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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ㅇ혜 Oct 13. 2022

하이데거의 현존재

이성적 동물이란 하이데거가 지적하는바 전통적 휴머니즘에 의한 인간의 본질규정이다. 휴머니즘이란 인간이 인간다움을 추구하려 노력하는 모든 사려와 심려를 일컫는다. 따라서 휴머니즘은 인간의 본질을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 다양하게 전개된다. 그러나 각각의 휴머니즘이 각양각색일지라도 인간의 본질을 이성적 동물로 정의한 형이상학적 규정을 공유한다. 인간은 최근류(最近類)에서 보자면 동물이지만 다양한 종의 동물 가운데서 유일하게 이성이라는 탁월한 능력을 지니고 있기에 이성을 종차(種差)로 하는 이성적 동물이라는 것이 모든 휴머니즘에 전제된 인간의 가장 보편적인 본질 규정이다. 그러나 인간에 대한 이러한 본질 규정은 인간의 본질에 대한 올바른 규정이긴 하나 근원적으로 충분한 규정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의 본질은 존재자와 엄격히 구별되는 존재와 관련되나 이 규정은 존재자의 차원에서만 인간의 본질을 규정할 뿐 존재는 물을 가치가 있는 것으로서, 다시 말해 ‘사유에 의해 사유되어야 할 것’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 Sein und Zeit>에서 스스로의 입장을 현상학적 존재론이라 규정하면서 실존철학과는 구별을 지었다. 그의 의도는 어디까지나 존재의 의미를 해명하고자하는 것이지만 존재에의 통로가 되는 한에서 인간적 실존의 분석이 기초적 존재론의 이름 아래 시도된다. 그런 점에서 그의 철학 역시 넓은 의미의 실존철학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하이데거 철학은 우리가 현재 여기에 있다고 하는 사실로부터 출발한다. 그것이 그가 말하는 현존재(現存在)이며 현존재의 존재방식이 실존이다. 현존재는 현실에 존재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이데거 철학에서 현존재는 그의 사유의 각 시기에 걸쳐 중심적 역할을 수행한다. <존재와 시간>에서 현존재는 우리 각자가 존재자 즉, 인간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러나 인간을 현존재라고 명명했다고 해서 인간의 특징을 형성하는 무언가의 사태적인 내용이 말해지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스스로가 존재한다는 것을 자기 자신의 유일한 일로서 살아가지 않으면 안되는 존재자이다. 현존재란 이와 같은 존재자의 존재를 나타내는 말이기도 하다. 인간 즉, 현존재(Dasein)의 존재방식은 존재자에 관계하는 태도뿐만 아니라 존재자를 존재자로서 규정하는 가능성과 본성으로서의 존재에 관한(막연하게 알고 있을 수도 있고 전문이나 분업에 의해 이해방식에 섬세함과 거침이 있을 수도 있다)태도도 포함한다. 따라서 현존재의 특질은 존재자로서 존재자에게로 향함과 동시에 존재자를 성립시키는 본성이나 가능성 즉, 존재로 향하는 경향을 지닌다는 점에서 존재(자)적, 존재론적이라고 불릴 수 있다. 인간은 존재자의 하나로서 존재자에 둘러싸여 있지만 ‘존재자가 존재자로서 있다는 것은 어떠한 것인가?’라고 묻는 것에서 존재자와 존재자가 아닌 존재 사이의 차이를 보고 있는 것이다. 이 차이는 존재론적 차이를 말하는 것이다. 이 차이에 충실하여 인간과 인간의 세계를 다시 보는 것 즉, 존재자가 아닌 존재의 참된 모습을 향하여, 아직 아무도 걸어가지 않은 숲길의 좁은 길을 걸어가는 것이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이후의 사유인 것이다. 


현존재(Dasein)는 인간이 현(Da)을 열고 이 현안에 존재한다는 것을 표현하는 하이데거의 전문용어이다. 현존재(Dasein)에서 현(Da)의 일상적 의미는 ‘여기’ 혹은 ‘저기’를 가리키는 장소개념이다. 하이데거는 인간을 존재론적, 실존론적 차원에서 현존재(Dasein)라 규정한다. 다른 철학자들은 그 용어를 사물들의 존재 상태를 나타내는 말로 썼지만 하이데거는 인간을 다른 존재자와 구별하여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하였다. 즉, 그는 현존재를 특별히 인간에게만 한정시켜 말하고 있다. 다자인(Dasein)을 글자 그대로 옮기면 ‘거기에(Da) 있음’이라는 말이다. 하이데거는 이를 통해 현존재의 개시성을 가리킨다. 결국 하이데거에게 인간규정으로서의 현존재는 개시성을 열고 그 안에 들어서 있는 존재라는 의미를 갖는다. 즉, 현존재는 거기에 존재하고 있으며 존재해야 하는 가능성을 의미하며 현존재의 본질은 바로 그의 실존에 놓여 있다. 이때의 실존성은 (1)세계-내-존재 (2)더불어 있음(공동 현존재) 그리고 (3)처해 있음(상태성. 정상성)과 이해(개시성)의 실존 범주를 갖는다.     

(1) 세계-내-존재      

하이데거의 기초적 존재론의 용어이자 현존재(Dasein)의 본질적 구조를 말한다. 하이데거는 존재양식에 대한 사고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그리고 존재양식이 스스로를 어떻게 자명한 것으로 보이게 하는지에 주목한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인간존재는 단순한 세인(sein, 세상사람)에 머무르지 않고 현실적으로 거기 눈앞에 있는 현존재 또는 실재(實在)이다. 현존재는 실존하며 우리들 자신 각각이 존재해야 할 존재를 의미한다. 현존재의 이러한 존재성격을 각자성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현존재가 실존과 각자성에 의해서 규정될 수 있으려면 자기 자신의 존재는 물론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들의 존재도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하이데거는 “인간은 단순히 세계속에 던져져 있을 뿐만아니라 자아에 앞서 이미 세계에 존재해 있다”고 말한다. 현존재의 실존에는 세계, 말하자면 유의미성에 대한 선행적인 이해와 같은 어떤 것이 놓여 있다. 따라서 이러한 현존재의 실존에는 이미 세계의 실존이 전제한다. 현존재가 존재하는 한에서는 다시 말해 실존적인 한에서만 세계가 존재한다. 세계-내-존재에서 안에 있다는 것은 단순히 공간적 ‘안-존재’의 상태가 아니라, 인간의 경우 ‘관계로서의 있음’을 말한다. 그것은 만들며 사용하며 계획하고 관찰하는 상태이며 이를 ‘관심’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 현존재는 세계-내-존재로서 '세계-내'적으로 존재하는 자, 곁에(bei)있는 존재, 곧 관심의 존재이며 다른 자와 같이(mit)있는 존재이다. 세계는 사물의 총체가 아니다. 인간이 그 속에 있다는 내재성은 단순히 두 개의 물체가 공간적으로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골몰하여 존재 한다’는 것이다. 세계는 항시 타인과 ‘더불어 있는 세계’를 말한다. 여기에서 타인에 대한 배려라는 존재 방식이 ‘내-존재’의 의미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을 세계라고 부르기 때문에 현존재는 어떤 식으로든 세계와 존재 연관을 맺고 있다. 현존재는 세계 속에 감싸여 있고 세계는 현존재의 한계와도 같은 것이다. 그런데 현존재는 존재자의 존재를 이해하고, 그런 의미에서 존재자의 존재에로 초월해 있다. 하이데거는 이 현존재가 존재자의 존재에로 초월해 있다는 것을 현존재가 세계 안에 있다는 것으로 보아, 세계-내-존재로 규정한다.

인간 존재는 항상 자신에 대해서 관심이라는 존재 양식을 취한다. 인간 존재는 이 관심을 통해서 비본질적인 존재 방식에서 본질적인 존재 방식으로 이행된다. 우리들이 세계 내에 존재한다는 것은 우리들이 존재자 일반의 존재를 이해하면서 존재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 존재자 일반에는 자신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세계-내-존재는 결코 주관이나 객관과 같은 조각들로 나뉠 수 없다. 그러므로 세계-내-존재라는 합성된 표현은 우리들이 세계 내에 존재한다는 것이 통일적 현상임을 뜻하는 것이다.(신성환) 하이데거는 인간 현존재가 공공세계 및 사적세계와 같은 존재방식에서 그때마다 일정한 의미연관을 지니는 세계안에 살 수 있다는 것 요컨대 그러한 세계를 지닌다는 것은 현존재가 역사적 상황이기도한 세계에 언제나 이미 정황적(情況的)으로 존재함과 동시에 자기의 존재가능성을 이해하면서 기투하는 방식으로 세계로 초월한다는 것이다. 요컨대 현존재가 세계-내-존재라는 짜임새 속에 던져져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이데거 사유의 중심 개념의 하나인 세계-내-존재는 존재를 이해하는 존재자라는 점에 주목하며 그가 현존재라고 부르는 인간의 존재 체제를 특징짓는 규정이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우선 고립된 인간이 그 자체로 완결된 외적 세계에 대해 인식 주체로서 서로 향하여 접근해 간다고 하는 근대 철학의 기본적인 구도를 배제하고, 자신이 언제나 이미 일정한 세계 내에 존재한다는 것을 기성의 사실로서 발견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존재방식을 강조 하는 것이다. 

세계 개념은 철학의 역사와 더불어 오래된 것이지만 근대 과학의 세계상이 자명한것이자 유일하게 진실한 세계로 간주되었다. 19세기 후반 이후 현상학은 다시 세계의 의미를 묻는 것을 철학의 가장 중요한 과제로서 제기했다. 요컨대 공간적 확대를 본질로 하고 인과법칙에 의해 관철되며 미리 완성되어 있는 세계(외부세계, 자연)를 인간 정신(내부세계)이 어떻게 해서 인식할 수 있는 지를 묻는다. 다시 말하면 주관, 객관 도식을 전제 하는 근대적 인식론의 발상에 대해 근본적인 비판을 제기한 것이다. 현상학은 인간에 의해 직접 경험되는 대로의 세계로 되돌아와 세계의 존재의미를 묻는 것이다. 후설의 생활세계, 하이데거의 세계-내-존재, 메를로-퐁티의 체험된 세계 등의 개념은 그러한 현상학의 노력의 성과를 표현하고 있다.

(2)더불어 있음(공동 현존재)     

현존재는 타인들, 즉 세인(世人)과의 세계-내-존재함을 뜻한다. 따라서 현존재의 주인으로서 누구는, 즉 주체(subject)는 ‘나’가 아닌 ‘그들’이다. 타자는 나와 함께 공동의 세계를 형성하면서 그 속에 함께 살고 있는 공동 현존재이다. 평균적인 일상성에서의 현존재란 누군가를 가리키는 말로서 사용된다. 특정한 저 사람도 이 사람도 아니고 또한 전원의 총계도 아닌 모두, 그 밖의 사람들, 누구도 아닌 사람(Niemand)을 말한다. 평균적이도록 배려하고 존재의 가능성을 모두 평준화하며 존재의 부담을 면제함으로써 세인은 모든 현존재를 지배한다. 일상적 현존재는 세인(모두)과 똑같이 말하고 세인과 똑같이 판단하며 세인과 똑같이 음악을 듣는 방식으로 세인에게 스스로를 인도해버림으로써 자기를 상실하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을 세계(세상) 내지 세인으로의 현존재의 퇴락이라고 부른다. 일상적 현존재의 자기는 본래적인 자기(명확히 포착된 자기)가 아니라, 세인이라는 자기 즉, 비 본래적인 자기이다. 본래적인 자기는 세인이라는 자기의 실존적 변양이며 이러한 변양을 현존재에게 촉구하는 것은 양심이 부르는 소리이다. 하이데거는 전기의 저서에서 현존재의 존재론적, 실존론적 구성 계기로서 양심을 자리매김한다. 이것은 일상생활에서의 양심인 통속적 양심과는 구별되며 통속적 양심을 가능하게 하는 존재론적 계기로서의 양심이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양심은 현존재를 무엇보다도 우선 존재 문제를 은폐하는 존재 양태(비본래성)로부터 해방하여 자기 존재의 근원사실에 직면하는 존재 양태(본래성)로 향하게 한다. 따라서 양심은 현존재의 본래적 실존적 가능성의 증거이다. 왜냐하면 양심은 현존재의 존재라고 간주되는 염려(Sorge)의 부르는 소리이기 때문이다. 양심은 현존재가 ‘책임이 있다’고 하는 경고를 주지만 그 책임이란 현존재의 피투성 특히 자기의 근거를 스스로 놓아 버리는 것이 아니라는 성격 즉, 무력감이다. 현존재의 본래성으로 향한 열쇠는 피투성의 자각에 있다. 그와 같은 피투성을 드러내 주는 불안 속에서 양심이 침묵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스스로를 기투 하는 현존재의 존재방식이 결의성이다. 이러한 결의성에 의해 현존재가 존재를 묻는 것이 실존적으로 가능해지는 것이다.

(3)처해 있음(상태성, 정상성 또는 정황성)과 이해(개시성)      

현존재는 기분을 통하여 현사실성으로 존재자, 그 자신이 거기에 던져져 있음을 지시한다. 그리고 현존재가 존재론적 대화를 통해 자기 내부의 본래적 존재가능의 가능성들에 자신을 기획 투사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존재가능의 가능성들로서 드러내거나 이해한다. 이해(개시성)속에서 현존재는 기투 된 가능성이 탈 은폐되어 있음으로 존재한다. 내-존재란 사물들끼리의 공간적인 포함관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연관을 이해하는 현존재의 개시적인 존재방식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하이데거는 이것을 정황성과 이해에 의해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예로부터 인식은 보려는 욕망에 의거해 파악되었다. “모든 사람은 본성상 보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명제는 물론이거니와 “사유와 존재는 동일하다”라는 파르메니데스의 명제는 존재는 순수한 직관적 인지 속에서 제시된다는 봄(視)의 우위를 입증한다. 또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욕망에 관한 해석이 말해주듯이 봄(視)은 단지 눈의 지각에만 한정되지 않고 청각, 후각, 미각, 촉감 등 인간의 모든 감각적 경험을 포괄한다. 그래서 감각 경험은 일반적으로 눈의 욕망이라고 일컬어진다. 봄(視)이란, 배려의 둘러 봄(配視) 혹은 고려의 돌봄(顧視)에서 그렇듯 봄(視)에 접근해 오는 존재자를 그 존재자 자체에 의지하여 은폐하지 않고 만나게 함을 의미한다. 즉 봄(視)이란 현존재가 이해를 통해 개시된 자신의 본질적 가능성에 따라 그때마다의 존재자를 진정 자기의 것으로 취함을 의미한다. 하이데거는 밝힘(인간의 근원적인 앎)을 존재 자신의 자기개시의 방식에서 생각한다. 그러나 그 경우 존재가 그 자신으로서 있고, 이어서 그 존재가 자기를 개시한 결과 밝힘이 생긴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존재 자신을 밝힘으로 이해하는 것, 역으로 말하면 열려 밝힘 그 자체가 하이데거가 말하는 존재라고 이해해야만 한다. 나아가 이러한 열려 밝힘은 닫혀져 숨음을 제거하여 비로소 성립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서로 대립하는 움직임 각각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각각이 그 다른 편의 움직임을 본질적으로 필요로 한다는 점에 주의해야만 한다. 다시말하면 인간의 현존재는 그 자신이 밝힘이다. 나아가 세계-내-존재로서 밝혀지고 있는 까닭에 이러한 밝힘에 기초하여 세계 내부의 사물들을 보고 그것들에게로 다가가는 것도 가능해진다. 하이데거는 현존재를 열어 밝힘의 존재, 피개시성의 존재로서 파악한다. 이러한 현존재의 피개시성은 배려이며 이러한 배려라는 방식에서 존재하는 인간은 시간성의 탈자적인 통일성이다. 요컨대 사람은 그때마다 자기를 넘어서서 다른 것을 배려하는바, 이 배려는 근본적으로 시간적이다. 그것은 장래, 기재성(있어 왔음), 현재로 향해 있다. 이러한 자기를 넘어선 다른 것에 대한 배려, 내부를 통일하는 탈자적 시간성은 지평이다. 지평은 장래에서는 존재 가능의 기투이며 기재성에서는 이미 있는 것이 개시되고 현재에서는 배려되고 있는 것이 발견된다. 이와 같이 하이데거는 현존재의 탈자적시간성 속에서만 지평을 인정한다. 


지평(Horizont)의 원의는 그리스어인 horizein으로까지 소급된다. 이 그리스어는 한계 짓다, 경계선을 긋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평은 한계 짓는 권역, 가시권, 한계가 그어진 범위에서 유래하며 보통은 지평선이나 수평선의 경우처럼 볼 수 있는 범위를 한계 짓는 선이다. 이 말은 칸트에서도 나타나며 후설에게서는 본래 의식의 구조 안에서 지평이 발견된다. 지평 개념의 원천은 의식, 특히 체험이 현실성-비현실성의 역동성속에 놓여 있다는 점에서 발견된다. 의식이 지향적 체제를 취하고 있는 것은 의식이 지금 주어져 있는 것을 언제나 이미 넘어서서 어떤 다른 것으로 향하여 그것을 지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좀 더 많은 것을 사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점이 바로 당장 의식의 지평선을 보여준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의식 체험이 복잡하게 얽혀진 함축태의 구조를 지닌다는 점이다. 의식은 지향적 체험으로서 파악되는바, 그것은 우선 현실적 코기토이고 ‘순수 자아로부터 발하는 눈길’이라고 말해지며 그때마다의 의식의 상관자인 대상, 사물, 사태로 향한다. 후설에서 지평 개념은 중요한 핵심개념일 뿐만 아니라 후설 만년의 철학은 지평의 현상학이라고 부른다. 이와 같이 말하는 까닭은 지평이 개개의 지각적 현출자의 배경이라는 의미를 넘어서서 더 나아가 다른 모양의 방식일 수 있는 것의 전체라든가, 가능성의 유동 공간이라는 의미를 획득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어떤 사물의 현상이 지시성과 연상성의 연관을 매개로 하여 다른 사물의 현상을 환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떤 지평은 더 나아가 다른 지평을 환기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지평이 상호적으로 환기하고 환기될 때에 이러한 지평들의 환기하고 환기되는 연관의 전체가 거기서 생겨나고 있는 어떤 개방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지시하고 지시 되는 지평의 상호관계의 전체가 거기서 생기하는바, 유동하고 있는 열린 공간을 배경에서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 경우 개개의 지평에 있어서의 열린 유동 공간이 모든 지평의 지평이라든가, 보편적 지평으로서의 시계이다. 후설과 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전통에 서서 철학적 해석학을 완성한 가다머는 지평의 융합을 이야기한다. 가다머는 본래 지평이라는 개념을 상황이라는 개념과 관련지어 끄집어내고 있는데 지평이란 그의 이해에 따르면 하나의 관점에서 볼 수 있는 것들을 모두 포괄하는 것이다. 지평을 지닌다는 것은 단지 가장 가까운 것으로만 제한되지 않는바, 오히려 그 가까운 것을 넘어서서 아득히 멀리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지평을 지니는 것은 그 지평 내부의 모든 사물의 의미를 바르게 평가하는 기술을 알고 있다. 특히 해석학적 상황에서는 텍스트 해석에 있어 선입관으로 대표되는 과거의 전통적 해석의 지평과 해석자가 자기 자신을 위해 수행하는 해석의 기투의 지평이 융합하여 이미 구별할 수 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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