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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ㅇ혜 Oct 13. 2022

임마누엘 칸트의 자유

근대 시민 사회에서 말하는 자유란 다름 아닌 개인의 자유를 지칭한다. 이때 개인이란 개체로서의 인간을 말한다. 서양에서 이 같은 의미에서의 자유 개념은 근대에 와서야 부각되었다. 개인 주체의 개념이 없는 곳에서 자유 개념은 형성될 수 없는바, 한 사람의 성장 과정에서도 주체성에 대한 의식은 사춘기에 이르러서나 뚜렷해지듯이 인류의 역사에 있어서도 개인 주체의 개념은 상당 기간의 문화 체험을 한 근대에 이르러서야 형성되었다. 

오늘날 개인은 개체로서의 인간이자 행위 주체로서의 인간으로 이해되는 것이 보통이다. '개체란 무엇인가?' 개체란 헤아려 셈할 때의 최소 단위, 더 이상 무엇으로 환원될 수 없는 것, 더 이상 분할 될 수 없는 것(individuum), 하나인 것(monade)을 뜻한다. 그러므로 개체란 독특한 성격을 가진 존재자, 다시 말하면 그것이 가진 독특성의 전체가 다른 어떤 것과 동일한 것이 되지 않는 그런 존재자를 지칭한다. 좀 더 포괄적으로 말하자면 ‘개체란 분할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어떤 것이 이제까지 그것이었던 바의 것이기를 중지하지 않는 한, 분할되어서는 안 되는 그런 것이다.’ 이런 뜻의 개체 개념에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이기는 하지만)주체 개념을 결합시킨 것이 아리스토텔레스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개체는 진정으로 존재하는 실체이자 문장에서 주어 자리에 놓이는 주체다. 개체는 다른 것과 구별된다는 의미에서는 개별자이다. 이 개체, 곧 개별자에 대립하는 철학적 개념은 보편자(보편적인 것)이고 개별자/보편자라는 양상을 이룬 개념은 '무엇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인가?'라는 철학적 질문을 풀어가는 데 지침의 역할을 한다. 예컨대 이 사람, 그 사람, 공자, 이율곡이 개별자라면 사람은 보편자이다. 이 경우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공자 또는 이율곡인가, 아니면 사람인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어떻게 파악 하느냐에 따라 두 갈래로 나뉜다. 보편자가 실재함을 주장하는 이들은 실제로 있는 것, 참으로 있는 것이란 불변적인 것을 뜻하며 불변적인 것은 어떤 것의 본질인 것, 즉 어떤 것의 그 무엇임을 드러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율곡이 소년이었을 때든 장년이었을 때든 그가 관청에서 사무를 보든 학문적 담화 중에 있든 그는 사람이며 이율곡을 무엇이게 만들어 주는 것은 사람이라는 성격이므로 사람은 이율곡의 본질이고 그러므로 사람이야 말로 실제로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에 반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제로 있는 것은 이율곡이라는 개별자(개체)이며, 이른바 사람이라는 보편자란 종(種)이나 유(類)개념으로서 개별자에 속하는 성질이라고 이해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실제로 있는 것이란 그것 없이는 여타의 것들은 전혀 있을 수 없는 것, 그것을 제거하면 여타의 모든 것들이 제거 되어 버리는 것, 이것들이 없다면 도대체가 아무것도 있지 않게 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그것은 존재론적으로는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밑바탕에 놓여 있는 것(基體)이며, 언표(문법)적으로는 주어가 되는 것이다. 이것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시아 또는 낱말 뜻 그대로를 살려 휘포케이메논이라고 불렀는데 이것이 라틴어로는  substantia(실체) 또는 substratum(基體), subiectum(주어, 주체) 등으로 번역되어 오늘날의 여러 서양어 유래가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실체는 개체이며 보편적인 것은 이 개체의 속성으로서 개체가 없으면 더 이상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 밑바탕에 놓여 있는 것이 언표에서는 주어가 된다. 주어란 그것에 관해서 여타의 것이 말해지나 그 자신은 어떤 다른 것에 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닌 것을 말한다. 그런 까닭에 언표에서 주어/주인 말은 존재에서 주체/실체이며 이 주체를 중심에 두고 이 주체가 무엇이고 어떠한가를 드러내 주는 말인 술어는 객어로서, 그것은 존재적으로는 주체에 귀속되고 수반되고 담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언표에서 주어/술어의 관계는 존재에서는 실체/속성의 관계가 된다. 일상의 언표에서는 물론 보편자도 주어 자리에 놓인다. 가령 사람은 말한다에서 주어인 사람은 보편자이다. 그러나 이 언표가 형성된 과정을 추적해 보면 최종적인 주어는 개별자임이 드러난다. 사람은 말한다는 언표는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한다, 이율곡은 말한다 ...... 그런데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이율곡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일반화하면) 사람은 말한다를 줄인 것으로 볼 수 있다. 언표에서 최종적인 주어가 개체인 만큼 주어 자리에 올 수 있는 것은 무수하게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실체 혹은 주체는 무수하게 많다. 그리고 이 개체는 개별적인 사람뿐만 아니라 일체의 개별적 사물도 지칭한다. 예를 들면 이 돌은 단단하다, 저 소나무는 푸르다, 저 바다는 깊다 에서 이 돌, 저 소나무, 저 바다 모두가 실체 이며 주체이다. 무수히 많은 개별적인 사물이 실제로 있으며 주체라는 생각은, 서양 중세의 신이 자연 만물을 창조했다는 기독교의 철학적 신학과는 다른 길을 걷게 된다.

자연 만물을 창조한 자로서 신이 있다면 신은 자연 만물의 근원이요, 근거이며, 자연 만물의 밑바탕에 놓여 있는 것이고 이런 뜻에서 신은 자연 만물의 주(主)요, 기체(基體)이며, 주체(主體)이고 실체(實體)이다. 그러므로 자연 만물 곧 모든 개체들은 주체인 신의 산물로서 신의 맞은편에 자리를 얻은 것, 즉 객체이며 객으로서 주인에게 의존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개체들은 주체인 신 없이는 그 존재를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만물을 창조한 자로서 ‘신이 주체라는 것은 무엇을 함축하고 있는가?’ 그것은 주체는 하나(一者)이며, 오직 정신(精神)이라는 것이다. 피조물은 모두 객(客)이고 객체이며 그것을 지어낸 자에게 의존되어 있다고 이해된다. 그리고 낳고, 낳아짐의 관계를 궁극에까지 소급 추적해 갈 때 결국 최초의 생산자가 있을 것이고 최초란 하나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따라서 주체는 오로지 하나 뿐인 것으로 이해된다. 이 하나인 주체는 모든 존재자에게 존재를 부여하기도 하고 거둬들이기도 한다. 그리고 일정한 질서, 원리, 형식과 변하지 않는 원칙들에 따라 계획성을 가지고 있다. 신은 무엇에 의존함이 없이 오로지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신의 뜻에 따라 만물을 지어내고 그것들의 생성변화를 주재(主宰)하는 것이다. 그의 활동이 창조라고 말하여지는 것은 그런 까닭이다. 그러므로 만물의 중심이고 주체인 신은 세계의 시작점이고 질서 원리이며 질서 그 자체이다. 따라서 실체의 현존재성은 창조(creatio)이다. 이런 의미에서 신은 도(道, 말씀, logos)자체이며, 이성(理性, ratio) 자체, 바꿔 말해 순수 이성(ratio pura)이다. 

신은 또한 자신의 생각대로 자신의 뜻에 따라 자연 만물을 기획(企劃)하여 기투(企投)적으로 지어낸다는 의미에서는 의지 자체, 즉 자유 의지로 이해된다. ‘진정한 의미에서 자유(自由)란 무엇인가?’ 그것은 문자 그대로 ‘자신으로부터 비롯함’이다. 자연 만물이 그 존재 생성에서 무엇인가 타자로 부터 비롯한 것이라면 신은 그리고 오직 신만이 자신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요, 비로소 그로부터 만물이 생겨난 것이니 신은 있지 않던 것을 있도록 하고 이미 있는 것을 달리 있도록 하고 있는 것을 없도록 할 수 있는 능동적 활동 자체이며 이런 뜻에서 의지 자체, 곧 자유 의지인 것이다. 이로부터 주체의 새로운 의미가 분명하게 드러났다. 그것은 언표에서 밑바탕에 놓여 있는 것(主語, 基體)일 뿐만 아니라 참으로 존재하는 것(實體)이다. 이 말은 그것이 이성이며 자유 의지임을 뜻하는 것이다. 이런 주체의 성격에 어울리는 명칭은 정신이다. 따라서 어떤 물질적인 것에서도 물질과 정신이 성격상 뚜렷하게 구별되었다. 주체라는 이름은 부적절한 것으로 납득되었고 만약 주체가 있다면 그것은 오직 정신적인 것이어야만 함이 자명한 것으로 여겨졌다. 이 같은 신, 주체 개념은 계몽주의와 더불어 인간 주체 개념으로 대치되었고 그에 따라 자유도 새로운 의미를 얻게 되었다.      


홉스는 자유란 물리적 강제로부터의 벗어남이라고 규정했다. 이로부터 정치, 사회적으로 중요한 자유 개념이 나왔다. 이런 규정 속에는 오늘날 흔히 통용되는 해방이라는 자유의 소극적 의미와 함께 적어도 두 가지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자유롭다는 말이 적용될 수 있는 것은 자연적(물리적, 신체적) 개체라는 것과 그런 한에서 그것은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는 것을 말한다. 홉스는 “보다 더 다양한 길을 걸을 수 있는 사람은 그 만큼 더 자유롭다”고 인간의 자유를 상대적으로 고찰한다. 인간이 신체적 존재자인 한 그가 시민이든 노예이든 단지 그의 자유로움에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라고 보았다. 이 같은 홉스의 생각을 잇는 경험주의자들은 인간을 근본적으로 감성적인, 정념적인 존재자로 파악하고 자유를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음으로 이해했다. 따라서 자신의 경향성을 억압하는 사람은 경향성을 따르는 사람보다 더 자유롭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리 자유로운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의 경향성에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요소가 들어 있는 한 그는 일정 부분 경향성을 좇을 수밖에 없는 것이고 그런 한에서 그의 행동은 부분적으로 결정되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행동은 상당부분 심리, 생리적으로 결정되어 있다는 생각의 표명이다. 데카르트와 같은 초기 이성주의적 계몽주의자들은 이성을 인간의 의식 양태 일반이 아니라 종래 신적 이성을 본질로 이해했다. 그리고 이것을 보편적인 세계 질서 원리라고 파악했다. 인간은 세계 질서의 원리인 한에서 분명히 주체이기는 하지만 인간은 정신으로 간주된 보편자였다. 이 정신을 로크는 정신들로 복수화 함으로써 인간은 이성을 가진 정신적 존재자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한 가지의 존재자가 아니라 서로 구별되는 여럿의 존재자임이 명시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이 이성적 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동물임을 강조한 것이다. 인간이 이성적이라는 것은 신처럼 이성적이라는 것이 아니라 동물이면서 이성적이라는 것을 뜻한다. 즉 신체를 가진 이성적 존재자임을 말하는 것이다. 인간은 신체를 가진, 그로써 피가 흐르는, 욕구를 가진, 감정을 가진 존재자 이고 이 점에서 한 인간은 분명히 다른 인간과 구별되는 개별자로서 존재한다. 

칸트 역시 이런 인간의 존재 성격을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써 기본적으로는 인간 본성에 대한 감각 경험주의적 입장을 취했다. 그러나 칸트는 인간은 동물임에도 불구하고 순수 실천 이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자유의 힘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다시 말해 인간은 자연적, 곧 동물적 경향성을 벗어나 자신이 세운 당위의 도덕 법칙을 준수할 수 있는 힘, 곧 자율(自律)적인 힘을 가지고 있으며 그런 한에서 인간은 그 동물성에도 불구하고 신성하다고 보았다. 홉스가 동물로서의 인간이 그 동물성으로 인해 어느 행위에 있어서나 완전한 의미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으며 즉, 무엇이나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다 할 수는 없다고 파악 했다면, 칸트는 인간이 무엇이나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다 할 수는 없지만 자연적 경향성으로부터 벗어나 도덕적 행위를 할 수 있다고 보았다. 즉, 자연 법칙의 예속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점에서 자유롭고 그런 한에서 동물성 이상의 것, 곧 인격성을 가지고 있다고 파악함으로써 자유의 또 하나의 의미를 발견했다고 볼 수 있다. 이 같은 맥락에서 오늘날 자유는 ‘~으로부터 벗어남’이라는 소극적 의미 외에 ‘스스로에서 비롯함’이라는 원래의 적극적인 뜻 아래에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함’이라는 의미와 함께 자신이 세운 법칙에 자신을 종속시키는, 즉 ‘자율적임’이라는 의미를 가지게 된다. 칸트 철학에서 자유의 문제는 영혼의 불사 및 신의 존재와 더불어 세 개의 이념 도식으로서는 실천 이성의 요청이다. 다른 이념이 인간에게 있어 초월적인데 반해, 오직 자유만은 내재적이다. 근본적으로 인간 이성의 자유로운 정신에 입각한 철학으로서의 칸트의 비판철학은 넓은 의미에서 자유의 철학으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유 개념은 그것의 실재성이 실천 이성의 명증적인 법칙에 의해 증명되는 한에서 사변 이성도 포함한 순수 이성의 전체 체계의 중심축을 이루고 있다. 사변 이성에서 한갓된 이념들로서 떠다니고 있는 다른 모든 개념들(신 및 불사의 개념)은 자유의 개념에 연결되어 있으며, 자유의 개념과 함께, 자유의 개념에 의해서 부동의 객관적 실재성을 얻기 때문이다.      


칸트에서 자유는 5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1)초월론적 자유.      

우선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세계의 사건을 설명하기 위한 인과성(원인성)의 하나로서 자유(자유에 의한 원인성, 자유로부터의 원인성)를 고찰한다. 그것은 고찰의 대상을 자연적 세계로부터 도덕적 세계로 전개함과 동시에 사유하고 인식하는 이론적인 초월론적 주관(주체)으로부터 의지하고 행위 하는 실천적인 도덕적 주체에로 전환하는 것이다. 칸트의 자유론은 기본적으로 초월론적 자유와 실천적 자유에 관한 논의에서 성립하고 있다. 칸트가 이론적인 사변적 관점에서 세계의 사건을 설명하기 위한 출발점에서 상정한 인과성으로서의 자유란 자연에서 현상의 계열을 절대적으로 시작하게 할 수 있는 원인인 절대적 자발성으로서의 초월론적 자유이다. 모든 사건의 제1원인이자 자기원인인 절대적 자발성은 탁월한 의미에서 자유의 본질이다. 그것은 자연과 현상을 규정하는 초월론적 자유의 적극적 측면을 지님과 동시에 경험적 원인에 영향 받지 않는 자연적 세계로부터의 독립성을 의미한다. 초월론적 자유 그 자체는 모든 경험적 사건을 초월해 있기 때문에 초시간적이며 시간에서의 사건 일체를 절대적으로 시작 하게 할 수 있는 근원적인 활동능력이고 현상계에 대한 새로운 결정성의 근거이다. 이러한 자기원인적인 근거, 제1원인인 근거로서의 자유는 비판철학에서는 교조적인 형이상학적 실체에서 자유의 근거를 인정할 수 없다. 그리하여 칸트는 초월론적 자유의 근거를 동일한 하나의 대상을 두 개의 서로 다른 관점, 즉 현상 및 사물 자체로서 고찰하는 이원론적 구별 안에서 나아가 사물 자체적인 예지적 원인과 현상적인 경험적 결과의 관계 안에서 찾았던 것이다.     

(2)인간의 주체적 자유.      

칸트는 실천적 행위 주체로서의 인간 안에서 자유의 탁월한 의의를 인정했지만 이미 이론적 통각의 주체인 인간에게서도 자유의 근거를 간취했다. 인식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에 의해서 범주를 통해 대상을 규정하는 인식 주체의 사유작용이 이미 자발성, 자기 활동성이라는 자유의 특징을 지니는 것에서 명확해지듯이 이론적 사유 주체는 경험될 수 없는 초감성적 존재자, 즉 예지자이다. 셸링은 인간적 자유의 특수성을 명확히 규정하고 인간적 자유와 자유 일반의 종차를 제시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관념론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칸트를 비판했지만 칸트 자신은 자유 일반의 초월론적 원리를 행위 주체로서의 인간 의지의 자유에 적용하는 형태를 취하여 이론적 자유로부터 실천적 자유로 나아가는 길을 걸어간다. 그리하여 자유는 행위 주체의 예지적 성격으로 되지만 이 성격은 이미 존재하는 사물적인 대상적 성격이라고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장래의 자기형성적인 주체적 과제로서 파악되어야만 한다. 이러한 칸트의 자유개념은 실존철학과도 일맥상통하고 있다. 자유의 문제는 특히 프랑스 현상학에서 자주 다루어져 왔지만 맥락은 전적으로 다르다. 인간 자유의 절대적 성격을 강조하는 사르트르의 철학은 자주 자유의 철학으로서 특징지어진다. 하지만 사르트르가 말하는 자유란 자신이 바라는 것을 실제로 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의 자유가 아니라 행위의 목적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의 선택의 자유이다. 사르트르가 말하는 선택은 실제의 행위의 수행을 수반하지 않는 몽상, 원망, 변덕 등과는 다르다. 실제의 행위가 성공하는가 하지 못하는가는 거기에서 발견되는 즉자의 저항률 등의 우연적인 조건에 의존하지만 중요한 것은 선택이 반드시 행위의 수행과 결부된 것이라는 점이다. 그 선택이 대자의 자유로운 선택인 한에서 자유가 훼손되는 일은 결코 없다. 우리는 호불호와 관계없이 언제나 무언가의 목적을 선택할 수밖에 없으며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자유라는 형벌에 처해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현실에 대한 관계를 결여한 관념적인 자유가 아니다. 자유는 방종과 같은 뜻이 아니라 언제나 책임과 결부되어 있다. 메를로퐁티는 이와 같은 절대적 자유에 대해 상황이 부가된 자유를 대치시킨다. 그에 의하면 인간은 무로부터 자유롭게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이미 자신의 정립되어 있는 상황으로부터 출발하여 선택할 수밖에 없다. 더 나아가 그때의 선택은 의식적으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전의식적 방식으로 행해진다. 그는 계급의식의 향상과 혁명적 결단의 기술에 의해 상황에 휘말려 있는 가운데 행해지는 자유로운 선택의 양의적인 성격을 예증하고 있다. 

칸트에서 예지체란 현상체와 양상개념이며 본체라고 번역되기도 한다. 양상 개념의 기원은 플라톤의 이데아(idea)와 에이도스(eidos)에 놓여 있으며 거기서는 각각 정신(누스)에 의해서 인식되는 것과 감각에 의해서 지각되는 것을 의미했다. 플라톤에서는 바로 전자의 세계에 진리가 놓여 있으며 후자의 세계는 가상에 지나지 않았지만 순수이성비판의 칸트는 이러한 관계를 역전시킨다. 요컨대 감성적 존재자로서의 현상, 즉 현상체의 세계쪽이 인간의 인식에 있어서는 진리의 세계이며 지성적 존재자로서의 예지체에 대해서는 사고할 수 있긴 하지만 객관적 인식은 불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현상체와 예지체의 관계가 실천철학에서는 일변한다. 여기서는 무엇보다도 자유에 의한 원인성이라는 경험적 세계에는 적용할 수 없는 예지체의 적극적 의의, 즉 실천적 실재성이 확증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예지체가 현실성에 기초했을 때 도덕법칙이 발효되며 행위의 결과가 현상체의 세계에서 실현된다. 따라서 칸트는 이성의 실천적 사용에서는 인간이 두 개의 세계에 소속한다는 사실을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3)실천적 자유.      

이론이성의 과제는 자연이 어떠한 존재방식을 취하고 있는가에 대한 사실적 구명으로서의 존재의 사항이지만 실천이성의 사명은 인간이 무엇을 이루어야만 하는가를 분명히 하는 것으로서의 ‘당위의 사항’이다. 나아가 당위의 명령은 존재의 사실적 구명과는 근본적으로 다른바, 존재라는 이미 이루어진 사실에 만족하지 않은 채 세계의 상태를 변화시키도록, 즉 ‘존재해야만’하는 것을 실현하도록 행위 주체에게 강요한다. 일반적으로 인간이 어떤 행위를 수행 할 수 있기 위해서는 그 행위를 의지하고 의욕 할 필요가 있지만, 당위의 명법은 의욕에 대해서 척도와 목표를 주거나 금지와 신용을 가져다준다. 당위의 가장 전형적인 것이 도덕법칙이다. 예를 들면 후회의 현상과 양심의 가책 등은 인간이 도덕법칙에 반하면서도 구속되어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으며, 이러한 구속성으로서의 당위의 자각(의무의 의식)이 실천적 자유의 객관적 실재성을 실증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초월론적 자유는 실천적 자유의 존재근거이고 후자는 전자의 인식근거이다. 또한 전자는 자유의 권리문제에 관계하며 후자는 자유의 사실문제에 관계하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에 의해서 현실적으로 행사되고 자각적으로 체험되는 자유는 실천적 자유 이외에는 있을 수 없다. 칸트에 따르면 자유에 기초하는 것, 자유에 의해서 가능한 것, 자유로운 의지(선택의지)에 관계하는 것은 모두 실천적이다. 따라서 실천적 자유란 의지(선택의지)가 감성의 충동으로부터 강제로 독립해 있는 것이지만 인간의 의지는 단순한 동물적 의지가 아니라 자유로운 의지이다.     

(4)도덕적, 자율적 자유.      

일반적으로 실천적이라는 것이 곧바로 도덕적이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칸트 자신은 <인륜의 형이상학의 정초>와 <실천이성비판>에서 양자를 같은 뜻으로 하고 있으며, <순수이성비판>과 <판단력비판>에서는 실천과 자유의 개념을 넓은 뜻으로 이해하고 있다. 칸트에서 실천적 자유란 의지가 도덕법칙 이외의 어떠한 것으로부터도 독립(자유)하게 된다. 이러한 의지의 자율 사상은 “스스로 부과한 법률에 따르는 것이 바로 자유로운 것이다”라는 루소의 사회계약 사상에 대응하고 있다. 자유로운 의지와 도덕법칙에 따르는 의지는 반드시 동일한 것일 수밖에 없고 자유로운 의지란 선에의 의지, 선한 의지이며 실천적 자유란 선을 향한 자유인 것이다. 실천적 자유, 즉 도덕적 자유는 각 사람의 사적 행동규범으로서의 의지의 준칙과 보편적인 도덕법칙의 합치 없이는 불가능하다. 실천적 자유 역시 초월론적 자유에서의 양면성에 상응하여 소극적으로는 일체의 감각적 충동과 경험적 욕망에서 독립하며 적극적으로는 도덕법칙만을 유일한 규정근거로 함으로써 의지의 준칙이 도덕법칙을 채용하는 데서 성립한다. 그러므로 의지의 자율은 초월론적 자유의 한 측면으로서의 절대적 자발성의 실천적 구체화에 다름 아니다. 의지의 자율은 칸트 윤리학의 가장 중요한 개념이며 또한 이러한 자율이야말로 이성적 존재자로서의 인간에게 존엄을 부여하는 바로 그것이다. 인간은 자율에 의한 의지의 자기입법에 의해서 ‘목적 그 자체’가 되며 그런 한에서 인간은 존엄하며 단지 수단으로서만 다루어 져서는 안된다. 인간의 존엄의 근거가 인간의 자유에 있다 하더라도 이 자유는 자율로서의 자유이며 적극적 의미에서의 자유이다.     

(5)악에 대한 자유.      

칸트의 <단순한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에서는 악에 대한 자유의 문제가 논의되고 있다. 도덕적, 자율적 자유의 개념만으로는 자유문제를 남김없이 다 다룰 수는 없다. 여기서 자유란 선한 준칙의 채용 또는 악한(반법칙적) 준칙의 채용이 우리에게 있어 끝까지 다 밝히기 어려운 제1근거인바, 선/악의 두 방향 모두에 대한 동근원적인 능력으로서 자유가 부각된다. 그러나 칸트는 악에 대한 자유의 문제에 관해서도 도덕법칙을 중심으로한 실천철학의 틀을 무너뜨리고자 하지 않는다. 즉 악은 어디까지나 도덕법칙에 따라야만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따를 수 없는 것이며 도덕법칙이 선/악 판정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악이란 의지의 준칙이 도덕법칙에 합치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의지(자유)의 남용이자 오용이며, 선이란 의지(자유)의 정당한 행사이다. 선과 악에 대한 동근원적 능력으로서의 종교적 실존적 자유의 관점과 도덕적 자율적 자유의 관점은 차원의 다름을 전제하지 않으면 논리적으로는 모순된다. 악이라고 하더라도 자기의 자유의지에 의해서 이것을 이룬것이기 때문에 행위주체는 악한행위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된다. 따라서 칸트는 인류의 유전적 악인 원죄를 모든 경험적, 현실적 악을 가능하게 하는 초감성적 근거 즉 예지적 행위로서의 근원 악으로 내재화하고, 어디까지나 자기의 의지 자유의 행사에 관한 사항인 자기책임의 문제로 규정했다. 칸트에서 윤리는 자연이 아니라 자유의 영역에 관계하며, 윤리학은 인간의 자유로운 욕구능력으로서의 의지가 구현하는 선 내지 악의 양상을 탐구한다. <정초>의 서론에 따르면 선험적인 원리들을 다루는 순수 철학에는 자연의 형이상학과 인륜의 형이상학이 있다. 인륜의 형이상학에 경험적 부문을 접합시킨 학문체계가 넓게 윤리학이라고 총칭되며 이것은 도덕철학이라고도 말해진다. 도덕철학은 행위와 마음가짐에 관한 선/악의 가치판단, 성스러운 것과 신성의 광채로 빛나는 인격에 대한 존경의 감정, 인격에서의 악마적인 것의 표출에 대한 거부의 감정 또는 양심의 작용, 특히 자기의 죄의 경험에서의 양심의 작용 등은 도덕적 현상이다. 이러한 도덕적 현상들은 인간의 근원적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보통은 이러한 현상의 철학적 설명 내지 해명이 도덕철학이라고 불린다. 칸트의 도덕철학은 대체로 도덕적 선은 감성에 의한 의지규정이 아니라 이성에 의한 의지결정에서 추구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칸트는 도덕철학을 언표하기 위해 ‘도덕’(Moral)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도덕이란 윤리학의 이성적인 부문이다. 물리학에 이성적 부문과 경험적 부문이 있듯이, 윤리학에도 두 부문이 있다. 윤리학의 경험적 부문을 특히 실천적 인간학이라고 불린다. 그것은 경향성과 성벽, 쾌와 불쾌의 감정 또는 그밖의 감각론적 표상과 같은 경험적인 것에 대한 고려를 포함하기 때문에 그렇게 불리는 것이다. 그것은 이성적 존재자 일반 가운데서 특히 감성계에 몸을 두는 존재자, 즉 인간에게 주목하는 한에서의 윤리학인 것이다. 그에 반해 윤리학의 이성적 부문이 본래 도덕(도덕철학)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따라서 칸트의 도덕철학은 특수한 이성적 존재자(인간)에게만 타당한 준칙을 확정하는 것이 아니다. 이성적 존재자 일반에게 타당한 선의지의 원리를 도덕의 근본법칙으로서 정식화하는 것이다. 또한 이론적인, 경험적인 인식으로부터 그것을 이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순수이성 그 자체의 활동 속에서 그것을 찾아내고자 한다. “세계 안에서, 아니 원래 세계 바깥쪽에서도 무제한으로 선하다고 간주될 수 있는 것은 선의지 이외에는 아무것도 생각될 수 없다.” 그러므로 도덕철학의 과제는 어떠한 의지가 선한가에 대한 탐구이다. 그것은 이성적 존재자의 이성적 본성에만 토대하는 고찰이다.      


의지(意志)의 일반적 개념은 단순한 자연적 요구에 입각한 자발적 행동이 아니라, 의도에 입각하여 자기결정을 하는 목적 추구행동을 일으키는 작용이다. 협의로는 이 중에서도 특히 의식적, 계획적 또는 자발적 자유선택적인 행동의 근거를 말한다. 일반적으로 인간정신은 지식, 감정, 의지의 세 가지 기본요소로 이루어졌는데 이 중에서 의지가 그 근본을 이루고 지식과 감정은 그 상부기능이다. 

유기체의 활동은 언제나 목적 실현의 과정이며 이러한 활동을 의지 활동이라 하고 그 활동의 근거가 되는 것을 의지라고 부른다. 의지는 반드시 동기와 목적이 있다. 따라서 좁은 뜻에서는 유의작용(有意作用)을 넓은 뜻에서는 충동(衝動)까지가 이에 포함된다. 정신분석학에서는 생명의 무의식적 발동을 말하며, 그것은 무의식의 깊은 바닥에 있는 것일수록 기계적(인간적인 감정이나 창의성이 없이 맹목적, 수동적으로 하는 것을 말하며 이 결과 현대인은 사회의 거대한 메커니즘의 한 부속적 부품으로서 기계적 인간이 되고 평균인이 된다)이며, 의식 표면 가까이에 있는 것일수록 조절적이다. 일반적으로는 이 조절적인 것만을 의지라고 부르지만 이는 원래 무의식 의지의 표피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에게 있어 욕구충족의 수단, 목적 관계는 복잡한 계층적 질서를 이루며 이에 따른 정연한 통일로 하나의 전체 인격이 형성 되는데 의지행위는 이러한 인격에 의해 통제되는 행동이라 할 수 있다. 20세기에 들어서자 의지는 목적을 의식한 정신활동이라는 새로운 견해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윌리엄 제임스는 욕망의 실현이 불가능하다고 느꼈을 때 그 욕망을 원망(願望. wish)이라고 정의하고, 그 실현이 자신의 역량 안에 있다는 자신을 가졌을 때를 의지라고 불렀다. 분트는 의지의 전제로서 감정적 색채를 띤 동기를 생각하여 의식 속에 하나의 동기밖에 존재하지 않는 경우를 단일의지동작, 2개 이상의 동기가 존재하는 것을 복합의지동작이라 구분하고, 이 유의동작(有意動作) 중 두 개 이상의 동기의 투쟁이 생기는 경우를 선택 동작이라고 다시 구별하였다. 분트는 의지동작의 발달에 대해 독특한 견해를 나타냈다. 즉, 충동동작은 정신발달이 낮은 시기에 나타나며 정신이 발달함에 따라 복잡한 의지동작이 행해지게 되는데 이를 전진적 발달이라 보았다. 똑같은 유의동작의 반복에 따라 동기의 투쟁을 잃어 습관적인 충동동작이 되며 마침내는 자극을 의식하기 이전에 운동이 해발(解發)되는 반사에까지 변화하는 경과를 후퇴적 발달이라 하였다. 12세기 이후 의지와 선택이 합성하여 선택의지가 대두된다. 볼프는 이것을 행위를 결정하는 내적인 원리 또는 능력으로 간주하고 라틴어 spontaneitas(자발성)를 그 동의어로 들지만 바그너는 자발성에 기초하여 스스로의 욕구에 따라 다양하게 행위 할 수 있는 힘이라고 정의 하고 arbitrium(결정)을 그 동의어로 내세우며, 이것이 지(知)와 의지에 기초할 때 자유로운 선택의지가 된다고 말한다. 바움가르텐은 후자를 따르는데 감성적인 기호에 따르는 감성적 선택의지와 이성적인 기호에 따르는 자유로운 선택의지를 구별한다. 칸트는 이러한 바움가르텐의 구별에 따르며, 감성적인 동인에 촉발되는 감성적 선택의지와 이성적인 표상에 따르는 자유로운 선택의지를 나누고 후자를 실천적 자유로 간주한다. 인간의 선택의지는 언제나 감성적 충동에 강제되는 동물적 선택의지와는 달리 기본적으로는 감성적이면서도 감성적 계기로부터 독립할 수 있고 또 경향성을 극복한다는 점에서 이성적일 수도 있다는 데에 그 특징이 있다. 의지와 마찬 가지로 선택의지는 이성에 따르고 도덕법칙을 준수하는 데서 자율을 성취하며, 감성적 동인 또는 경향성을 따르고 도덕법칙이 되는 준칙을 채택하지 않는 경우에는 타율을 낳는다. <종교론>에서는 선택의지가 채택하는 준칙의 도덕법칙을 수용하며, 그 준칙이 도덕법칙을 배반하는 경우에 악이 생긴다고 하여 선 내지 악의 근거가 선택의지의 준칙 속에서 통찰된다. 또한 <인륜의 형이상학>에서는 도덕법칙을 준수할 수도 거절할 수도 있는 선택의지만이 자유라고 말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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