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단히 간략한 나의 서양 회화사4

실용적이지만 비실용적인

by 늘심심

큐비즘에서 팝아트까지


제5차 솔베이 회의로 이어가기 전에 큐비즘을 이야기한다면 시간을 역주행하는 느낌이 있습니다만, 실제로 회화의 순수한 형식적 계보를 따지면 인상주의에서 바로 큐비즘으로 이어지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저는 보고 있습니다. 다다, 미래파, 야수파, 초현실주의 등이 세기의 담론을 담기 위한 각론이었다면 큐비즘은 인상주의가 확립한 회화적 형식과 자율성을 이어받은 적통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죠. 피카소가 시작하고 브라크와 함께 견인한, 큐비즘으로 불리는 이 형식은 시기적으로 볼 때 단명하였지만 세계는 결정된 것이 아니라 주관에 의해서 구성된다는 이후의 과학과 철학에 밀접하게 닿아 있기도 하고 추상회화와 결합되어 미국에서 꽃피운 추상표현주의의 토대가 된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습니다. 추상미술 이야기가 나와서 잠시 또 둘러가 보겠습니다.


20세기를 견인했던 또 하나의 거대한 철학적이고 경제학적인 이론은 자본에 대한 통렬한 분석과 그 현실적 대책을 담은 마르크스의 생각이었습니다. 『자본론』을 통해 당시에 이미 활성화 단계에 접어들었던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이에 대한 대안을 제시한 그는 엥겔스와 함께 공산주의라는 이념을 만들어냈고, 러시아에서 제정 황제 시대의 가난에 굶주리던 농노를 중심으로 무장 혁명을 이끌어낸 시절에 많은 예술가가 경도되었지만 빼놓을 수 없는 화가는 바로 말레비치였습니다. 그는 평면 회화와 추상성을 극한으로 밀어붙여 흰색의 사각형만을 남기는 순수 추상의 절대주의 회화를 선보이며 20세기 초반의 회화에서 중요한 이정표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공산주의 혁명에 동조하여 소비에트 연방공화국 초기 정부에도 참여하고 교편도 잡았습니다만 결국 그의 혁신적 회화는 스탈린에 의해 공산주의의 프로파간다적 사실주의를 강권당하는 바람에 그만의 작업을 하지 못한 채 거의 숙청되다시피 살아간 슬픈 과거도 있습니다. 국내도 많은 지식인과 예술가들이 당시로서는 힙했던 이 이념에 경도되어 북쪽을 향했지만 결과적으로 대부분 숙청된 일은 말레비치와 그 궤를 같이합니다. 이런 말레비치의 절대적 추상은 미국 미술과의 이론적 접점을 메우는 미국 중심주의의 계보로 인해 몬드리안과 칸딘스키로 이어지는 텍스트가 많이 보이지만, 추상미술의 이론적 토대를 세우는 데 핵심 역할을 한 중요한 화가였습니다. 물론 정치적인 뒷배경이 작용하고 있음도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죠.


이제 다시 솔베이 회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솔베이 회의란 어떤 것이었나는 위키백과를 참조하시면 좋을 것 같고(솔베이 회의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제5차 솔베이 회의는 고전 물리학과 양자역학의 충돌이었으며 세계관의 충돌이기도 했습니다. 통상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세계를 거시 세계라고 한다면 원자 단위의 세계를 미시 세계라고 부릅니다. 거시 세계의 물리적 해석은 이미 아인슈타인이 특수상대성 이론, 일반상대성 이론을 거쳐 확고한 당위성을 인정받았지만, 떠오르는 이론이었던 양자역학은 이 5차 솔베이 회의에서 증명을 받아야 했던 상황이었습니다. 닐스 보어로 대표되는 양자역학의 진영이 이 회의에서 설파한 것은 원자 이하의 세계에서는 입자의 위치와 속도를 동시에 측정할 수 없고 확률적으로만 존재하며 관찰이나 측정의 순간에 확률 파동은 붕괴하고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요지였습니다.


고전 물리학적 관점에서는 이 주장이 터무니없고 말이 되지 않는 것이, 이걸 거시 세계로 확장시켜 보면 모든 존재는 확률로서 존재하고 오직 관찰되는 순간에만 그 존재의 유무가 결정될 수 있다는 말과 마찬가지였기 때문이죠. 그래서 유명한 아인슈타인의 말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가 생기게 되었죠. 이후에 슈뢰딩거도 고양이 실험 상자를 고안하여 "확률적으로 죽거나 살아있는 중첩 상태의 고양이가 있는 것인가" 하고 비꼬았습니다만, 역설적으로 이 비꼼은 양자물리학을 아주 훌륭히 설명하는 표본처럼 통용되기도 했습니다. 이 5차 솔베이 회의는 사고실험의 검증으로 젊은이들로 이루어진 양자역학 측 과학자들이 그 이론적 타당성을 학계로부터 인정받았고, 6차 때도 똑같은 문제를 격파하기 위해 아인슈타인이 정교한 사고실험을 들고나왔지만 결과적으로 이것도 양자역학 측 과학자들이 그 사고실험의 허점을 지적한 이후 아인슈타인은 절치부심의 노력으로 자신의 주장을 우위에 세우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성과 없이 세상을 뜨고 말았습니다.


그림 이야기하는데 웬 장황한 과학 이야기냐고 하신다면, 이 5차 솔베이 회의에서 다루었던 주제는 이후의 문명과 문화 전반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치며 현대 사회의 이론적 기초를 다져주었기 때문입니다. 비근한 예를 들어 이 회의에서 양자역학의 개념이 증명되지 못했다면 전기전자 문명 기반의 현대 문명 자체가 어쩌면 다른 방향으로 흘렀거나 아예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미시 세계에 속하는 전자의 상태에 대한 정확한 해석이 있어야 전기전자의 흐름 제어가 가능하고 그 위에 우리가 사용하는 통신기기와 컴퓨터, 핸드폰의 제작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5차 솔베이 회의에서 미시 세계의 불확정성은 엄밀한 과학적 사고실험을 통해 증명된 세계의 불연속성과 고정된 속성의 부재를 드러내며 1차 세계대전을 전후로 한 어떤 믿음의 체계가 완전히 무너지고 있음을 동시에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 회의가 개최된 1920년대는 제임스 조이스가 『율리시즈』로, 쇤베르크는 12음계로,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철학논고』로 모든 방면에서 이성으로 쌓아 올린 근대적 인간관을 해체하고 있었습니다. 현대를 문화적으로, 혹은 역사적으로 어떻게 구분하느냐에 대한 이견이 있을 수 있지만 저는 1920~30년대가 20세기 내내, 그리고 21세기까지 영향을 미치는 모든 것들의 에피스테메(Episteme)가 형성된 시기라고 보고 있습니다.


1920년대에서 2차 대전 이전까지 존속했던 예술사에 중요한 또 하나의 실험이 이루어졌는데 바로 독일의 바우하우스입니다. 바우하우스는 발터 그로피우스가 주축이 되어 설립했고 건축, 디자인, 공예, 미술 등을 전인 교육과 결부시키고 기숙생활을 통한 공동 작업을 권장한 독특한 학교였습니다. 지금도 바우하우스적 조형 원리가 건축이나 제품 디자인으로 남겨지고 사용되어지는 것을 보면 현대인의 생활에 맞는 공간과 이미지에 대한 연구가 철저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바우하우스의 조형 원리는, 바우하우스 이전인 1896년 미국의 건축가 루이스 설리번이 그의 책 「The Tall Office Building Artistically Considered」에서 말한 명제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말로 많이 설명 되곤 합니다. 저도 집에 이케아 가구가 몇 개 있습니다만, 사실 북유럽의 전통보다는 이 바우하우스의 조형 원리가 마치 제 가구에 새겨져 있는 것 같습니다. 나치에 의해 학교를 닫을 때까지 어려움 속에서 교육은 지속 되었고 이후 미국에 그 원리가 이식되어 '블랙 마운틴 대학'의 교과 과정에 큰 역할을 하게 됩니다. 당시 이곳에서 교편을 잡았던 요제프 알버스는 후에 블랙 마운틴 대학의 교육 체제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1차 세계대전의 혼란을 피해 뉴욕으로 건너온 마르셀 뒤샹과 프란시스 피카비아 등이 미국 토양에 유럽 전위 예술의 씨앗을 심어 놓은 가운데, 대공황 시절 '연방미술프로젝트(WPA)'를 통해 거대한 벽화 작업 등을 경험하며 자생력을 키우던 미국의 젊은 화가들은 제2차 세계대전을 피해 대서양을 건너온 유럽의 거장들과 운명적으로 조우하게 됩니다. 유럽 초현실주의의 '자동기술법'과 무의식에 대한 탐구, 추상미술은 미국의 거대한 스케일과 결합하여 잭슨 폴록의 '액션 페인팅', 마크 로스코의 '색면 추상'으로 대표되는 추상표현주의로 폭발했습니다. 비평가 클레멘트 그린버그는 회화의 순수한 본질을 '평면성'으로 규정하며 추상표현주의에 확고한 이론적 정당성을 부여했습니다. 이 평면성이란 평면 위에 그려지는 비재현적 행위의 결과이자 화면 안에서 태어나고 순환하는 추상성을 말한다고 저는 간단하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 평면성은 추상표현주의뿐 아니라 이후에 추상표현주의에서 감정이 거세된 두 가지 경향의 미술 형식에도 그 밑바탕이 됩니다.


한편, 추상표현주의가 기울기 시작하는 1952년 미국 미술사에서 중요한 이벤트 중의 하나가 벌어집니다. 블랙 마운틴 대학의 여름 학기에서 음악가 존 케이지, 데이비드 튜더, 화가 라우센버그, 안무가 머스 커닝햄, 시인 찰스 올슨 등이 주도한 최초의 '해프닝'이 벌어지며 예술과 삶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전위적 실험이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각본 없이 각자가 자유롭게 동시에 자신의 예술을 표현하는 '우연성'과 '동시성'은 미국 내에서 이전의 미술과 이후의 미술을 잇는 중요한 다리 역할을 하게 된다는 점도 짚고 가고 싶습니다. 블랙 마운틴 이야기가 이 짧은 회화사에 몇 번이나 언급되는데, 미국 예술 교육 제도와 미술사에서 중요한 위상을 차지한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해서 브런치의 다른 글에서 보다 깊게 다루어 보겠습니다.


1960년대에 접어들며 추상표현주의의 주관적 과잉과 숭고함에 대한 반발로 두 가지 대조적인 흐름이 공존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는 미니멀리즘입니다. 프랭크 스텔라나 엘스워스 켈리 같은 작가들은 감정과 환영을 철저히 배제하고, 회화를 단지 물감과 평면으로 이루어진 '물리적 사물' 그 자체로 되돌려 놓았습니다. 프랭크 스텔라가 말한 "당신이 보는 것이 곧 당신이 보는 것(What you see is what you see)"이라는 선언처럼, 이들은 가장 절제된 기하학적 형태만을 남기며 회화의 극단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컴퓨터의 유저 인터페이스 설명에도 이와 비슷한 문장이 동원되곤 합니다. 위지윅(What you see is what you get)이란 문장 말이죠. 분야는 다르지만 시각적 즉자성이라는 측면에서 세월의 간극은 좀 있지만 유사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선언이 그린버그의 평면성의 법칙에 기초하고 있음도 주지의 사실입니다만, 회화를 사물의 영역으로 이동 배치시킴으로써 도리어 그린버그는 회화의 평면성을 해쳤다고 크게 격노했습니다. 그렇지만 미니멀리즘은 회화뿐 아니라 입체 작업, 건축, 디자인 등 시각 예술 전반에 걸친 광범위한 흐름으로 발전되었고, 추상미술에 바우하우스의 이념과 그린버그의 평면성이 동시에 작용할 수 있었던 탓에 많은 지지를 받았으며 현재의 우리 삶 곳곳에 포진하고 있는 하나의 형식이자 형태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서사가 모두 거세된 기능적 형태가 남은 미니멀리즘은 이후에 뒤샹이 설파한 '망막적 미술'을 거부하고 우리의 인지 작용에 바로 작동하는 미술이라는 개념과 결합해서 개념미술로 향하는 중요한 다리의 역할도 함께 수행했습니다. 이 시기를 전후로 하여 옵아트, 사이키델릭 아트, 슈퍼리얼리즘 같은 회화 형식이 넓게 펼쳐졌지만 여기선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또 하나의 흐름은 추상표현주의의 엄숙함을 세속적 이미지로 치환해 버린 팝아트였습니다. 상업 미술을 전공했던 앤디 워홀은 티셔츠 디자인에나 쓰는 실크스크린을 이용해 대중적, 상업적 이미지들을 복제해 냈고 로이 리히텐슈타인은 코카콜라 병이나 만화 같은 대중매체의 이미지를 캔버스 위로 무한히 복제해 들였습니다. 이는 장 보드리야르가 말한 '시뮬라크르(Simulacra)' 개념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발터 벤야민의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도 이 개념을 이해하는 데 참고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고대로부터 시작된 원본과 복제의 이야기는 추상표현주의로부터 시작된 회화적 평면성 위에 고스란히 이식되면서 미국적 미술의 이론적 지원을 받으며 크게 성장했습니다. 남미의 무장해방을 이끌었던 체 게바라조차도 그의 복제의 대상이 되었고 그의 혁명가로서의 가치는 상업적 가치로 탈바꿈되어 티셔츠에 새겨져 지금까지도 시중에서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세속적 접근 방식은 아놀드 하우저가 그의 명저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제4권에서 묘사했고 클레멘트 그린버그가 「아방가르드와 키치」에서 언급한 키치적인 속성과 결합되어 오늘날 데미안 허스트, 무라카미 다카시 등의 작업으로 이어져 오고 있는데 무라카미 다카시는 그의 작업을 팝아트와 연결해서 직접 설명한 바도 있습니다.


팝아트 이후에도 회화는 계속 살아남아 오늘날까지 아주 잘 작동하는 형식이지만 일단 여기까지 마무리하고 최근이라고 할 수 있는 상황까지는 차후에 하나씩 꺼내어 써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렇게 달리는 말 위에서 경치 구경 하는 것처럼 원시시대로부터 팝아트까지 제 머릿속에 정리되어 있는 회화의 흐름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쓰면서 더 강조해야 할 부분이 많이 걸렸지만, 실용적이지만 비실용적으로 쓰기 위하여 많은 것을 제외했는데 이후에 한 편씩 중요 지점을 확대해서 쓰는 방식으로 보강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글을 쓰면서 발생 연도를 잘못 기억하고 있는 탓에 꼬여 있는 개념이 얼마나 많은지 체감해서 저장된 데이터를 많이 수정해서 기억 속에 다시 집어넣었는데, 일종의 글쓰기의 이점이기도 하여서 나름 성과도 있었습니다.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리며 이 주마간산의 글자 더미는 이제 한쪽으로 쓸어 모으시고 자신만의 예술적 감각을 단련해 나가시길 기원해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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