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단편소설과 사랑에 빠진 여름

단편소설 18편을 읽고 또 읽었다.

by 따오기

단편소설을 집중적으로 읽어본 것은 내 생애 처음이다.
한 달 동안 주어진 작품 18편을 최소 두 번, 많게는 네 번까지 읽고 또 읽었다.


여러 편의 소설을 읽으며 소감을 적다 보니, 그동안 내가 책을 얼마나 듬성듬성 읽어왔는지 새삼 알게 되었다. 이번 필사를 계기로 책을 집중해서 읽고, 쓰기로 마무리할 때 비로소 온전히 내 것이 되는 듯한 기분을 얻었다. 단편소설 필사 참여는 특별하고도 좋은 경험이었다.


초반에 읽은 권여선의 「역광」은 쉽지 않았다. 그러나 마지막 날 다시 「안녕 주정뱅이」를 펼쳤을 때 전에 보이지 않던 장면들이 새로 다가왔다. 역시 집중과 반복이 답이었다. 아마 지난번에는 잡념이 많았던 듯하다.

덕분에 권여선의 단편집에 실린 「봄봄」, 「삼인행」, 「이모」를 인상 깊게 읽었고, 이어 「오늘 뭐 먹지」와 「술꾼들의 모국어」까지 만났다. 음식에 대한 조예와 술을 향한 애정이 가득한 권여선의 작품 세계를 본격적으로 맛본 셈이다. 앞으로 김성중, 최진영, 성혜령, 박연준 작가들의 작품도 자주 만나게 될 것 같다.


특히 「대성당」, 「개구리」, 「질문하는 여자들」, 「물가 가까이」, 「뜨개질하는 요물들」을 읽으며, 내가 생각보다 외국 소설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새삼 알았다. 외국 소설들은 기교는 단순한데, 왠지 여운이 오래 남았다.


출퇴근길 전철에서 하루 두 시간, 습관처럼 보던 유튜브와 SNS를 줄이고 책을 읽었다. 뉴스를 덜 챙겨도 세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고, 집에서도 TV를 덜 보게 되었다. 앞으로도 허투루 보내던 시간을 책 읽는 시간으로 바꾸리라 마음먹었다. 다만 돋보기 도수가 점점 높아지는 게 걱정이다.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게 인생인가 보다.


필사 책은 「대성당」만 급히 전자책으로 구입했고, 대부분은 시간이 비교적 자유로운 그이가 도서관 상호대차로 빌려왔다. “마누라가 글 쓰는 모습이 제일 좋다”며 불편해하지 않고 즐겁게 지켜봐 주는 그이가 늘 고맙다. “이러다 내가 독서왕 되는 거 아니냐”라고 농담하며 함께 웃던 순간도 기억에 남는다. 언젠가는 꼭 글로 그 은혜를 갚아야 할 텐데, 매번 폼만 잡으니 큰일이다.

나 역시 도서관계 일을 하지만, 상호대차 제도는 늘 고맙다. 관내 도서관 책을 거의 다 대출할 수 있는, 공동 자원을 활용하는 좋은 예다.


이번 주 짧은 여름휴가에서도 숙소에서 필사를 하고, 오가는 차 안에서 감상평을 쓸 정도로 정성을 다했다. 솔직히 이번 여름 한 달은 단편소설과 진한 연애를 한 기분이다. 열여덟 명의 작가와 그들의 작품을 읽고 또 읽으며, 상대를 알아가는 즐거움을 만끽했다. 덜 읽히는 작품도 있었지만 끝내 극복하려 애썼다.


좋은 작품을 엄선해 주신 숭례문학당 김민영 선생님께 무한한 감사를 드린다. 함께 ‘좋아요’를 누르며 응원한 글친구들의 따뜻한 마음도 고맙다. 촌철살인 같은 평을 남겨주신 분들이 있어 더 정진할 수 있었다.


즐거운 읽기가 즐거운 쓰기로, 그리고 좋은 일상으로 이어지기를 소망한다. 평소 막연히 생각만 해오던 독서 모임에도 용기 내어 참여해보고 싶다.


한 달간 너무 뜨겁게 사랑해서, 당분간 며칠은 애인을 떠나보낸 듯 많이 허전할 것 같다.





18편의 단편소설 목록과 리뷰 중 일부


1. 우리가 가는 곳:/ 편혜영

‘실종대행업’이란 직업이 있는 줄 미처 몰랐다. 사라지는 것을 조용히 처리해야 하는 실종대행업? 세상엔 참 다양한 직종이 있다. 제목을 ‘실종대행업’으로 지었어도 좋았을 것 같다.

2. 역광/ 권여선

어렵다. 유사성과 인접성은 어느 쪽이 우리에게 더 기쁨을 줄까? 생각해 본다.

유사성은 동질감이 들기도 하지만 때론 답답하기도 하다 인접성은 부지불식간에 스며들고 동질화되는 무서운 기질이 있는 것 같다. 소주를 부르는 글이다.

3. 대성당/레이먼드 카버

맹인 로버트와 10여 년간 음성 녹음으로 교류하며 지낸 아내의 심정을 이렇게 묘사했다. <그녀는 얘기가 하고 싶었다. 그들은 얘기를 나눴다. 그는 그녀에게 테이프를 달라고, 어떻게 사는 얘기해 달라고 했다.>라는 부분에서는 많은 이들이 어딘가 글을 올리고. 사진을 올리는 게 특정하지 않은 누군가에게 얘기를 하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4. 이소 중입니다/이주혜

<그 담배의 절반은 바람이 피울 것이지만 아무도 바람을 원망하지 않을 것이다. 누구라도 무엇이라도 원망하기에 그들은 모처럼 즐겁기만 할 것이다.> 인상 깊은 소설이다. 절대 잊히지 않을 것 같은 독특한 소설이다. 마치 이상의 글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보들레르의 시를 읽는 기분이랄까?

5. 장례세일/박지영

동그랑 땡 이야기를 읽다가 앞으로 장례식장 가면 음식을 맛나게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고 누구처럼 포장까지 해 올 의지도 용기도 없고요.

코로나 시절에 돌아가신 엄마의 장례식을 떠올리곤 했던 소설입니다.

6. 개구리/후안 가브리엘 바스케스

개구리가 임신테스트 용도로 쓰일 줄이야~~

내용 중에 <가장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 행동은 가장 적게 하지요>라는 부분이 인상 깊네요.

7. 내가 돈을 많이 받고 싶은 이유/김의성

책을 읽으면서 <돈이 없을 때는 오늘만 살면 되는데, 돈이 생기면 내일까지 걱정하기 때문이다. 씀씀이를 늘리지 말고 오늘 하루를 살아내는 데 집중하라.>라는 부분을 옆에 있는 짝꿍에게도 읽어주고 또 읽어줬다.

8. 유진/최진영

이 소설은 읽다 보면 내가 스무 살로 돌아가 있고, 지나온 여정 속에서 만났던 이들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추억을 소환하는 소설이다. 그만큼 상황과 심리를 섬세하게 묘사한 작품이다.

9. 어차피 세상은 멸망할 텐데/공현진

‘잘하는 사람은 앞 줄. 못하는 사람은 뒷줄’, 그건 딱히 수영 수업에만 해당되는 게 아니라 뭘 하든 단체활동의 암묵적 규칙이랄까 불문율이다.

10. 원경/성혜령

“너, 네가 보고 싶어 하던 영화 보면 그 영화 얘기만 계속하고 내가 보고 싶어 하던 영화 보면 끝나고 맨날 딴 얘기만 했던 거 알아?” 처음 이 문장을 읽고 가슴이 찔렸다. 단순한 불평처럼 들리지만, 그 안에는 공평하지 않은 관계의 무게가 담겨 있었다.

11. 물가 가끼이/클레어 키건

어쩌면 인생이란, 바다의 깊이를 모른 채 뛰어드는 자와 너무 깊을까 두려워 끝내 발을 담그지 못하는 자, 그 두 부류로 나뉘는 건지도 모른다.

12. 한두 벌의 다른 옷/박연준

‘꼭짓점이 여덟 개인 진짜 별.’ 팔각 향 때문일까, 내게 뱅쇼는 치유의 음식이었다. 누군가에게 뱅쇼를 만들어 준다는 건 참 아름다운 일이지만, 그 아름다움이 때로는 상대를 버겁게 만들기도 한다. ‘이별의 이유를 묻는다면, 우리는 종종 명확하게 대답할 수 없다.’ 갑자기, 언젠가부터 소원해진 친구가 떠올랐다.

13. 귤락 혹은 귤실/김성중

‘모래시간 인간’, ‘문턱의 시간’, 그리고 ‘결코·언제나·그런데요’로 이어지는 작명까지, 그는 표현의 대가요 이름 짓기의 장인 같다. 덕분에 ‘김성중’이라는 키워드를 입력하며 전자책 사이트를 기웃거린다. 오늘은 그의 작품을 하나 더 읽고 싶다.

14. 결심들/프란츠 카프카

가장 짧은 소설인데 소감을 쓰기 가장 난해한 소설이다. 카프카의 무게 때문인가? 분량의 길이 때문일까? 나도 잠시 그의 문장처럼 눈썹 위를 새끼손가락으로 잠시 쓰다듬어 본다.

15. 시골에서의 결혼 준비 /카프카

책을 두 번이나 읽었는데 풍경이 정확히 그려지지가 않는다. 시작과 끝이 명료하지 않은 기분이랄까? 결혼의 설레임이나 그녀를 언급하는 과정이 아주 적게 묘사되어 ‘시골에서의 결혼 준비’라기보다 ‘시골에서 나를 찾아가는 여정’ 같이 느껴진다. 카프카는 여전히 어렵다.

16. 벚나무와 마술피리/다자이 오사무

이제 벚꽃이 필 때면 오사무의 ‘벚나무와 휘파람(마술피리)’도 덩달아 생각날 것 같습니다.

17. 질문하는 여자들/버지니아 울프

같은 여자의 입장에서 생각하게 되고. 시대의 변화에 따라 여성의 역할이나 순결의 의미가 변화함을 보여준다. 성을 초월해서 좋은 사람과 좋은 책을 쓰는 데 매진해야 할 것 같은 생각을 갖게 한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믿는 법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18. 뜨개질하는 요물들/마거릿 애트우드

뭉클했다. 인간 역시 온전히 한편에 속하지 못한 채 늘 경계 위에 서 있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문턱은 우리 삶에 흔히 찾아오는 변화요 위기다. 그래서 단순한 뜨개질의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실종자의 귀환과 새로운 시작을 품은 숭고한 이야기로 다가왔다. 페미니즘적이고 판타지적인 기운 속에서, “다른 이가 먹는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냥 딴 곳을 보도록” 하는 다양성과 배려까지 염두한다.



#단편소설 # 단편소설필사 #필사 #숭례문학당 #권여선 #책읽는여름 #상호대차 #독서모임 #여름의기억 #단편소설과사랑에빠진여름 #대성당 #개구리 #봄봄 #최진영 #김성중 #최진영 #이주혜#편혜영 #박연준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