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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ㅇ혜 Oct 13. 2022

감정

일반적으로 감정이란 주관의 심적 상태를 말하며 주관성을 특징으로 한다. 18세기 이래 욕구 능력, 오성(五性)과 함께 인간 영혼의 세 번째 근본 능력으로 간주 되어온 특성, 특히 욕구나 충동생활과 겹쳐져 따로 구분하기 어려운 다수의 방식(감각적, 영적, 정신적)과 양태(정열, 열정, 정서)를 포괄한다. 감정은 감각적 지각, 욕구, 열망, 내적 표상, 기억, 기대, 의지의 추구, 사유 과정 등을 동반하는 모든 쾌(快)와 불쾌(不快)의 체험을 포괄하고 있다. 이들은 주체가 그때마다 현재 순간속에 존재하는 데에 따르는 직접적인 체험으로서, 특정한 성질의 내용(비애, 행운, 상심)을 지니며 상이한 강도를 드러낸다. 또한 일정한 한계안에서 영향을 받지만 의도에 따라 직접적으로 산출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특히 인간의 행복과 불행에 관계하는 표상내용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종교, 정치, 교육, 예술을 이용하도록 쉽게 자극된다. 짧게 지속되는 감정을 ‘정서(emotion)’라고 하며, 즐거움과 슬픔 등이 이에 해당한다. 정서는 인간 활동의 성공과 실패, 자기의 필요에 일치와 불일치를 지시하는 역할을 하고 인간의 활동을 통제하는 작용을 한다. 그리고 만족스러울 때 적극적이고 활기에 찬 활동을 촉진하고, 불만족스러울 때에는 소극적이고 활발하지 못한 요소들을 만든다. 감정은 또한 ‘기분(mood)’으로도 나타나는데, 이것은 길고 지속적인 감정으로 인간의 행동과 사상에 일정한 색조를 부여한다. 또한 고도의 감정으로 의무감과 명예심 같은 도덕적 감정과 탐구하던 문제를 해결했을 때 오는 지적 만족감 그리고 미적 감정 등이 있다. 미적 감정은 작품의 내용, 형식 또는 대상, 인격에 대하여 받아들이는 자의 마음속에서 환기되는 갖가지 상태이며, 일반적으로 ‘정감(sentiment)’이라고도 한다. 정감은 그 규정이 일정하지 않고 경우에 따라 도덕적, 지적, 미적 감정 혹은 사랑, 증오, 존경, 경멸 등의 정서와 동일시된다. 예술작품의 생성에서 감정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으며 고대 이래 감정의 의의는 다양하게 규정되어 왔다. 영감 즉 신적 광기는 감정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는데, 플라톤에 따르면, 영감에 모든 결정적인 역할이 귀속되기 때문이다. 그와는 달리 아리스토텔레스의 전통은 영감 외에도 예술적 기법의 역할과 그 영향의 예측을 강조한다. 플라톤은 음악과 시를 통한 열정의 자극에서 이성적 삶에 대한 근본적인 위협을 보았던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을 통한 공포와 연민의 자극을 그러한 정열의 정화(카타르시스)로서 또 그것을 통하여 이성적 심신 상태가 재 회복되는 것으로서 이해했다. 근대에는 행복한 삶을 위한 감각적이고 정서적인 쾌의 감정이 지니는 의의에 대한 인정은 점차 증가되고 있다.     


문학작품 속에서는 작가의 감정과 실제 작품에 표현된 감정의 관계를 알렉산더(S. Alexander)는 ‘material passion’ 과 ‘formal passion’으로 나누어 설명했다. 그는 메리디스나 세익스피어는 실제로 그들 작품속의 등장인물의 감정을 느낄 필요가 없고, 단지 그들의 감정을 이해만 하면 된다고 하면서 시인의 감정 자체인 material passion은 드러날 필요가 없으며 실제작품 속에서 조성된 formal passion만이 독자의 미적 감정과 동일하다고 주장 하였다. 그러나 톨스토이와 같이 작가의 마음이 있는 그대로 성실하게 독자에게 전달되는 것이 바람직하며 객관화의 과정은 감정의 솔직한 전달에 방해가 되는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경험적 자아와 시적자아를 구분한 엘리어트는 실제의 정서와 작품 속에 표현된 감정인 정서(feeling)를 구분했다. 시에서 감정의 직접적 진술을 자제해야 한다고 주장한 엘리어트는 대신 시인의 감정을 환기시키는 이미지, 단어(객관적 상관물)등의 사용을 권장 하였다. 리차즈는 감정을 이해를 위한 또 하나의 절대 필수적인 방법으로서가 아니라 일련의 개인적 태도에 대한 암호를 의미하는데 제한시켜 사용하였다. 어떠한 사건을 논리적으로 능숙하게 추론할 수 있는 사람만큼이나 이러한 암호(감정)를 특별히 잘 해독해낼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것이며, 암호를 해독할 수 있는 무언가를 이들이 창조했을 때 위대한 예술가가 된다는 것이다.  


심리학에서 감정은 어떤 현상이나 사건을 접했을 때 마음에서 일어나는 느낌이나 기분을 말한다. 전에는 심리학에서 감각과 감정을 구별하지 않았으나, 워드와 분트는 감각은 객관적이며 감정은 주관적인 것이라 구별하였다. 감정은 인식작용이나 충동의지와 다른 것이지만 엄밀히 구분할 수는 없다. 감정과 의지가 하나가 된 정의를 독일어에서는 Gemüt라 하고, 감정과 지각(知覺)이 합쳐진 상모적 지각(相貌的知覺)이라는 현상도 있다.      

감정의 발생원인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1)생리적, 신체적 원인.      

어떤 감정은 신체에서 그 원인이 수반된다. 가령 몸을 의지할 곳이 갑자기 없어지면 공포심이 일어나고 몸을 짓눌러 자유를 빼앗기면 노여움이 일며 몸의 어떤 부분을 자극하면 쾌감이 생기고 겨드랑이나 발바닥을 간지르면 웃음이 나오며 몸을 세게 치면 고통의 감정이 발생한다. 제임스와 랑게는 감정을 신체적 변화의 느낌이라 보고 유명한 제임스 랑게설을 주장하였다. 슬퍼서 우는 것이 아니라 우니까 슬픈 것이고 무서워서 떠는 것이 아니라 떠니까 무서워지며 우스워서 웃는 것이 아니라 웃으니까 우스워진다는 학설이다. 이 설에도 일면의 진리가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2)심리적 원인.      

감정은 요구수준과의 관계로 생긴다. 즉 성적이 요구수준에 도달하면 성공감, 도달하지 못하면 실패감이 생긴다. 이는 쾌, 불쾌, 행복감과 불행감이 주된 감정이다. 또 성적이 요구수준에 도달할듯하면서 잘 도달하지 못할 경우에는 초조해지고 노여운 감정을 경험한다. 요구수준과 성적이 동떨어져 있으면 놀람, 이상함 등의 감정이 생긴다.     

(3)사회적 원인.      

그러나 타인과의 관계로 요구수준과 성적의 문제가 얽히게 되면 여러 가지 감정이 발생한다. 승리와 패배의 감정, 당해 낼 수 없는 상대를 대할 때의 열등감과 이와 반대 경우의 우월감이 존재한다. 또 자존심이 상했을 때의 노여움, 사람끼리의 호불호(好不好), 애증도 생긴다.      

(4)문화적 원인.      

가장 고상한 가치감정인 정조(情操. sentiment)는 문화적 원인으로 생긴다. 정조란 진리, 아름다움, 선행, 신성한 것을 대하였을 때 느끼는 고상한 가치 감정을 말한다. 정조는 이해(利害)를 떠나 가치있는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감정이다. 그 체험은 이성(理性)에 인도된 안정된 체험이다. 이것은 개인의 교양 정도에 따라 다르고 또 민족에 따라 다르다. 적적함, 쓸쓸함과 같은 정조는 미묘한 감정이다. 또한 정조는 가치에 관한 감정이기 때문에 가치의 종류에 따라 도덕적 정조, 예술적 정조, 과학적 정조, 종교적 정조로 구별된다. 이것은 가치를 진, 선, 미, 성(聖)으로 구별하는 가치철학을 배경으로 삼고 있으며 지금으로서는 대충의 분류라고 할 수 있다.      

도덕적 정조로는 정의감, 결벽감이 있으며 그것이 채워지지 않았을 때의 분노도 있다. 예술적 정조로는 황금분할, 부여 정림사지오층석탑 등의 반복미, 시메트리(symmetry. 대칭. 균형)와 아시메트리(asymmetry. 불균형. 비대칭)의 느낌, 밸런스, 프러포션 등의 감정이 있다. 이러한 것들은 문화의 형(型)에 의한 것이지 보편타당성을 가진 것은 아니다. 과학적 정조로서는 진리에 대한 놀람과 신비감이 있으며 정당할 때에는 기분이 좋지만 허위에 대해서는 불쾌감이 생긴다. 종교적 정조로는 신성한 느낌, 외경의 감정, 의거(依據)와 안심감, 불교적인 무상감(無常感), 감사의 감정, 신비감 등이 있다.      

감정은 여러 입장에서 분류할 수 있다. 희로애락(喜怒哀樂)처럼 격렬하고 강하지만 폭발적으로 표현되어 오래 지속되지 않는 감정을 정서(情緖) 또는 정동(情動)이라고 한다. 타오르는 듯한 애정, 강렬한 증오 등도 이에 속한다. 이에 비해서 약하기는 하지만 표현이 억제되어 비교적 오래 지속되는 감정을 정취라고 한다. 공포는 정서이며, 걱정과 불안은 정취이다. 격노(激怒)는 정서이지만, 상대방에 대한 불유쾌한 생각은 정취이다. 홍소(哄笑)는 정서이고 미소는 정취이다. 그 밖에도 유머, 분함, 행복, 비애, 외경(畏敬) 등과 같이 가치의식이 가해진 안정적이고 영속적인 감정이 있는데 이를 정조(情操)라 한다. 이것들은 가치감정이라 할 수 있다. 분트는 쾌(快)/불쾌, 흥분/침정(沈靜), 긴장/이완 등 감정의 3방향설을 주장하였다. 또한 자네는 기쁨과 슬픔, 노력과 피로, 들뜸과 허무감의 3방향을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서 로이스는 쾌/불쾌와 안정/불안의 2방향설을 내세웠다. 브리지스는 갓 태어난 아기의 정서는 처음에는 단순한 흥분에서 출발하여 생후 3개월경에 쾌, 불쾌, 흥분으로 분화하고 4개월경에 불쾌는 노여움, 혐오, 두려움으로 분화하였다가 1년 만에 질투가 분화해 나오는데 이처럼 미분화(未分化)의 흥분은 점차 섬세한 감정으로 분화한다고 주장하였다. 프로이트는 사디즘이나 마조히즘 등의 이상심리에서 사랑과 미움, 복종과 반항, 쾌와 고(苦. 심신의 괴로움) 등 상반된 감정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을 양향성(兩向性)이라고 하였다. 양향성은 복잡한 감정의 심리적 일면을 잘 꿰뚫고 있다. 분트는 개개의 특수적 감정과 의식에 뚜렷이 떠오르지 않는 자아상태의 감정을 구별하여 후자를 일반감정이라고 하였다. 슈테른은 개개의 공포와 일반적인 불안을 구별하였으며 하이데거는 전자를 존재적(存在的), 후자를 존재론적(存在論的)이라고 하였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감정은 전혀 인식이 아니다. 그것은 표상하는 능력이 아니라 인식능력 전체의 외부에 존립한다”고 하였다. 칸트의 비판철학에서 감정의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감정을 잘 다스림으로써 이성이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감정을 잘 다스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감정은 직접적으로 느끼는 능력이다. 간접적인 사고 능력이 자신의 기능을 단계적으로 밟아 올라가며 적절하게 수행하기도 전에 막무가내로 틈새를 비집고 올라오는 것이 감정의 능력이다. 이성이 우리를 통제할 힘을 잃고 순간순간 감정에 의해 제압된다면 우리는 다른 존재들과 마찬가지로 자연의 법칙에 종속되는 존재로 전락될 것이다. 이렇게 물질의 법칙에 따르는 존재가 되어버린다면 인간의 존엄성은 구할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자연법칙은 개개인의 자유의지를 인정하지 않는 필연적인 법칙이며 필연적인 자연법칙에 종속되는 인간은 언제나 현재의 물질적, 심리적 조건에 구애받기 때문이다. 현재의 물질적, 심리적 조건이 어떠하든지 그 조건과의 관계를 끊어버리고 ‘인간은 자신의 절대적 자유의지에 의해 자신을 상승시킬 수 있는 존재이다’라고 가정할 수 있다는 데에 인간의 존엄성이 있다.     

칸트는 결혼관계를 중시했다. 결혼관계에 의해 남녀의 사랑이 이성의 법칙에 접근하는 삶으로 실현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남녀의 사랑은 칸트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그 자체로 감정의 법칙을 따르는 현상이다. 남녀는 각자의 취향, 관심에 따라 서로 상대방에게 마음이 끌린다. 이와 같이 끌리는 마음의 현상은 이성의 사고법칙에 의해서가 아니라 감정의 법칙에 의해 저절로 기울어지는 마음(경향성. 저절로 기울어지는 마음의 성향)이다. 저절로 상대방에게 기울어지는 경향성의 마음은 시간, 장소에 따라 변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한 때 목숨을 바칠 정도로 사랑했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어느 순간 마음속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새로운 대상에게 마음이 기울기도 하는 것이다.     

칸트에서 경향성은 습관적인 감성적 욕망이라고 정의되는 것이자 욕구능력으로서 감각에 의존하기 때문에 의지가 모든 감성적 충동에 의존하지 않고 자율적으로 보편적 법칙을 세우는 데서 성립하는 도덕적 행위에서는 준칙에서의 의지의 규정근거로부터 배제되어야만 하는 것에 속한다. 여기서 경향성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니게 된다. 하나는 자유의 실천적 사용이 문제로 되기 이전의 자연적 충동 그 자체로서의 경향성이며 둘째는 준칙에서 의지의 규정근거로서의 자유의 작용에 대해 모종의 의미에서 관계를 지니는 경향성이다. 감성적 존재자이기도 한 인간이 감성적 욕망을 지니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우며 첫 번째 의미에서의 경향성은 목적론적으로 말하면 오히려 선에 속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감성적 욕망이 습관으로 되는 경우에 그것은 자유롭게 선택되어야만 하는 준칙의 결의성에서 자연필연적인 감성적 욕망이 자유를 배제하고 의지의 규정근거로 되는 경향을 허용한다는 의미에서 의지의 준칙의 전도(顚倒)에 연계된다. 도덕철학은 “하늘에 매달려 있지도 않고 땅에 지탱되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확고해야만 하는 곤란한 입장에 놓여 있다”고 칸트는 말하고 있지만 그 곤란함은 경향성의 이 두 가지 의미 사이에 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의무의 의식은 경험적 개념이 아니기 때문에 어떤 행위가 오로지 도덕적 근거에서 기인하는지의 여부를 완전히 확실하게 결정하는 것은 경험적으로는 불가능하다. 인간은 현재의 감정을 초극하여 자신을 자연의 존재에서 이성의 존재로 비상시켜야 하는 의무를 지닌 존재이다. 인간은 자연 속에서 자신을 새로이 만들어가야 하는, 창조해내야 하는 유일한 존재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당위의 존재로서의 인간이다. 당위의 존재로서의 인간의 삶만이 인간을 가치 있는 존재로 만들어 준다. 당위(當爲)란 당연히 무엇 무엇을 해야만 한다는 뜻으로 어떤 행위를 할 때, 인간이 해야만 하는가, 하지 말아야 하는가의 판단에 작용하는 명령이다. 이러한 명령은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것이다. 그러나 당위라는 말이 강조되고 있는 대부분의 경우는 관념론자가 도덕의 기초를 부여할 때 존재의 법칙에 기초를 두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관념적인 것으로부터 도덕의 법칙이 주어진다고 하여 도덕을 기초 짓는 데 사용한다. 칸트는 당위를 어떤 목적을 위한 당위와 무조건적인 당위로 나누고 후자에 도덕의 법칙이 있다고 하고, 이것은 인간의 본성(本性)으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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