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일에 당사자이고 싶진 않지만 노력은 하고 싶습니다.
화요일과 목요일 오후 1시 아쿠아로빅을 다니고 있다.
물에서라도 움직이면 좀 낫겠거니 기대하며 열심히 다니고 있는데 이제 3개월 차.
몸무게의 변화는 0.1g도 없다. 슬프지만 이내 마음을 고쳐먹는다.
몇 년을 차곡차곡 쌓아온 살들인데 몇 달 만에 변하지 않는 게 맞는 거지.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자.
비가 와서 또 가기 싫다고 뭉그적거리다가 엄마 핑계로 집을 나선다.
아마 엄마는 나 때문에 가는 것일 테고, 나는 엄마 때문에 간다.
서로 핑계가 되어주는 것이다.
체육관에 도착해서 안면인식으로 보관함을 배정받고 엘리베이터를 탄다. 엄마가 내 뒤에 오고 있어서 열림 버튼에서 손을 뗐는데 그 순간 바로 문이 닫혀버렸다. 엄마는 정말 영화처럼 엘리베이터 문에 손을 대면서 뒤로 쿵! 하고 넘어졌다. 소리도 컸고 우리가 제일 처음 엘리베이터 탑승객이었던 터라. 움직이지 못하는 엄마를 앉은 채로 두고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먼저 올라가시라고 3번이나 인사를 했다.
안 그래도 모녀가 같이 다닌다고 이쁘다고도 해 주시고, 첫 수업 가는 날 오전에 매장 가서 급하게 산 수영복이 파란색과 민트색이라 모두 검정 일색인 수강생들 틈에서 매우 튀는 위치였는데 오늘의 ‘꽈당 사건’을 계기로 수업의 모든 사람이 엄마와 나를 주목하게 되었다.
넘어진 거 괜찮냐고, 머리는 다치지 않았느냐고 다들 물어보시는데 엄마는 이미 너무 창피해서 어쩔 줄 모르고 나는 눈앞에서 마치 영화에서 보던 한 장면처럼 쿵~팍! 하고 대자로 넘어진 그 장면이 너무 웃겨서 웃느라고 어쩌지를 못하겠는 거다.
엄청 아플 텐데, 어찌해 줘야 하는데, 웃음만 나서 죄송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이 자꾸 물어보는데 웃느라고 대답도 못 하고.( 실상 아는 것도 없었다. )
우여곡절 끝에 운동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엄마는 다른 사람들이 웃음 참는데 얼마나 혼났겠냐며 한마디 하신다. 나는 그 말에 또 아까 넘어지던 엄마 모습이 떠올라 웃는다.
아마 일주일은 웃을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는데 헤어지고 생각해 보니 내가 웃을 수 있었던 건 나름 사건의 당사자여서이지 않았나 싶은 것이다. 내가 넘어진 것은 아니지만 나 외에는 웃을 수가 없는 상황이지 않았나? 그런데 나는 그 상황에 왜 그렇게 웃기만 했던 건가? 반추하면서.
책을 읽는데 문장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언 손을 녹이는 것은 언 손일지 모른다.’
얼어있는 것을 녹이는 것은 늘 따뜻함이라고 생각해 왔다.
다만 몇몇 특수한 경우에는 언 손만이 언 손을 녹일 수 있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이다.
가령 아버지를 내가 대학교 4학년에 사별하고 난 뒤 친구들이 부모님과의 사별을 겪을 때 나를 가장 먼저 떠올렸던 것처럼. 내가 먼저 겪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위로. 당사자만이 가능한 것.
내가 멈추지 않고 웃었던 것은 어찌할 바를 모르겠는 웃음은 아니었을까?
그 순간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고 모든 사람은 우리를 쳐다보고 엄마는 민망해하고.
뒤늦게 나의 웃음에 엄마가 상처받진 않았을까 슬쩍 미안해지기도 한다.
물어볼 용기는 없지만 그러시지 않길 기도해 본다.
의도하지 않아도 내가 어떤 일의 ‘당사자’가 되는 경우는 앞으로도 많을 것이다.
가능하면 조롱과 웃음의 당사자보다는 언 손을 내밀 수 있는 당사자가 되고 싶다. 그렇지만 그러려면 온갖 고통을 먼저 겪어야 하니 그건 좀 어렵겠고 마음만 가다듬는다.
내 손이 따뜻하든, 얼어있든 손을 내밀며 살아야 하겠다고.
“ 엄마, 그날 너무 많이 웃어서 미안해! 진짜야! 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