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에 오르면 답이 있을 줄 알았다
정상에 오르면 답이 있을 줄 알았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무엇을 버려야 하는지,
이제는 흔들리지 않아도 되는지.
그래서 이를 악물고 올라갔다.
리패션이라는 일을 시작했을 때는 철학이 없었다.
먹고살기 위해 손을 움직였고,
하루를 넘기기 위해 바늘을 잡았다.
패턴을 그리고,
잘못 자른 원단을 버리고, 다시 재단했다.
그 과정에서 수없이 접었다 펼친 것은
옷감만이 아니었다. 생각도 그랬다.
사람들은 묻는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어요?”
나는 대답을 망설인다.
올라온 길이 하나로 이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직선은 없었고, 굽이굽이 뿐이었다.
오르막인 줄 알았던 길이 사실은 제자리걸음이었고,
내려가는 줄 알았던 순간이 방향을 바로잡는 시간이기도 했다.
수선은 기다림의 기술이다.
급하게 당기면 옷은 더 망가진다.
천은 생각보다 기억력이 좋아서,
잘못 꿰맨 흔적을 오래 품는다.
삶도 비슷했다.
서두른 선택은 늘 다시 풀어야 했다.
그때마다 나는 실밥을 뜯으며 같은 생각을 했다.
아, 아직 덜 왔구나.
어느 날, 사람들이 말하는 ‘정상’에 서 있었다.
일은 익숙해졌고,
손은 말을 잘 들었으며,
웬만한 상황에도 당황하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그곳에서 만난 것은 확신이 아니라 질문이었다.
이제는 흔들리지 않아도 되는가?
여기가 끝인가?
이상하게도 정상에서는 바람이 더 불었다.
아래에서는 보이지 않던 길들이 한꺼번에 보였다.
잘못 들어섰던 골짜기,
돌아 나왔던 숲길,
포기하고 싶었던 비탈.
그제야 알았다.
내가 버텨온 것은 방향이 아니라,
의심하면서도 계속 걷는 태도였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철학자가 되지 못했다.
대신 개똥철학자가 되었다.
논리로 정리되지 않는 말들,
그러나 다시 일어서게 만든 생각들.
“조금 늦어도 괜찮다”,
“망가진 건 고치면 된다”,
“내려가는 것도 길이다” 같은 문장들 말이다.
이 글은 답을 주지 않는다.
정상에 올라와서야 알게 된 것은,
답은 애초에 없었다는 사실이다.
다만, 각자가 지나온 굽이굽이가 있었고,
그 길을 부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정도의 확신만 남았다.
나는 오늘도 옷을 고친다.
그리고 생각을 조금씩 고친다.
아마 이 글도 언젠가는 다시 뜯어고치게 될 것이다.
그게 내가 정상에서 배운,
유일하게 확실한 기술이다.
리패션 하는 개똥철학자(장호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