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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노래 Oct 12. 2021

귀를 기울이며

사라질지도 모르는 것에 대해


굳이 부정적 이미지를 품은 단어를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코로나 원주민”은 운명적인 단어가 될 듯하다. 상상해보자. 엄마 외에 다른 사람의 존재를 처음 인식하기 시작할 때 그 “사람”은 내 앞에선 절대 마스크를 벗지 않는다. 간혹 얼굴을 보여 줄 때는 내가 익숙한 집이라는 공간 뿐이다. 스스로 이동이라는 것을 할 수있게 되면서부터는 또 어떤가. 집 밖으로 나가려면 보호자라는 존재만큼이나 내 숨을 가로막는 마스크를 써야한다. 집 밖의 공기란 위험한 것이며, 유해할 가능성이 농후한 것이다. 타인의 숨이란 경계와 의심의 대상이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좋지만 가까이 갈 수는 없다. 거리두기란 정책이 아니라 삶의 기본자세인 것이다. 그렇기 배웠고 그 배움의 과정은 진지하고 심각했으며 예외란 없었다.


예측할 수도 없는 이들 원주민의 세계관이 궁금하다. 이들 “관계의 거리어떻게 몇cm일까? 2020(혹은 2019) 이전에 출생한 사람들 사회적으로 어울리는 시기가 오면  간극은 어떻게 작용할 것인가? 당신과 내가 친밀하기 때문에 허용하는 cm 얼마나 차이가 날까? 그건 긍정적일까, 부정적일까.


누군가의 말을 ‘잘’듣기 위해, 혹은 그 사람에게 더 가까이 가고 싶었기에, 귀를 가까이 댄다는 핑계로 몸을 숙이고 간격을 좁힌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귀를 기울인다는 것은 사실 친밀함을 너머 존중과 사랑이 담긴 행위이다.

이 따스하고 멋진 동작이 사라지지는 않을까 두려워진다. 새롭게 편성되는 관계의 거리가 얼마나 될 지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 올지는 알 수 없지만, 귀를 기울이는 동작의 존재가 위태로운 것은 사실이다.


당신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귀를 기울이는 날이 사라지면 차라리 인스타의 좋아요에 집착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슬픈 일이다. 경계의 마음으로 상대를 대해야 한다는 것은. 그저 바라는 것은 비록 불안을 떨쳐내지 못할지라도 누군가의 이야기에 대한 애정은 사라지지 않기를. 인간성이란 이야기를 얼마나 들어주느냐에 있는 것이니까. 코로나든 포스트 코로나든 사람은 각자의 이야기 속에 살아가며, 누군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길 바라니까. 그러면서 울고 웃어주길 원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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