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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노래 Jun 15. 2021

소극장 속 나무 이야기

- feat. 연극 ‘허탕’

강렬하고 뜨겁다.   번도 햇빛이 강렬하고 뜨겁다고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 내리꽂히는 빛은 뜨겁다. 햇빛처럼 포근하고 따스한 느낌이 없다. 늦가을 저녁의 훈풍, 얼어붙은 겨울에 칼날처럼 꽂히는 정오의 , 열대야에 갑작스레 쏟아지는 . 내가 있던 곳에는 반전과 대비의 아름다움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뜨거울 뿐이다. 그리고 뜨거움이 사라지면 어두울 뿐이다. 불쾌한 열과 암흑.   가지만이 나를 뒤덮고 있다. 도대체 이곳은 어디인가?


고통스러운 기억은 잊힌다고 한다. 그것을 방어기제라고 했던가. 사람들이 붙인 이름이 무엇이든 간에 나는 그 이름을 붙인 사람들로 인해 그것을 경험했다. 기억이 되살아난 것은 불과 며칠 전, 아니 며칠이 지났다고 느껴진 때였다. 귀를 찢는 듯한 날카로운 굉음과 부서지고 깨지는 단단한 나의 옷, 가차 없이 파고드는 칼날과 끊겨나가는 동맥. 그리고 굴복과도 같은 쓰러짐. 그렇게 끝이었다. 사람들이 나무라고 부르던 나 ‘기태’의 일생은. 그 쓰러짐이 슬프지는 않았다. 어차피 어디에서 시작된 삶인지 모르는 운명이었으니. 다만 처음이 그랬던 것처럼 마지막도 나의 계획이나 의지와 무관하게 진행된 것이 씁쓸할 뿐이었다. 나의 감각과 연결되었던 민경과 신재는 둘 다 일백 년을 넘겼다. 그러나 그들 역시 계획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하루가 지나가서 내일이 쌓였을 뿐. 밤이 지나고 아침이 되어 하루가 시작되면 그저 하루를 더 사는 것일 뿐. 그렇게 나의 오늘이 끝났다. 나는 수많은 기태로 쪼개져서 이곳으로 왔다. 뜨거움과 어둠만이 존재하는 곳.


다시 뜨거움이 시작된다. 흥미로운 것은 긴 어둠이 끝나고 뜨거운 빛이 내려오기 전에 음악이 흐른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강한 바람이 밀려오기 전에 오싹한 기분이 드는 것처럼 뜨거움을 경고하기 위한 음악인 줄 알았다. 그러나 어느 날은 아무런 소리도 없이 빛이 내려오기도 했다. 도무지 예측할 수 없는 일이었다. 확실한 것은 빛이 시작되면 사람들이 보인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주 많이 웃긴 장면이 펼쳐진다. 자신들의 인생을 지켜보며 울고, 웃고, 침울해하고, 즐거워한다. 바로 어제, 아니 당장 일 분 전에 당신들이 겪고 느끼고 생각했던 일인데 그것을 재연해내는 모습을 신기하게 지켜보는 모습이라니. 사람이란 알 수 없는 존재다.


‘허탕’이란 글자가 보인다. 이곳의 생활에 적응하고 깨달은 것은 그날 보여주는 인생의 모습에 각자 이름이 있다는 것이다. 오늘의 이름은 ‘허탕’인가보다. 한 남자가 사람들 앞에 앉아 있다. 그리고 두려워한다. 그 남자는 아무런 잘못도 없는데 감옥에 갇혔다고 외친다. 당장 꺼내 달라고 소리친다. 그러자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던 다른 남자는 이곳이 편하고 좋은 곳이니 그러지 말라고 충고한다. 단 한 번도 거르지 않고 나오는 맛있는 음식, 평온함을 유지하기 위해 언제든 들을 수 있는 클래식, 알맞게 푹신한 침대, 적절한 온도와 습도. 모든 것이 완벽하니 가만히 있으면 된다고 조언한다. 그렇게 남자는 감옥생활에 적응하고, 편안해하고, 즐긴다. 그러다 한 여자가 감옥에 갇힌다. 말을 하지 못한다. 감옥에 완벽하게 적응한 남자는 여자를 돌본다. 다른 남자는 둘이 잘 지내라고 응원한다. 그렇게 둘이 행복하게 보내던 날, 사소한 일로 싸움이 일어나고 그 모습에 충격을 받은 여자는 말을 하기 시작한다. 시어머니의 괴롭힘에 유산한 이야기를 소름 끼치게 털어놓으며 절규한다. 그녀의 남편이 되고 싶었던 남자는 그 모든 일을 부정하며 자신과 여자의 기억을 지워 나가려 한다. 아, 방어기제를 스스로의 의지로 쓸 수도 있구나. 나는 신기했다. 그 모든 아비규환을 지켜본, 가장 먼저 온 남자는 감옥 문을 밀어서 연다. 그리고 나간다. 남은 남자와 여자는 감옥 문을 스스로 열 수 있다는 진실을 잊고 싶어서 더 감옥 생활에 몰두한다. 그리고 결국 잊는다.

나는 알고 있었다. 감옥 문은 언제나 열 수 있었다는 것을. 남자가 감옥에 적응하려 애쓰는 모습을 보는 내내 웃음을 참느라 죽는 줄 알았다. 그러다가 남자가 완전히 적응하자, 더는 웃기지 않았다. 나는 그 순간이 제일 싫었다. 그보다 안타깝고 슬픈 일은 없었다. 문을 열고 당장 나가라고 소리쳤지만, 사람들은 못 들었다. 지난 80년간 숱하게 보아오던 모습을 무대 위 의자가 되어서도 또 봐야 한다니.


나의 마지막 순간에 내가 맞이했던 씁쓸함이 사라진다. 내가 나무라서 처음과 마지막을 스스로 정하지 못한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나의 마지막을 결정지었다고 생각한 사람이란 존재도 사실은 처음과 마지막을 모르는 존재였다. 그리고 그 사실조차 잊은 존재였다. 심지어 자신의 자리를 주장하지도 못했다. 오히려 나는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을 지키기라도 한 행운아였다. 나는 사람들이 아는 것이 너무도 없다는 것이 놀라웠다. 살아 숨 쉬는 날들은 그저 운 좋게 하루하루가 쌓인 것이라는 진실을 그들은 몰랐다. 더 흥미로운 것은 처음부터 몰랐던 것이 아니라 알고도 잊고 싶어서 결국 모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내가 지켜본 대부분의 인생은 그렇게 흘러갔다. 나는 끊임없이 외쳤다. 당신의 내일은 당신이 모른다고. 그저 흘려보내지 말라고. 내일도 편할 거라 믿지 말라고. 내일을 모를 뿐 결정은 당신 몫이라고. 다시 기억해내라고. 그래야 문을 열 수 있다고. 그래야만 나갈 수 있다고. 그러나 아무도 듣지 못했다. 다시 무심하게 어두워지고 아무도 남지 않았다.


어두워지면 나는 생각에 잠긴다. 본다고 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슬픈 일이다. 사람들은 자꾸 잊고 실수를 반복한다. 그 모습을 보며 안타까워하는 것도 지쳐간다. 나는 아마도 나무로 살아온 시간의 반도 이곳에서 살지 못할 것이다. 벌써 몸에 습기가 차고 허리가 아프다. 갓 구워낸 빵처럼 푹신한 땅이 자꾸 더 그립다. 한파 속에서도 손으로 짠 머플러처럼 감싸주던 햇빛이 자꾸 생각난다. 더는 누구도 나를 위해 짚을 둘러주지 않는다. 그저 버려두고 또 사용할 뿐이다. 그러나 수많은 인생을 지켜보는 관객으로 생을 마감하는 것도 괜찮은 일이다. 내일이 주어지는 것은 그저 주어지는 거라는, 그래도 문을 열 마음만 있다면 언제든 열 수 있다는 두 가지 진실을 이미 깨달았으니, 나는 사람들보다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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