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ㅇ혜 Oct 13. 2022

임마누엘 칸트의 코페르니쿠스 전회

비판 철학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는 칸트는 대륙의 합리론과 영국의 경험론 모두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초기에는 라이프니츠와 볼프(Wolff)의 철학적 입장을 취할 정도로 합리론에 심취했다. 라이프니츠와 볼프의 합리적 형이상학에 회의를 품고 영국 경험론 특히 ‘칸트를 독단의 잠에서 깨워 준’ 흄(Hume)으로부터 강력한 영향을 받은 것은 그 다음 시기였다. 합리론자는 경험과는 관계없는 초감성적 세계의 인식이나 학문으로서의 형이상학이라는 존재를 인정한다. 반면에 경험론자는 경험되지 않은 것이나 초감성적 실체는 알 수 없다고 주장하며 형이상학은 불가능 하다는 입장을 취한다. 결국 경험론과 합리론의 차이는 인식에 관한 관점과 인식의 성립 문제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칸트는 이러한 양대 사상의 종합을 시도한다. 칸트는 그의 저서에서 종래의 인식론과 형이상학에 날카로운 비판을 가하면서 새로운 관점에서 인식의 성립 문제와 참된 의식, 그리고 인간 인식의 한계를 논한다. 그는 자신의 입장을 선험적 관념론이라고 말한다. 그가 단순히 이성이라고 하지 않고 순수이성이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어떠한 제약도 개입되지 않은 이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인식되는 대상이 여러 가지 색깔을 띠는 이유는 그것을 인식하는 주체의 안경이 여러 가지의 빛깔을 담고 있는 색안경이기 때문이다. 그리 하여 칸트는 색깔 없는 안경, 즉 인식 주체의 순수이성을 비판한다. 칸트의 ‘코페르니쿠스의 전회’는 새로운 형이상학으로서의 이행을 명백히 밝히기 위한 것이다. 이는 형이상학이 어떠한 전제 아래에서 학문이 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을 주제로 삼고 있다. 칸트의 견해에 의하면 학문으로서의 형이상학은 “인간의 이성이 스스로의 경험에 의지하지 않고, 실재의 의미를 인식할 수 있는가?”하는 물음과 운명을 같이한다. 칸트는 형이상학은 논리학, 수학, 자연과학과 비교해 볼 때 아직 학문의 위치에 이르지 못했다는 생각에서부터 출발한다. 학문의 확실한 진보는 늘 새로운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학문의 개척자들 사이에 우리가 따라야 하는 방법에 대한 일치점이 존재할 때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칸트는 논리학은 그 정초자인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서 이미 학문의 위치에 도달했으며, 심지어 모든 점에서 이미 완결되었다고 보고 있다. 칸트가 과거의 논리학의 성과에 대한 설명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 성과란 이성은 그 자신의 고유한 능력, 즉 올바른 사유의 기본형식에 관계한다. 따라서 이성 외적인 대상영역은 부차적인 요소일 뿐이라는 것이다.       

형이상학도 하나의 학문이 되려고 한다면 이성이 갖고 있는 자발적인 능력의 궤도를 따라가야 한다. 그 당시까지는 사람들은 우리의 인식은 대상에 따라서 방향 지워져야 한다는 전제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대상이 우리 인식에 따라서 방향 지워져야 한다는 전제를 제시한다. 이것은 지구가 태양 둘레를 도는 공전에 대한 개념이 아니라 자기 축을 중심으로 회전하는 자전에 관한 개념이다. 움직이는 것은 별들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라는 뜻이다.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는 주변부로 물러남으로써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중심부로 들어가서 그곳으로부터 사물을 관찰하고 논의를 펼쳐갈 때 비로소 가능하다. 자연법칙은 자연 안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자연에 부과하는 것이라는 칸트의 형이상학적 전환은 이처럼 중심부로의 이행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따라서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회는 인간 중심적인 세계관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계에 대한 인간중심적인 관점을 해체하기 위한 진일보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코페르니쿠스가 인간을 실재 세계 속으로 옮겨 놓았다고 할 때, 칸트는 그 인간을 세계로부터 완전히 끌어내어 단순한 현상세계의 중심에다가 세워놓은 것이다.      

칸트는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회를 시도한 후에 보편타당한 인식은 어떻게 가능한가를 묻는다. 이것이 곧 순수이성비판의 주제이다. 여기에 대해 칸트는 먼저 분석판단과 종합판단을 구분한다. 분석판단은 물체는 연장(延長)을 갖는다와 같이 주어의 개념에 술어의 개념이 포함되어 있는 판단으로서 선험적으로 참이지만 지식을 확장 시키지는 않는다. 종합판단은 물체는 무게를 갖는다와 같이 주어의 개념에 술어의 개념이 포함되어 있지 않은 판단으로 지식을 확장시키지만 오로지 후험적으로만 참이다. 분석판단은 경험을 확장시키지 않기 때문에 설명판단이라고도 하며, 종합판단은 경험을 확장시키기 때문에 확장판단이라고도 한다. 칸트는 지식을 확장시키면서도 선험적으로 참일 수 있는 판단을 문제 삼고 있다. 이것이 선험적 종합판단이다. 칸트에 의하면 이런 종류의 판단은 실제로 존재한다. 칸트는 선험적 종합판단의 예로서 수학적인 판단을 제시한다. 2+5는 의심할 바 없이 7이라는 점에서 선험적이며, 2+5라는 개념에는 7이라는 개념이 들어 있지 않고 또한 경험적인 계산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종합판단이다. 요컨대 수학의 명제들(산술과 기하학)과 인과율로 대표되는 자연과학에서의 기본원리들이 그것이다. 순수이성비판은 이들의 명제들이 어떻게 해서 성립 할 수 있는지를 해명하고자 한다. 

칸트는 학(Wissenschaft)으로서의 판단은 선험적 종합판단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참다운 인식은 보편적이며 필연적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보편타당한 인식은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질문은 ‘선험적 종합판단은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질문과 동일시된다. 선험적 종합판단은 칸트 비판철학의 중심 개념이다. 칸트에 의하면 형이상학의 성립 여부는 이 개념의 가능성의 해명에 달려 있다. 그러나 이 개념은 칸트 철학 내부에서만이 아니라 철학적 분석 일반에서도 그 가능성을 둘러싸고 광범위하게 논의의 주제가 된 보편적 의의를 지닌 개념이다. 그 문제성은 오늘날에도 상실되지 않고 있다. 선험적이라는 용어는 오늘날에는 대략 ‘경험에 앞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경험에 대한 시간적 선행이나 논리적 선행을 의미 할 수 있지만 철학적으로 좀 더 중요한 것은 후자의 의미이다. 따라서 철학적 의미에서의 선험적 판단(내지 언명)은 대략 '그 참과 거짓이 특정한 경험을 참조하지 않고서 알려질 수 있는 판단'으로서 특징지을 수 있다. 


과거의 철학은 인간에게 전혀 올바르지 못한 자리를 부여하여 인간을 세계 또는 외부사물과 상황에 완전히 의존하는 기계가 되게끔 했다. 과거의 철학은 인간을 세계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나 이성비판이 등장하여 세계 속의 인간을 처음부터 끝까지 능동적인 존재로 규정했다. ‘인간은 그 자신이 근원적으로 그의 표상과 개념의 창조자이며 그의 모든 행위의 창시자’이여야 한다. 이러한 칸트의 사상은 인간 각자가 자체적 목적으로서 존재하는 존엄한 존재라는 생각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너무도 다양하고 각자 다양한 자기 목적에 의해 살아가고 있다. ‘각자 존엄한 사람들이 어떻게 공존할 것인가?’ 칸트는 이것을 고민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현대 민주주의 사회의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칸트철학을 흔히 비판철학이라고 일컫는데 여기에서 비판이란 가능근거를 따져 묻는 것, 즉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되묻는 것이다. 순수이성비판의 문제의식은 ‘인간은 보편적인 진리를 도대체 어떻게 알 수 있는가?’이다. 그에 대한 대답은 바로 경험을 바탕으로 인간지성의 능동적이고 자발적인 능력 또는 형식을 통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인식주체의 능동적, 자발적 능력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칸트철학은 그 어느 것에도 의지하지 않고 ‘감히 스스로 생각하는 주체’의 철학적 완성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이 자연적인 세계뿐만 아니라 형이상학에도 적용 되는가? 칸트는 이러한 질문에 대해 부정적이다. 우리의 오성은 판단과 추론을 하며 이 모든 것을 이성으로 집약된다. 이성은 ‘추리작용’을 하기도 하는데 우리의 이성은 그 본질상 무조건적인 또는 무제약적인 것, 즉 물자체에로 접근하려고 한다. 이러한 충동은 결국 형이상학으로의 접근이다. 그러나 이성에게는 비감성적 주관 내지는 초감성적 주관이 없기 때문에 영혼, 세계, 신에 대한 어떠한 명제도 우리의 이성으로는 확실히 증명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혼, 세계, 신에 대해서는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다. “인간의 이성은 자신이 거부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대답할 수 도 없는 문제로 괴로워하는 운명이다. 거부할 수 없음은 문제가 이성 자체의 본성에 의해 이성에 부여되어 있기 때문이며, 대답할 수 없음은 그 문제가 이성의 능력 바깥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이성은 위와 같이 스스로는 대답할 수 없는 문제를 끈질기게 던진다. 예를 들면 전통적인 형이상학적 질문인 신(神)의 존재, 영혼의 존재에 관한 질문들이다. 신이나 영혼의 존재여부는 경험을 통해 알 수 없기 때문에 칸트의 비판철학에 따르면 학문의 주제나 지식의 대상이 결코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칸트는 신과 영혼의 문제를 앎의 영역이 아니라 삶의 희망과 행복의 영역에서 다시금 말한다. 우리는 때로 악한사람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고 선한 사람이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럼에도 ‘우리는 왜 도덕적 행위를 통해 최고선의 이념을 추구해야 하는가?’ 칸트에게 신은 선한 삶을 위해 요청되는 신이다.     

비판철학에서 칸트는 ‘인간이란 무엇인가?’가 근본문제라고 말한다. (1)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Was kann ich Wissen?) (2)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Was soll ich tun?) (3)나는 무엇을 희망해도 좋은가?(Was darf ich hoffen?) (4)인간이란 무엇인가?(Was ist der  Mensch?) 이 네 번째 물음이 (1)-(3)의 모두를 포괄하고 있다. 비판 철학에서의 인간은 다음과 같은 존재이다. 인간은 이성이다. 이성은 상위능력으로서 지성과 감성을 통제 하에 두고 감성의 시간과 공간을 직관 형식으로 하는 현상 수용과, 지성의 순수 지성 개념(범주)의 발동에 의한 협동을 수행시켜 인과적 인식을 산출하는 능력이다. 인식에 관한 칸트의 대답은 우리는 사물자체는 알 수 없고 오직 현상 만을 알 뿐이다. 다시 말하면, 이성은 자기비판의 능력을 지니기 때문 에 신, 내세(영혼의 불사), 자유에 대해서는 단언을 자제하지만 실천적 사용에 있어서는 그러한 제한을 넘어서는 권능을 스스로 인정하고 도덕법칙(정언명법)의 정립자가 된다. 인간은 이성의 확장으로서 판단력을 지니며 판단력은 자연의 궁극목적에 관해 ‘인격으로서의 인간의 완성에 있다’고 판단한다. 인간은 오직 이성자신의 명령에 따르는 행위만이 진정으로 자율적인 행위이며 그런 한에서 인간은 완전히 자율적인 인격적 존재가 된다. 인간이 희망할 수 있는 바는 이 세계가 아름답고 조화로운 합목적적인 질서를 가진 세계라는 것이다.     


“해를 거듭하고 원숙해지며 사려 깊게 된 자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좀 더 좋은 조건에서 살 수 있게 된 경우에도 다시 한 번 젊어지는 것을 선택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은 많은 세월을 거친 것을 기뻐하는 자이다. 인간은 가능한 한 오래 살 것을 바란다. 다만 좋은 조건하에서. 그것은 맡겨진 인생에 대한 공덕으로 간주할 수도 있고 의무로 취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몇 백 년이라는 오랜 삶이 가정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섭리의 호의라고 생각할 수 없는바 인간에게 있어 위험한 시련으로밖에는 생각되지 않는다.”       


이것은 아주 늦은 만년의 칸트의 인간학적 고백으로서 깊은 운치를 지닌 것으로 여기에 적는 바이다.






이전 01화 의식과 주관(subject)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