존재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 본질과 존재의 구별은 현대의 실존주의 철학의 한 원천이다. 근대 과학에서 사물의 존재가 그 정의에 따라서 실체로서 파악되지 않고 그 우유적 움직임에 따르는 기능으로서 파악 되고 나서부터 본질의 개념은 불명확해졌다. 

칸트는 본질개념을 확대하여 본질을 존재자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즉, 감성적 존재자, 지성적 존재자, 이성적 존재자가 그것이다. 이성적 존재자는 인류와 이성에 의한 규정으로 정의할 수 있다.      

(1)인류의 규정으로 정의 될 때.      

칸트는 <인간학>에서 인간을 규정하여 “실로 인간은 이성능력을 부여받은 동물로서 자기 자신을 이성적 동물(animal rationale)이게끔 하는 존재자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는 아리스토텔레스 이래의 인간관인 “인간만이 로고스를 지니는  동물이다”라는 관념이 작용하고 있다. 로고스는 이성과 통한다. 그리고 이 규정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또 하나의 인간관, 즉 “인간은 본성적으로 폴리스적 동물(social animal)이다”라는 관념도 연관되어 있다. 즉 지상에서의 유일한 이성적 피조자로서의 인간에게 있어서 그의 이성 사용을 지향하는 자연소질은 개체에서가 아니라 유(類)에서만 완전하게 발전할 수 있다. 이것은 이성적 존재자로서의 인간은 동시에 세계시민이라는 것을 이상적인 상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2)이성에 의한 규정으로 정의될 때.      

“인간의 이성에 의한 규정은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하나의 사회를 형성함으로써 예술과 학술에 의해서 자기를 문화적으로 육성하고 문명 사회화하며 도덕화하는, 요컨대 자기의 동물적 성향이 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오히려 자연에서 유래하는 장애와 싸우고 능동적으로 인간성에 값하는 존재로 되는 것이다.” 이성은 사유능력으로서 본능과 충동을 초월하며 규칙의 능력으로서의 지성에 의한 현상의 규칙적인 인식에 대해서 그러한 인식들의 체계적 통일을 지향한다. 즉 이성은 지성의 규칙들을 원리 하에 통일하는 능력이다. 이성은 개인뿐만 아니라 또한 사회생활의 체계적 통일을 지향한다. 그 경우의 통일원리는 인간관계의 이법으로서의 도덕법칙이다. 이것을 자각함으로써 인간은 동물성은 물론 단순한 사회성으로서의 인간성을 넘어서서 인격성의 원리에 도달한다. 인간은 심리학적으로는 이런저런 상태들에서 자기 자신의 동일성(Identity)을 의식하고 있지만, 행위의 주체로서의 인격은 자기동일성의 의식에 더하여 자기의 행위에 책임을 돌릴 수 있는 주체이어야만 한다. 능동적으로 인간성에 값하는 존재로 되는 것, 내지 이성적 존재자로서의 인간에게는 이러한 ‘인격성’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오늘날 윤리적인 면에서 인간은 내적으로 자유의 존재로 나타나 이를 homo noumenan 이라고 한다.               

실체란 전통적인 유럽 철학의 기본개념으로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로 변화할 수 있는 성질, 상황, 작용, 관계 등의 근저(根底)에서 그것들을 받들고 있는 기본 존재를 말한다. 그리스어 우시아(usia)는 있다를 의미하는 동사 에이나이(einai)에서 파생된 말이며, ‘바로(틀림없이) 있는 것’을 뜻한다. 플라톤은 변전하는 가시세계(可視世界)의 근저에 있어 항상 변하지 않는 불가시(不可視)의 이데아를 우시아라고 생각하였다. 이데아(idea)란 플라톤 철학의 중심 개념으로 모든 존재와 인식의 근거가 되는 항구적이며 초월적인 실재를 뜻하는 말이다. 근대에는 인간의 주관적인 의식 곧 관념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었다. 그리스어 이데인(idein)은 보다, 알다라는 뜻에서 비롯된 말로 원래는 보이는 것,  즉 형태나 모양을 나타내는 말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보다라는 뜻의 동사 에이도(eido)에서 비롯된 에이도스(eidos)는 이데아와 의미를 구분해서 사용했다. 둘 다 형태라는 의미를 지니지만 에이도스가 구체적으로 현상되고 감각되는 사물의 형상(形象)을 가리키는 데 비해서 이데아는 육안이 아니라 마음의 눈으로 통찰되는 사물의 순수하고 완전한 형태를 가리킨다. 곧 이데아는 인간이 감각하는 현실적 사물의 원형으로 모든 존재와 인식의 근거가 되는 항구적이며 초월적인 실재를 뜻한다. 플라톤은 정신 곧 지(知)를 통해서만 이데아를 인식할 수 있다고 보았으며, 정신이 이데아를 발견하는 방식으로 세 가지로 제시했다. 첫째는 상기이다. 그는 인간의 영혼은 육체와 결합되기 전에 이미 이데아들과 친숙했다고 보았다. 따라서 인간의 영혼에는 이데아에 대한 지식이 선험적으로 존재하고 있으며 인간은 사물과의 감각적인 접촉을 통해서 망각되었던 사물의 본성에 대한 인식을 다시 상기 하게 된다는 것이다. 둘째는 변증(辨證)이다. 인간은 사물의 본성에 대한 지적인 탐구를 통해서 사물들의 상호 관계를 발견하고 사물의  본질을 추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셋째는 사랑(eros)이다. 어떤 특정 한 대상에 대한 사랑은 그와 유사한 모든 형상들에 대한 사랑으로 확장되고, 나아가 외형적인 것에서 정신적인 것으로 발전한다. 예로 지(知)에 대한 사랑은 인간의 인식을 항구적이고 보편적인 이데아의 세계로 단계적으로 이끌며 무지를 일깨우는 일에 참여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플라톤은 감각적 사물들로 구성된 가시적인 세계와 별도로 정신으로만 인식할 수 있는 이데아계가 객관적으로 실재한다고 보았다. 나아가 이데아야말로 궁극적인 참된 실재라고 보았다. 이러한 이데아론은 물질적 요소를 중심으로 세계의 본질을 이해하였던 그리스의 자연철학적 전통에서 벗어나 가치 중심의 형이상학적 철학의 전통을 낳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플라톤은 비물질적이며 항구적인 속성을 지니는 이데아가 참된 실재라고 주장함으로써 물질적 세계를 초월하는 절대적인 가치 판단의 기준과 진리가 존재한다고 보았다. 근대에 와서는 이데아는 인간의 주관적인 의식, 곧 관념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경험적 현실세계와 실증적 연구방법을 중시하는 경향이 확산되면서 점차 부정적인 의미로 인식되는 경향이 커졌다. 이는 이데아와 학문(idea + logy)이라는 뜻으로 나타난 이데올로기(Ideologie)라는 말의 의미 변화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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