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김영하의 인생 사용법'이다.
‘인생은 일회용으로 주어진다’는 서두로 김영하의 세계가 펼쳐진다.
‘인생 사용법’으로 제목을 지으려다가 내게 주어진 ‘단 한 번의 삶’으로 바꿨단다
일반적인 자기 계발서나 인생지침서처럼 ‘인생은 이러니 이렇게 살아라, 저렇게 살아라’ 훈계조나 설명조였다며 재미없을 텐데, 작가는 본인이 살아온 삶을 담담하고 솔직하며 다양한 비유를 들어 진지하게 들려준다.
이번엔 신간 SNS 홍보를 보고 미리 예약했다. 그만큼 작가에 대한 믿음이 강했으니까 가능한 특별한 경험이다. 덕분에 책장에서 잠자고 있던 먼지 덮인 소설까지 꺼내봤다. 예전부터 좋아하는 작가라 출간된 책은 거의 다 읽었다. 그중 '오직 한 사람'에 있는 단편들이나 '오빠가 돌아왔다'류를 좋아하는 것 같다. 특히 작가와 동년배라 작가의 작품을 읽으며 같이 성장하고, 같이 늙어 가는 기분이다. 그래서인가? 이번 작품이 더 편하게 읽혔다. 비록 음악 취향은 글 속의 작가의 부친을 닮았지만 말이다.
작가는 무엇이든 시작하면 십 년은 지속했다고 한다. ‘십 년은 무엇이든 일단 시작해서 띄엄띄엄해 나가면 어느 정도는 그럭저럭 잘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에 충분한 시간’이라고 이야기한다. 하고자 하는 일을 향해 꾸준히 노력하는 모습이 좋았던 것 같다. 내가 닮고 싶었던 부분이기도 하다. 나는 용두사미가 제법 많다.
처음으로 소설 비슷한 것을 쓴 게 중학교 2학년 때였으니 40년, 여행은 30년이 넘게, 25살에 시작한 운전도 30년, 마당을 가지게 된 게 2015년이니 식물을 가꾼 지는 9년, 요리는 17년이 되었다. 철들어서 처음 그림을 그린 것이 랄랄라 하우스 삽화 때부터였으니 그림 그리기는 20년이 되었다. 머리서기 성공도 근 20년에 걸친 띄엄띄엄 요가 수련의 결과다. …… 인간은 보통 한 해에 할 수 있는 일은 과대평가하고 십 년 동안 할 수 있는 과속 이는 과소평가한다는 말을 언젠가 들은 적이 있다. <p,71>
내용 중에 요가 자세 중 '머리서기'를 열심히 하다가 정수리가 휑해진 이야기. 부모님과 독립한 후부터 매일 아침 커피를 내려 마시는 중요한 루틴 커피 이야기. 그림 그리는 이야기. 젊어서 자연보다 도시를 좋아한다고 이야기하다가 이젠 마당이 있는 집에서 꽃과 나무를 키우며 사는 이야기들을 특유의 위트와 기억력으로 진솔하고 재미있게 들려준다.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특유의 관찰력과 분석력을 겸비하면서 말이다.
글씨를 잘 써야 한다고 ‘우물 정(井) 자’를 하루에 천 번을 쓰게 하던 군인 아버지와 육군본부 타자수 출신임에도 돌아가실 때까지 과거를 숨기던 '엄마의 비밀' 은 읽는 내내 미소 짓게 한다. 요즘 세상이라면 자랑할 일인데 그 시절은 직업을 가진 걸 감추고 싶은 환경이었나 보다. 어쨌든 멋진 아버지를 둔 덕에 뭐든 시작하면 십 년을 하는 끈기가 생긴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또 글씨(글자)를 잘 써야 한다는 아버지와 타자를 잘 치는 엄마 덕에 평생 글로 먹고사는 건 아닐까? 오묘한 조합이다. 타자기. 워드프로세서. 컴퓨터로 빠르게 변화하여 글씨체가 점점 춤을 추고, 글자 쓸 일이 줄어들고 있는 세상이긴 하지만 말이다.
작가가 화천에서 태어났고, 내 고향 양평에서도 잠시 머물렀다고 해서 그런지 유년기의 많은 부분이 공감 됐다. 어쩌면 '우연히 지나가다 봤을지도 모르는데...' 그러나 그때 나는 면소재지에서 거의 벗어난 적이 없는 시골소녀였다. 11월 생임에도 1년이나 일찍 학교에 입학해서 고생한 이야기를 들으니 짠하기도 했다. 내 친구들도 아직도 그런 이야기를 종종 한다. 예나 지금이나 교육열은 대단했던 것 같다. 특히 명동을 좋아하고 야로를 잘 쓰시던 엄마라 더 그랬을지도... 1986년 당시 22.3%만 대학에 가던 시절이었다는 이야기에는 ‘맞아 그땐 그랬었지’하며 박수를 쳤다. 또 신설고에 배정받아 우는 친구도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오히려 신설학교에 들어가 수평문화에 익숙해 권위에 매혹될 필요가 없는 삶을 살아왔을지도 모른다고 이야기한다.
아버지와의 에피소드를 다룬 챕터의 소제목이 ‘기대와 실망의 왈츠’였는데 얼마나 제목이 어찌나 기발하고 멋지던지 감탄사를 내뱉었다. 작가는 시인이 됐어도 명시인이 됐을 것 같다. 소제목들이 유난히 글과 잘 어우러지는 게 감칠맛이 난다. 특히 부자 시간의 소음이 왈츠처럼 들려왔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기대와 실망이 뱅글뱅글 돌며 함께 추는 왈츠와 닮았다. 기대가 한 발 앞으로 나오면 실망이 한 발 뒤로 물러나고. 실망이 오른쪽으로 돌면 기대도 함께 돈다. 기대의 동작이 크면 실망의 동작도 커지고 기대의 스탭이 작으면 실망의 스탭도 작다. <p.61>
이번 산문집을 읽으며 또 ‘맞아 맞아’를 연발하던 부분이 여럿 있는데, 특히 나이 들어가면서 과거와 현재에 달라진 사고나 변화된 일상을 얘기할 때, 정말 남일 같지 않았다.
'라면을 좋아하던 그가 라면을 잘 안 먹어 걸핏하면 유통기한이 지나고, 이십 대 삼십 대에 매일 술을 마시고. 아내와 와인을 마시며 하루를 마치는 게 이상적인 결혼생활이라 생각하던 그가 이제 한 달에 한 번이나 마실까 술에서 멀어지고, 몸속에 분노도 많았는데 이젠 조용히 물러서기도 하고 성숙했는지 비겁해지기도 했다고 고백한다' <p.72>
나도 이제 라면은 연례행사쯤 되고, 좋아하던 술도 멀리한 지 오래다. 어쩜 그렇게 나와 비슷하게 늙어 가는지… 나도 내가 이렇게 달라질 줄 미처 몰랐다. 지금은 그처럼 책을 읽고 싶어도 눈이 안 좋아 힘이 든 지경이니, 어쩜 이렇게 비슷한 노화의 과정을 겪고 있는지, 나만 그런 게 아니라서 참 다행이다.
'사람 변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흔히들 하지만 사람은 평생 많이 변한다. 노력으로 달라지기도 하고 환경에 적응하기도 한다. 행동도, 마음도, 습관도, 조금씩 달라지다가 그 변화가 누적되면 전혀 다른 사람처럼 되어 버린다...... 20대의 나는 길에서 마주쳐도 지금의 나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지금의 나 역시 10대의 나를 그냥 지나칠 것이다. 그래도 우리는 그 사람이 과거의 그 사람과 같은 존재라고 해서 믿으며 살아간다. <p.76>
위 문장은 누구랄 거 없이 모두 공감되는 이야기일 거라고 생각된다.
'모른다'라는 챕터의 문장도 너무 좋았다.
정말 우리는 의외로 내가 나를 모르고. 부모형제도 나를 모를 수 있다.
보이는 나가 '나'인지? 내가 생각하는 나가 '나'인지, 남이 바라보는 나가 '나'인지? 언제나 딜레마다.
내가 나를 모르고, 나를 낳은 엄마도 나를 모를 때, 다행히 세상에는 의외로 나를 잘 아는 이들이 있다. 얼마 전 머리를 깎으러 미용실에 갔는데 미용사가 정수리 부근이 빨갛게 부어올랐다고 알려주었다. 정수리를 바닥에 대고 하는 요가 자세를 많이 연습해서 그렇다고 했더니 앞으로는 매트 위에 수건을 깔고 하라고 충고해 주었다.... 그들은 내가 절대 볼 수 없는 부분을 보아주는 사람이었다. <p.95)
특히 글 쓰는 제자들에게 주는 조언을 읽으며 나도 얼굴이 빨개졌다.
글 쓰는 제자들이 ‘제가 작가가 될 수 있을까요?’라고 물을 때면 ‘작가가 되고 싶으면 계속 쓰면 되고, 되고 싶지 않으면 안 쓰면 되지 않나’ 학생들은 ‘하고 싶음’이 아니라 ‘할 수 있음’에 더 관심이 많다. ‘하면 된다’가 아니라 ‘되면 한다’는 의 마음 나는 누구에게도 답을 주지 않았다. 작가가 되고 싶으면 계속 쓰면 되고, 되고 싶지 않으면 안 쓰면 되지 점쟁이도 아니고 미리 물어보고 글을 쓸까 말까 하는 건 아닌 것 같다;고 단호하고 명확히 이야기한다고 한다. <p.141>
어느 부분에서는 <나는 작가보다 독자다. 글은 가끔 쓰지만 책은 언제나 읽는다.>라며 겸손하게 고백한다.
작가의 꿈은 '유능'한 사람과 '교양'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고 한다. 그 부분은 확실히 성공한 것 같다. 작가처럼 센스 있고, 상식 많고, 교양 있는 이도 드물 테니 말이다. 산문집 속에 등장하는 자잘한 상식과 책만 다 읽어도 충분히 교양인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수많은 길 중에 갔다가 되돌아온 일도 있고, 가지 않은 일도 있다고 하는데 ‘교수 김영하'. '영화감독 김영하'. '방송인 김영하’ , '만화가 김영하', '셰프 김영하' 보다 나는 ‘소설가 김영하’가 좋다. 사실 '방송인 김영하'도 나쁘지 않고, 모든 게 융합된 작가도 좋다. 타고난 순발적과 재치가 있으니 방송인도 적합한 영역이라고 생각하는데 떠나야 할 때를 아는 것도 선택 못지않게 중요한 일이리라.
지난 작품 <오직 두 사람>의 ‘한 번도 살아보지 않은 삶’을 이야기하고, 이번 작품에서는 ‘단 한 번의 삶’을 이야기한다. 우연한 인연일까?
작가는 책 마지막 부분에서 <삶을 사유하다보면 문득 이상하게 느껴진다.이토록 소중한 것의 시작 부분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시작은 모르는데 어느새 내가 거기 들어가 있었고, 어느새 살아가고 있고, 어느새 끝을 향해 가고 있다>고 심정을 토로하며 <내가 알고 있는 것은, 그저 내게 ‘단 한 번의 삶’이 주어졌다는 것뿐. 많은 이들이 인생을 무시무시할 정도로 치열하게 살아간다는 것>이라고 이야기 한다. 정말 우리에겐 ‘단 한 번의 삶’만 주어졌다. 그것도 유효기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아무도 알 수 없다.그저 현재를 묵묵히 살아내는 수 밖에...
책을 덮으며 나도 나만의 중간 자서전 격인 '인생사용법'을 써 봐야 하는 건 아닌가 싶다.
챕터마다 주옥같은 문장이 너무 많아 인용하고 싶은 걸 줄이느라 너무 힘들었다. 특히 철학적인 부분은 내 깜냥으로 옮기기 어려워 읽어 보기를 추천한다.
간만에 밑줄 그으며 열심히 읽었다. 그리고 잊지 않기위해 흔적을 남겨 둔다.
이 책은 김영하 작가가 조금 일찍 쓴 자서전 같은 ‘김영하의 인생 사용법'이다.
#김영하 #인생사용법 # 단 한 번의 삶 #산문집 #기대와 실망의 왈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