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October 2024
네 젊음을 안일하게 보내지 마. 은빛에 가까운 60대의 남성이 내 눈을 마주하며 말했다. 그의 말에 위기감을 느꼈다. 그의 말에 나는 젊음을 허송세월로 넘기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대학교 3학년 봄학기 때 근로장학생으로 일했다. 졸업을 위해 필요한 서류를 정리하거나, 학생증과 신분증을 확인하며 졸업 인증 시험을 돕는, 누구나 할 수 있는 단순한 일이었다. 지루함을 벗어나는 몇 안되는 순간은 학장님의 커피 심부름을 할 때였다. 학장님이 커피 좀 부탁할 수 있냐고 물으면 나는 광개토관 지하에 있는 카페로 내려갔다. 광개토관 지하에 있는 카페에서 너티 원두의 뜨거운 아메리카노 한 잔, 내가 마실 프루티 원두의 차가운 아메리카노 한 잔을 사서 학장실로 돌아온다. 학장님과 커피 타임을 즐기며 3시간을 순식간에 보낼 수 있다고 다른 근로장학생에게 전해 들었다. 물론 학장님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전부라곤 했지만 나는 이야기를 오래 듣는 것에 싫증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었다. 특히 나이 든 사람의 이야기는 언제나 배울 점이 있다. 향기롭게 나이 드는 법과 그렇지 않은 법을 알려주니까.
“안녕하세요. 여기 커피 드릴게요.” “엉, 너도 여기 앉아.” “네, 커피 잘 마시겠습니다.”
“그래, 너는 처음 보는 것 같네. 몇 학년이니?” “3학년입니다.” “전공은?” “교육학과입니다.” “복수 전공은?” “없습니다, 단일 전공만 하고 있어요.” “신기하네~ 보통 인문대 애들은 취업 걱정 때문에 복수 전공하던데. 형제자매는 있니?” “네, 언니가 있어요.” “언니는 뭐하니?” “건설 쪽에서 일하고 있어요.” “오~ 건설 쪽이라... 어머니랑 아버지는 뭐 하시니?” “어머니는 간호조무사로 일하고, 아버지는 작년에 폐암으로 돌아가셨어요.” “그렇구나.”
“나도 어릴 때 어머니를 일찍 보냈어.” 그리고 시작된 그의 이야기, 서울 소재 4년제 대학교의 어엿한 단과대학의 장이 되기까지 불우했던 가정사, 경력을 쌓기 위해 가족을 제쳐두고 자신의 성공에 집중했던 그의 사연을 들었다. 정말 힘드셨겠어요. 대단하세요. 어떻게 그렇게 행동할 수 있으셨어요. 나는 그의 이야기가 매끄럽게 이어질 수 있도록, 중간중간 공감의 말을 건넸다. 그가 대단하다고 느껴질 때도, 지루하다고 느껴질 때도. 이번엔 ‘존경스럽습니다’ 라고 말하는 게 오버하는 것처럼 들릴까? 머릿속으로 생각을 굴릴 때쯤 그가 나에게 물었다.
“너 자격증 준비하는 거 있니?”
“네, 토익 준비하려고요.”
“그래, 얼른 준비해. 네 젊음에 안일하게 굴면 안 돼. 그냥 엄마랑 언니랑 저녁 맛있게 먹고, 오늘 하루도 잘 보냈다, 끝. 이러면 안 된다. 어떻게 하면 성공할 수 있을까 늘 고민하며 젊음을 보내야 해. 나중에 결혼할 때 너는 아버지 손을 잡지 않고 결혼식에 서게 될 거야. 그때 네가 떳떳하게, 폼나게 서 있을 수 있으면 좋지 않겠니. 현실이 그래.”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나는 처음 떠올렸다.
결혼식에서 누구의 손을 잡지 않은 채로 서 있는, 하얀 드레스 차림의 우뚝 서 있는 나를.
우습게도 그걸 성원이 떠난 지 1년이 지나서야 알게 된 것이다.
지난 여름, 성원이 죽었다. 성원이 조금씩 죽어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엄청난 양의 진통제를 맞고 있었으니까. 결국은 그 진통제에 취해 성원은 죽을 것이다. 대신 덜 아프게. 뇌에 전이된 암세포 때문에 머리가 아파 울었던 것처럼은, 그만큼의 고통은 아닐 거라고 간호사가 말했다. 나는 옆에서 딱히 뭘 하는 건 아니었는데도, 그의 옆을 지키는 게 쉽지 않았다. 암 병동 중환자실에서 10시간 넘게 그의 옆을 지키는 것은 허리도 아프고 배도 고프고 눈도 침침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중환자실은 의자도 딱딱하고 환자들이 먹는 맛없는 밥만 있고 저녁이 되면 금방 어두워지는 곳이었다.
왼편에 있는 심전도 모니터를 줄곧 봤다. 리듬이 위로 올라갔다가 아래로 내려갔다가 반복적으로 흐름을 유지하고 있었다. 사람은 이렇게 작은 높낮이로 살아가는구나. 미약하고 규칙적인 저 박동으로 꾸역꾸역 살아가는구나.
청각은 의식이 없을 때도 남은 감각 중 가장 오래 살아있는 감각이라고 간호사가 말해줬다. 엄마는 그걸 듣자마자 성원의 귀에 이어폰을 꽂아 박강성이 부른 장난감 병정이라는 제목의 노래를 재생했다. 성원과의 연애 시절, 그가 노래방에서 자주 불렀던 노래라고 했다. 나는 그때 성원이 좋아하는 노래를 처음 알았다. 노래방을 가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것도. 엄마는 성원의 귓구멍이 딱딱한 이어팁 때문에 아플까봐 귓구멍에 딱 맞게 넣지 않고 부드럽게 걸쳤다. 그가 말하지 않으니 불편한지 알 수 없어 우리는 거듭해서 이어폰의 위치를 바꿨다.
몇 주간 아산 병원을 드나들다가, 몇 시간 잠만 자고 옷을 챙기려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버스에 올라타고 세 정류장 정도 지났을 때 언니에게 전화가 왔다. 아빠 상태가 많이 안 좋아졌대. 지금 가야지, 아빠 임종을 볼 수 있대. 다시 병원으로 돌아와. 성원의 이야기만 나오면 눈물짓던 언니가 울지 않고 침착하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코로나가 극심한 상황임에도 운 좋게 우리 모두 그의 임종을 지킬 수 있었다. 원래는 1명만 보호자로 있을 수 있는데. 가족이 한자리에 모여서 그의 끝을 지켜볼 수 있는 건 행운일지도 모른다. 행운일 거야. 성원의 오른쪽 손바닥을 펼쳐서 내 손을 포개고 깍지를 꼈다.
심장 리듬이 드라마처럼 뚜 - 하고 멈췄다. 며칠 동안 자지 못해 구석에서 졸고 있었던 엄마가 소리 지르며 성원에게 달려왔고, 언니는 성원의 옆구리에 얼굴을 파묻어 흐느꼈다. 나는 문을 열고 밖에서 조용히 수다를 떠는 간호사 무리 중, 눈에 익은 간호사에게 말했다. 아빠가 멈추셨어요. 내 말을 들은 간호사는 의사 선생님을 부르겠다고 말했고, 의사를 호출한 뒤 나와 다시 병실로 들어갔다. 간호사에게 알리기 전과 그대로인 모습으로 모두가 있었다.
몇 분 있다가 의사가 와서 사망 시간은 10시 35분이라고 말했다. 내가 알고 있는 시간은 10시 28분이었다. 그건 나만 알고 있는 사실로 남겨두기로 했다.
성원의 지인이 보냈던 화환을 계속 봤다. 옆에서 다른 장례식을 치르던 가족이 걸어가면서 여기는 왜 이렇게 화환이 많냐고 말하는 걸 들었다. 나는 속으로 말했다. 성원은 사람을 좋아했으니까. 그가 좋아했던 사람들이 그의 마지막을 보러 왔다. 그와 연관된 모든 사람이 왔다. 그의 유일한 형과 엄마 빼고.
할머니는 장례식을 치르는 그 시간 동안 성원의 죽음을 몰랐다. 할머니는 몸이 아팠기 때문에 마음마저 아프게 할 수 없다는 친가 어르신들의 결정이었다. 성원의 죽음을 그렇게 조용히 흘러갔다. 이후로 친가와의 교류는 없었다. 명절마다 함께 웃고 떠들던 큰아빠네 가족과 소원해졌다. 엄마와 언니는 장례식장에 핑계를 대며 오지 않는 큰아빠네 가족을 욕했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성원이 원하는 걸까? 우리가 이렇게 큰아빠를 욕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지, 그 마음을 헤아리기 어려워 가만히 있었다.
장례식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 성원이 누웠던 침대에 누워 잠들었다. 일상을 시작했다. 밥을 먹고, 사람들과 연락하고, TV를 보고, 잠에 들었다. 이래도 되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지만, 그 생각은 오래 머물지 않았다. 삶은 그저 이어졌고, 나는 그 속에 다시 몸을 담갔다. 술을 마시면 옥상에 올라가 박강성의 '장난감 병정'을 반복 재생해 들었다. 젊은 날의 성원이 노래방에서 이 노래를 불렀을 순간과 죽기 전 그의 귀에 이어폰으로 흘러 들어갔을 순간을 떠올리며, 노래를 들었다. 딱딱한 이어팁을 귀에 오래 넣으면 아팠을 텐데, 혹시 아팠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그렇게 성원에 대해 생각하다가 옥상의 찬바람에 몸이 배배 꼬이고 콧물이 마르면 집으로 내려왔다. 뜨거운 물로 샤워하고 성원이 누웠던 넓었던 침대에 들어가 잠에 들었다. 그렇게 누우면 여기서 빨갛고 불콰했던 얼굴로 대자로 누워 잠들던 모습도 생각나고, 그의 몸처럼 길던 베개를 다리 사이에 끼고 꼭 안은 채로 옆으로 돌아누워 잠들던 모습도 생각났다. 나는 그의 흔적이 남은 베개를 꼭 껴안고 잤다. 베개에서 눅눅하고 아늑한 냄새가 났다. 그렇게 누우면 이제야 숨죽여 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장례식장에서 꾹 참아냈던 울음을 모아 그 방에서 조금씩 터트렸다. 반년을 그 방에서 보냈다.
언니 꿈에는 나온다는데, 왜 내 꿈에는 한 번도 안 나오는지. 내가 성원을 좋아한 만큼 미워했던 걸 하늘에서 알아버려서 그러는가 속으로 생각했다. 친구를 만날 때 아빠가 돌아가셨다고 말하지 못했다. 그런 말을 하는 상상만 해도 눈물이 나왔고, 사람들 앞에서 우는 내가 이상하다고 느껴졌다. 내가 울면 다른 사람도 난처해질 것 같아서. 그래서 혼자 우는 건 괜찮은데, 다른 사람 앞에서 울기 싫었다. 이야기하지 않았다. 너는 네 이야기를 잘 하지 않아서 서운하다고 말하는 친구들에게, 나의 근황을 묻는 사람들에게 말할 수 없었다. 낮에는 너희랑 만나서 웃고 밤에는 혼자서 운다고. 내가 고장난 상태라는 걸 알리고 싶지 않았다.
학장님과 이야기를 마치고 일하던 곳으로 돌아가기 전에, 잠시 화장실에 들렀다. 문득 멍해졌기 때문이다. 어떤 어른도 내게, 아빠 없이 살면 이런 게 서러울 거고, 저런 것이 서글플 거라고 말해 준 적 없었다. 내가 모두에게 아빠가 없다는 걸 숨겨서, 그래서 말하는 사람이 없었던 거야? 아니면 내가 불쌍해서 말해주지 않았던 거야?
아빠가 보고 싶어서 서럽게 울었지, 아빠가 없어서 서러운 건 몰랐다. 내 처지가 다른 사람에게 서럽게 비출 수 있다는 생각을 못 했던 거다. 그래서 아빠가 없는 나는 다른 애들보다 더 떳떳하게, 폼나게, 젊음을 치열하게 살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못 했던 거다.
내가 멍청했었나, 진짜 내 젊음에 안일했던 걸까.
성원이 없는 세상 속에서 여전히 그를 찾아 물었다. 아빠, 나 안일했던 걸까?
변기에 앉아 학장님과 나눴던 이야기를 핸드폰 메모장에 적었다.
2021년 5월 11일 메모.
안일하게 젊음을 보내지 말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