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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ㅇ혜 Oct 13. 2022

하이데거의 존재이해

현존재는 언제나 무언가의 방식으로 존재에 관계한다. 요컨대 존재이해를 갖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통상적으로 여러가지 것들을 이용한다든지 무언가에 대해 말한다든지 할 때, 나아가서는 좀 더 고차적인 지적 활동을 행할 때에 막연하게나마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있다. 예를 들어 도구를 사용할 때에는 그 도구가 무언가의 용도로 향해 있는 것이라는 점(도구존재성)을 지적판단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것을 잘 사용함으로써 실천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예로 유적이 있다고 말할 때에는 현실존재로서의 존재가 이해되고 있다. (예를 들면 고조선의 존재를 입증하는 세계 최대의 선사유적지) 이와 같이 인간 활동의 모든 국면에서 발견되는 존재에 대한 관계를 ‘존재이해’라고 말하며 존재이해에 의해 인간이 다른 존재자보다 우의가 존재한다고 주장된다. 존재이해는 넓은 의미에서는 정황성(처해있음, 기분), 이해(기투), 말(언어적 분절)을 포함하여 현존재에서의 존재의 개시태 일반을 가리키지만 좁은 의미에서는 자기와 사물의 가능성들에 대한 기투로서의 이해라는 개시태를 의미한다. 어느 경우이든 시간성을 기초로 하여 존재이해가 주어지게 된다.      

존재자(있는 것)에 대해서는 그것이 있다, 그것은 ~이다, ~에 있다 등으로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있음, 있다고 하는 것 즉, 존재에 대해서는 존재자에 대해서 있다고 말하는 것과 동일한 표현을 할 수 없다. 따라서 존재는 주어져 있다라는 표현밖에 할 수 없다. <존재와 시간>에서는 존재, 시간, 진리에 관해서는 존재자가 아닌 사태로서 주어져 있다는 표현을 하고 있다. 존재는 존재자와 같은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존재자가 아닌 존재는 도대체 어디에 존재하는 것일까?’ 존재자는 그 하나의 현존재, 즉 인간의 교섭 상대방이기 때문에 넓은 의미의 경험에서 만나게 되는 사물과 사람과 일, 사태를 가리킨다. 존재자는 하나하나로서나 전체로서 그것의 있음, 무엇이고 어떻게 있는가라는 것이 명백하게 파악되어 있는 상태, 즉 존재론적으로 이해된 상태는 아니라 하더라도 현존재의 상대방이다. 일상적으로는 막연하고 애매한 이해에서 우리는 존재자의 존재를 이미 심득하고 있다. 직업과 취미 그리고 관심과 흥미 등에 따라 우리는 어떤 종류의 존재자의 존재, 존재방식에 정통한다든지 숙지한다든지 하고 있지만 그것 이외에는 존재자와의 교섭 즉, 존재(자)적인 태도는 해당 존재자의 특유한 존재에 대해 막연한 이해에 기초하더라도 지장이 없는 것이다. 인간은 존재자의 하나이며 많은 존재자와 마찬가지로 다른 존재자에 대해 존재(자)적인 교섭, 경험을 행한다. 그러나 ‘인간은 상대방으로 되는 존재자의 존재 즉, 그것의 있음, 있다고 하는 것, 그것이 무엇이고 어떻게 있으며 무엇을 위해 있고 어떤 까닭에 있고 무엇으로 되는가?’ 등에 대해 가르쳐지거나 습득하여 이미 잘 알고 있든가 더 나아가 배워 알 수 있다. 어쨌든 존재이해를 이미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 그의 특질을 이룬다. 


인간을 1차적으로는 인식 주체로 간주하는 근대 철학의 틀 안에서 적극적으로 주제화되지 않았던 기분을 하이데거는 현존재와 세계의 상호관계의 기저로서 파악한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현존재가 세계-내-존재라는 방식으로 존재하는 이상, 세계는 언제나 이미 일정한 방식으로 열려 있다. 세계는 현존재에 대해 우선 직관과 인식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그 속에서 현존재가 자신이 거기에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장으로서 열려 있는 것이다. 현존재의 의지와 관계없이 자기가 세계속에, 기성사실로서 던져져, 일정한 존재방식에 맡겨져 있는 것을 하이데거는 정황성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정황성은 구체적으로는 다양한 기분으로서 경험된다. 이러한 일정한 기분에 의한 규정과 조율 속에서 비로소 개개의 사물과의 관계도 가능하다. 무언가가 두려운 것으로서 만나지게 되는 것은 두려움이라는 정황성속에서 세계가 두려움 쪽으로 개시되어 조율되어 있기 때문이다. 세계가 우선 기분에 의해 개시되어 있다는 것을 하이데거가 강조하는 이유는 이성과 인식에 정의된 근대의 주체의 철학에 대해 현존재의 사실성, 피투성, 기재성 등의 성격들로부터 인간의 존재를 다시 파악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자기를 마주대하길 회피하는 일상성에의 매몰로부터 인간을 흔들어 일깨우고 반성과 철학적인 사유에로 몰아세우는 것도 바로 이 기분이기 때문이다. 다양한 기분 중에서도 <존재와 시간>에서는 불안이 나중에는 무료함이나 경악 또는 예감 등이 다루어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와 같은 기분이 일상성으로부터 철학에로의 태도변경을 불러일으킨다. 그런 까닭에 “모든 본질적인 사유는 그 사상이나 명제가 그때마다 새롭게 마치 광석처럼 근본 기분으로부터 새겨질 것을 요구한다. 이러한 근본 기분 없이는 모든 것은 개념이나 언어라는 그릇의 무리한 흔들림에 불과하다”고 말해진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두려움은 하이데거가 불안에 대비시키는 하나의 기분 현상이다. 두려움이 비 본래적 정황성이라면 불안은 본래적 정황성이다. 두려움이 우리를 본래적 자기로부터 회피하게 하는 반면, 불안은 우리를 감추어졌던 본래적 자기 앞에 직면하게 한다. 두려움의 현상은 세 가지의 구조계기를 갖는다. 두려움의 대상(무엇 앞에서), 두려워함 자체, 그리고 두려움의 이유(무엇 때문에)가 두려움을 통일적으로 구성한다. 두려움의 대상은 세계 내부적 존재자이다. 전재자, 용재자, 타인으로서의 공동현존재가 모두 두려움의 대상이 된다. 두려움의 대상의 본질적 성격은 유해성이다. 가령 리포트 제출이 코앞에 닥쳤다고 할 때, 일상적 우리에게 리포트는 두려움의 대상으로 다가온다. 우리는 리포트를 제출하지 않는 상황에서 우리에게 닥쳐올 유해적 상황을 미리 그려 보는데 그럴수록 두려움은 고조된다. 리토트의 제출기간은 연장될 수도 있고 또 우리가 리포트의 작성을 완료할 수도 있지만, 우리의 두려움은 점점 증대된다. 두려워함 자신은 우리에게 위협적인 것을 위협적인 것으로서 개현한다. 그러나 두려워함이 위협적인 것을 먼저 확인하고 나서 두려워하는 것은 아니다. 두려워함은 위협적인 것이 다가오는 상황을 미리 그려보며 두려워한다. 그러나 일상적 현존재는 두려운 것을 일단 확인하면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는 곧 일상의 자기로 돌아온다. 이런 것이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의 현주소인 것이다. 두려움의 이유는 바로 스스로 두려워하는 현존재 자신이다. 앞서의 예처럼 코앞에 닥친 리포트가 두려움의 대상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까닭은 세계에 몰입해 있는 현존재가 그로 인해 위해(危害)를 당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현존재는 현존재 자신 때문에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러나 두려움은 현존재를 주로 결여적 방식으로 개시한다. 리포트 제출로 두려워하지만 그 위협적인 상황이 확인되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다. 그러니까 두려움은 우리를 일상의 자기 안에 견지하는 것이다. 두려움의 대상은 그 때마다 일정한 방역에서 가까이 다가오는 세계 내부적 존재자다. 그런 존재자는 유해하긴 하나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불안의 경우는 이와 다르다. 불안의 대상은 우리가 세계 속에서 만나는 어떤 특정한 존재자가 아니다. 세계는 세계-내-존재인 현존재의 존재에 속하므로 불안의 대상은 이렇게 그 의의를 상실한 세계 안에 살고 있는 나의 존재 자체, 즉 세계-내-존재 자체이다. 불안의 대상은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데도 없다. 현존재가 불안해하는 까닭은 현존재가 지닌 어떤 특정한 존재가능성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불안의 이유는 압박해 오는 세계속에 살아가는 자기의 존재가 된다. 불안의 이유는 세계-내-존재이다. 때문에 불안을 통해 현존재는 이제, 퇴락적 삶 속에서 벗어나 그동안 망각해 왔던 자기의 본래적 존재에 비로소 직면한다. 불안은 현존재가 단독화된 자로서 가장 독자적 존재가능에 이르는 존재임을 드러낸다. 현존재는 세계-내-존재 앞에서, 세계-내-존재 때문에 불안하다. 불안의 대상과 불안의 이유는 동일하다. 불안함 자체는 세계-내-존재의 근본 양식이다. 불안으로 인해 현존재는 세인속에서 상실되었던 본래적자기를 만나게 된다. 불안속에서 현존재는 본래적자기를 직면한다. 불안은 현존재가 본래 누구인가를 드러내주는 근본 정상성(根本情狀性)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태는 현존재의 실존론적 가능성이지, 실존적 현상은 아니다. 근본 정상성으로서의 불안속에서는 현존재가 살고 있던 기존의 세계가 해체된다. 현존재가 몰입했던 세계는 그 모든 의의를 상실한다. 무화(無化)된 세계속에 내동댕이쳐진 현존재는 ‘으스스함’의 기분에 젖게 된다. 으스스함은 타성에 빠져있던 현존재가 삶의 모든 기준과 토대를 잃었을 때 겪는 안절부절함이다. 그래서 일상적 현존재는 대개의 경우 불안으로부터 도피한다. 즉 일상적 현존재는 불안의 기분인 으스스함으로부터, 다시말해 안절부절함으로부터 도피한다. 이러한 도피의 결과 일상적 현존재는 세계 내부적 존재자에 몰입하며 세인속에서 편안한 자신감과 자명한 느긋함을 즐기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삶이 모습은 본래적 자기로부터 뿌리 뽑힌 일상적 현존재의 퇴락적 삶의 모습이다. 퇴락속에서 불안의 흔적은 지워진다. 불안은 기껏해야 세계 내부적 존재자 앞에서의 두려움으로 남게 된다. 그러나 두려움은 비 본래적 불안이다. 세계에로 퇴락하여 공공성에 의거해 자기를 이해하는 일상적 현존재에게 본래적 불안은 아주 드물다. 그러나 이런 현상은, 실존적으로 보자면 오히려 현존재가 불안이라는 근본 정상성에서 자기의 본래적 존재를 찾을 수 있음을 입증한다. 불안속에서 ‘단독적 자기’로서 우뚝 선 현존재는 자신이 걸어왔던 퇴락적 삶의 모습을 되돌아보며 본래성과 비 본래성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직시한다. 즉 현존재는 불안의 기분속에서 이제 일상적 친숙함에서 벗어나 본래적 실존과 비 본래적 실존 사이에서 선택의 순간에 서게 된다. 일상적 현존재는 퇴락적 삶을 살고는 있지만, 불안은 일상적 현존재에게 본래적자기를 회복할 가능성을 열어준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현존재의 개시성의 하나의 계기인 ‘말’에는 그 본질적인 가능성의 하나로서 침묵이 속한다. 침묵은 말의 하나의 존재양식으로서 어떤 사항에 대해 타자를 향해 명확하게 자기를 표현하는 것이며 침묵하는 자는 끝없이 이야기하는 자보다도 좀 더 본래적으로 이해시킬 수 있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세계(세간)로 퇴락하여 ‘수다스러움’속에 몸을 두고 있는 비 본래적인 현존재를 향해 양심의 목소리는 언제나 침묵이라는 양태로 말하지만, 이 목소리는 분명히 본래적 자기의 가능성으로 불러들인다. 호소 받은 현존재는 침묵하면서 이것에 호응한다(말로 응대한다). 침묵이라는 양태에서의 이러한 대화법적인 구도는 하이데거에서 골격을 이룬다. 존재 혹은 존재의 집인 언어는 말없는 목소리로 또한 정적의 울림으로서 인간에게 호소한다. 이에 대해 인간은 성급하게 표명하는 것이 아니라 침묵하는 방식으로 알리며 호응하는 것이다. 나아가 메를로-퐁티에게 있어서는 원초적인 침묵과 구성하는 언어(철학도 이것이다)와의 뒤얽힘이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특히 만년에 들어서서는 침묵의 목소리로 말하는 세계 내지 존재의 호소에 응대하여 작동하는 언어가 철학이며 나아가 침묵이 언어를 포위하고 있는 까닭에 ‘철학은 침묵과 언어와의 상호 전환이다’라고 하여 하이데거의 구도를 변주하고 있다. 

빈말과 호기심, 애매성은 서로 작용하며 일상적 현존재의 개시성을 구성하고 있다. 빈말이란 말의 본래적 기능을 상실한 말을 가리킨다. 말은 세계의 이해, 타자의 공동 현존재, 그때그때의 자기의 고유한 존재에 대한 이해를 보존한다. 말은 현존재가 주변세계의 존재자 및 타자 그리고 자기 자신을 만날 수 있는 의미 지평이다. 따라서 말의 전달은 듣는 자가 말해지는 존재자의 존재에 참여할 것을 겨냥한다. 그러나 이미 일상적 공공성 안에 내던져져 있는 세인은 말해지는 존재자의 존재에 이르지 못한 채 ‘이야기되고 있는 것’(혹은 이야깃거리)만을 듣게 된다. 이로써 말은 말해지는 존재자의 존재와의 일차적 관계를 상실한다. 말은 자신의 근거를 상실한다. 빈말은 근거를 상실한 말의 일상적 양상이다. 호기심은 일상적 현존재를 특징짓는 규정들 중의 하나이다. 일상적 현존재에게서 호기심은 보다(視)의 일상적 존재양상이다. 우리는 호기심을 타우마제인(경이)과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타우마제인이 존재자를 경탄하면서 관찰하는 것이라면 호기심은 노선, 수단, 올바른 기회, 적합한 순간을 부여하는 둘러봄이 본연의 성격을 상실할 때 발생한다. 예를 들어 일상적 현존재가 휴식을 취할 때 세계-내-존재로서의 자신을 벗어나 멀고 낯선 세계를 지향할 때 호기심이 발동한다. 즉, 자유로워진 호기심은 보려고 추구한다. 그러나 그것은 보여진것을 이해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즉 보여진것에 이르는 존재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보기만을 위해서인 것이다. 이렇게 보려고 하는 마음 씀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파악하는 것도 지적으로 진리 가운데 있는 것도 아니고 자기를 세계에 내맡기는 제 가능성인 것이다. 호기심은 도처에 있으면서 그러나 어디에도 없다. 세계-내-존재의 이런 양상은 일상적 현존재가 부단히 뿌리 뽑혀 있다는 새로운 존재양식을 드러낸다. 빈말과 호기심은 상호 관련을 맺으면서 일상적 현존재에게 거짓된(비 본래적인) 인생을 안겨준다. 애매성은 일상적 현존재의 개시성을 성격 짓는 세 번째 현상이 된다. 애매성이 한편으로는 빈말과 호기심의 지배를 더욱 부추기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자면 빈말과 호기심이 지배하는 세계속에 던져진 상호존재 자체속에 애매성은 이미 놓여 있다. 빈말과 호기심, 애매성은 공공적으로는 은폐되어 있다. 사람들은 그들이 자기의 존재와 타인의 존재에 대해 지고 있는 책임 있는 관계를 몰각한 채 이렇듯 빈말, 호기심, 애매성에 의해 해석되어 있다는 지적에 대해 도리어 언제나 반발한다.


개시성의 구조 계기에서 보자면 양심의 부름은 말의 한 양상이다. 이에 반해 '양심을 가지려는 의지'는 양심의 부름에 대응하는 이해의 한 양상이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실존적 이해가 가장 독자적 존재 가능을 향한 기투를 의미하는 한 양심을 가지려는 의지는 실존적 이해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다분히 도식적이다. 양심을 가지려는 의지가 물론 근본적으로는 실존적 이해이나, 개시성의 3구조 계기는 서로 긴밀하게 맞물려 있다. 이를 좀 더 상세하게 분석해보면 다음과 같다. 양심은 불안을 전제한다. 세계앞에서 으스스함에 직면 할 때, 독자적 존재 가능을 회복하라는 양심의 부름은 시작된다. 그렇다면 양심을 가지려는 의지는 불안에 대한 준비가 된다. 양심을 가지려는 의지 역시 불안이라는 근본 정상성속에서 가능하다. 또한 양심의 부름은 침묵으로만 말하고 있다. 침묵은 오직 묵언속에서만 적합하게 이해된다. 양심을 가지려는 의지는 세인의 빈말에 재갈을 물려야 한다. 따라서 양심을 가지려는 의지속에 놓여있는 개시성은 불안이라는 근본 정상성, 가장 독자적 책임존재를 향한 자기 기투로서의 실존적 이해 그리고 묵언으로서의 말에 의해 구성된다. 양심을 가지려는 의지속에 놓여있는 개시성은 가장 독자적 책임 존재를 향해 말없이 불안에 대비하는 자기 기투가 된다. 따라서 이러한 개시성은 현존재의 본래적이고 두드러진 개시성을 증거 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개시성을 특히 결의성이라고 명명한다. 

결의성은 <존재와 시간>등에서 하이데거의 용어로서 각오성이라고도 번역된다. 세인속에 매몰되어 자기를 상실하고 있는 일상적이고 비 본래적인 현존재를 향해 양심은 자기를 되찾을 것을 부르짖고 이러한 부르짖는 소리를 이해하고 양심을 갖고자하는 것이 결의성이다. 양심을 갖고자 의지하는 것은 침묵하고 불안을 받아들이고 가장 자기적인 책무를 지닌 존재로 자기를 기투 하는 것이다. 결의성은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에로 향할 것인가를 규정하지 않는다. 이러한 미 규정성은 결의성이 개시하는 상황속에서 그때마다의 사실적인 가능성에로 기투 하는 것, 요컨대 결의(결단)에 의해 실존적으로 규정된다. 결의성은 개시성의 한 두드러진 양상이다. 결의성은 자신의 가장 독자적 존재가능을 회복한 현존재의 본래적 자기존재를 개시한다. 따라서 우리는 결의성을 본래적 개시성이라고도 명명한다. 또한 결의성이 죽음에 대한 불안속에서 확보된 현존재의 전체 존재 가능 안에서 현존재의 본래성을 증거하는한 우리는 결의성을 근원적 개시성이라고도 명명한다. 개시성은 근원적 진리로서 실존론적으로 해석된다. 이 근원적 진리는 일차적으로 판단의 성질이 아닐 뿐 아니라, 일반적으로 일정한 태도의 성질도 아니고, 세계-내-존재 자체의 한 본질적 구성요소이다. 진리는 기초적 실존범주로서 파악되어야 한다. 현존재는 진리 가운데 있다는 명제를 존재론적으로 천명 할 때 우리는 이 존재자의 근원적 개시성을 실존의 진리라고 한다. 실존적으로는 결의성은 본래적 자기존재를 개시한다. 결의성은 본래적 자기 존재라고 해서 현존재를 세계로부터 유리시키지도 않고 허공에 뜬 자아로 고립시키지도 않는다. 본래적 개시성으로서의 결의성은 세계-내-존재를 떠나서는 달리 본래적으로 있을 수도 없다. 결의성은 현존재의 자기를 용재자(도구적인 것은 이미 알려진 도구와 도구로 활용될 수 있는 존재자를 총칭하는 말이다. 도구적인 것의 존재는 용재성, 손안에 있음이고 이 용재성은 도구적인 것이 지닌 쓸모 즉, 적재적소 성, 사용사태로부터 이해된다. 용재성은 편리함을 수반한다. 편리함이라 용재자가 우리의 배시적(적재적소) 배려에 용이하게 가까이 놓여있음을 함축한다. 따라서 이 때의 가까움이란 순수기하학적 공간 안에서의 가까움이 아니라 우리의 생활의 편리에 맞는 가까움이다)에 몰입해서 배려하는 그때그때의 그 존재 속으로 끌고 들어오고 또 자기를 고려하면서 만나는 타자와의 공동존재 속으로 밀어 넣는다. 결의한 현존재는 스스로 선택한 존재 가능의 궁극 목적에 입각해서 세계를 향해 자기를 열어 놓는다. 자기 자신에 대한 결의성으로 인해 현존재는 비로소 함께 있는 타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가장 독자적 존재 가능에 있어서 존재하게 할 수 있고 모범을 보이면서 해방시켜주는 고려속에서 그들의 존재가능을 함께 개시할 수 있다. 결의한 현존재는 타자의 양심이 되기도 한다. 본래적 상호성은 결의성의 본래적 자기 존재로부터 비로소 나오는 것이지, 사람들이 도모하는 일이나 세인의 애매하고 질투로 가득 찬 협정과 수다스런 친목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다. 비 본래적 현존재 사이에서는 본래적 상호성이 불가능하다. 오직 결의성을 통해 본래적 자기성을 회복한 현존재 사이에서만 본래적 상호성이 가능한 것이다. 또한 일상적 현존재가 결의성에 의한 실존적 변양을 통해 본래적 자기 존재 가능을 회복했다고 해도 그 본래성이 영원히 유지되는 것은 아니다. 비록 세인의 비 결의성이 앞서 결의한 실존은 번의시키지는 못하지만 현존재가 현사실성과 퇴락에 의해 결정되어 있는 한 결의한 현존재도 다시 비 결의성으로 돌아오고 만다. 비 결의성은 현존재가 세인의 지배적 피해석성에 맡겨져 있다고 해석되는 그 현상을 표현할 뿐이다. 현존재는 세인-자기로서의 공공성의 상식적 애매성에 이끌려서 살아가게 된다. 공공성 속에서는 아무도 스스로 결의 된 바 없지만 언제나 모든 것이 이미 결정되어 있다. 결의성이란 세인속의 자기상실로부터 자기를 불러일으키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비 결의성은 실존론적으로 이해된 결의성의 반대개념이지만 여러 억압을 짊어지고 있다는 의미에서 어떤 존재(자)적, 심리적 상태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결의도 역시 세인과 그 세계에 여전히 의존하고 있다. 이것을 이해하는 것도 결의가 개시하는 것에 함께 속해 있다. 다만 결의성으로 인해 현존재가 본래적 개안을 얻는 한에서 그렇다. 결의성에 있어서도 현존재에게는 자기의 가장 독자적 존재 가능이 중대한 문제이지만 이 존재 가능은 피투적 존재가능으로서 일정한 현사실적 가능성들을 향해서만 자기를 기투 할 수 있을 뿐이다. 결의는 실제성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현사실적으로 가능한 것을 비로소 발견한다. 더욱이 그때 결의는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을 마치 가장 독자적 존재가능으로서 세인속에서 가능한 것처럼 파악한다. 그 때마다 가능한 결의한 현존재의 실존론적 규정성은 이제까지 간과해온 실존론적 현상 즉 우리가 상황이라고 부르는 현상의 구성적 계기를 포괄한다. 결의성은 현의 존재로 하여금 그의 상황 속에서 실존하도록 한다. 결의성은 양심 속에서 증거 된 본래적 존재가능, 즉 양심을 가지려는 의지의 실존론적 구조를 확정한다. 양심을 가지려는 의지 속에서 우리가 인식한 것은 양심의 부름을 적합하게 이해하는 것이다. 이로부터 분명해지는 것은 양심의 부름이 존재가능을 향해 불러일으킬 때 그 양심의 부름은 공허한 실존의 이상을 앞에 내걸지 않고 상황속으로 불러낸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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