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바다라고 부르고 싶어

20 November 2024

by 밀리


오래 기억하고 싶을 정도로 다정한 사람을 만나면 난 그 사람을 자연물에 비유해. 자연물은 변하지 않는, 한결같은 이미지잖아. 그런 사람에게 어울리는 표현이라고 생각하거든. 그래서 너를 바다라고 부르고 싶어.


바다야, 나는 너를 14살 때부터 알고 있었어. 나는 8반, 너는 6반이었잖아. 너희 반에 친구를 만나러 가면 늘 짧은 단발머리에 빽빽한 앞머리, 길고 짙은 속눈썹, 큰 눈을 가진 네가 보였어. 네 키가 작았던 것과 주위에 시끄러운 친구들이 많았던 것도 눈에 띄는 것에 한몫하긴 했어. 막연하게 성격이 좋은 애인가 보다 생각하고 말았던 것 같아. 그러다 16살 때 너랑 같은 반이 된 거야. 우리는 함께 알고 지내던 친구가 있어서 쉽게 같이 어울려 노는 무리가 되었어. 같이 급식도 먹고, 수다도 떨고, 집에 가고, 고민을 나누고.


너는 누군가를 항상 도와주고 싶어 하는 사람이었어. 네가 단 한 번도 친구의 부탁을 거절한 걸 본 적이 없어. 다른 친구들이 바다야 매점 가자, 화장실 같이 가자, 체육복 빌려줘, 이것 좀 해줘, 먹는 거 좀 나눠줘, 내 고민 좀 들어줘, 나랑 같이 밥 먹어줘. 너는 흔쾌히 너의 시간을 내어주는 사람이었어. 네 것과 내 것이 명확히 존재했던 시기의 나는 네가 보여주는 넉넉한 품이 늘 경이로웠어. 경이로운 사람.


그런 너를 지켜보다가, 너랑 친해 보이지 않는 애들이 너에게 무리한 부탁을 하는 게 싫은 거야. 쟤는 바다랑 친하지도 않은데 왜 급식 먹을 시간에 저런 고민을 나눠서 바다가 밥도 못 먹게 해. 바다는 왜 또 저걸 다 들어주고 앉아 있어. 그럼 나는 바다 옆에 앉아서 잘 알지도 못하는 애의 고민을 같이 들어줘. 고민이 길어지면 옆에서 우연히 급식 먹을 시간이라는 걸 알아차린 것처럼 생뚱맞게 말해. 어? 근데 우리 밥 먹을 시간이야! 남은 이야기는 나중에 말하자. 라고 말하며 바다 팔을 잡고 식당으로 내려가. 지금 생각해 보니 너를 다른 친구에게 뺏기기 싫어서 필사적으로 네 곁에 있었어. 알고 있었던 거야. 한없이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세상에 흔치 않다는걸. 그런 사람은 모두가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뺏기고 싶지 않았던 거야. 너는 언젠가 본 책의 주인공 같은 사람이었어.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잠자코 들어주면서, 그 사람이 스스로 생각하고 정리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네가 나보다 한 살 더 많아서 그런가? 바다는 어떤 사람이길래 누군가 무리한 부탁을 해도 연민의 마음을 갖고 도와줄 수 있을까? 두 팔 다 걷고 자기 일처럼 다른 사람을 도와줘. 지나가는 사람이 곤란한 얼굴을 하고 있으면 너는 꼭 가서 물어봐. 혹시 도와드릴까요?


너와 처음으로 크게 싸웠던 일이 있어. 나는 전날 봤던 영화의 주인공이 너랑 닮았다고 생각했어. 그 영화의 주인공은 우정을 소중히 여기며 의리로 가득 찬 아름다운 사람이었어. 죽음을 앞둔 주인공은 친구들을 불러 모아, 우정의 소중함과 아름다움을 일깨워주는 이야기의 영화였어. 나는 네가 이 주인공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너한테 이 영화 주인공과 네가 비슷하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네가 이 주인공이 죽게 되는 이유와 비슷한 이유로 죽을 것 같다고 말했어. 그냥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너한테 지껄인 거지. 내가 왜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말했는지 지금도 모르겠어. 뇌가 잠시 빠졌나? 심지어 너한테 이런 영화를 봤었고 이런 영화의 주인공이 너와 비슷하더라는 사전 설명 없이, 그냥 네가 그 영화의 주인공처럼 죽을 것 같다고 말한 거야. 내 말을 들은 너는 처음에 뭐? 하고 놀라다가 장난으로 넘겼어. 그리고 우리 둘은 웃으면서 헤어졌고, 너는 나에게 아주 긴 문자를 남겼어. 긴 문자의 요지는 이랬지. 아무리 장난이어도 친구에게 그렇게 죽을 것 같다는 말은 하면 안 되는 말 같다고. 이 말에 대해 네가 사과하지 않으면 너를 오래 보기 힘들 것 같다고.


나는 그날 문자를 본 공간과 날씨를 모두 선명하게 기억해. 나의 헛소리를 기억해. 문자를 받은 순간, 온 마음을 다해 헛소리를 반성하고 진심으로 사과하는 내용의 장문 문자를 보냈어. 문자를 보내고도 눈물이 멈추지 않고, 손이 달달 떨리는 거야. 네가 나와 다시는 만나지 않아 줄 것 같아 너한테 전화했어. 네가 핸드폰을 꺼놓았더라고. 문자를 몇 개 더 보냈어. 너의 답장을 기다리는 시간 동안 내가 서 있는 땅이 좁아지는 느낌이었어.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한 말실수가 너무 한심한 거야. 나는 너를 정말 좋아했거든. 어쩌면 나보다 더 너를 좋아했을지 몰라. 그런 너에게 상처를 준 게 나여서, 내가 밉고 싫었어. 저주스러웠어. 네가 내 연락을 받지 않는 기간 동안 한참을 멍하게 살았고, 끝내 나는 네 친구의 자격이 없다는 결론을 스스로 내렸어. 너와 내가 있는 모든 채팅방에서 나갔고, 우리 둘과 친밀했던 몇 사람에게도 이 사실을 말했어. 내가 너희에게도 말할 수 없을 정도의 말실수를 바다에게 저질렀다고.


내 연락을 일주일째 받지 않는 너에게서 미안함이 원망스러움으로 바뀌는 감정을 느꼈어. 왜 내 연락을 안 받아. 왜 내 사과를 안 받아줘. 나는 친구와 싸운 것이 처음이었거든. 그것도 그냥 친구가 아니라, 내가 깊게 의존하는 사람이었는데. 우리 둘을 잘 알고 있는 친구가 나의 상황을 너에게 알려주었고, 바다 너는 내 용서를 받아줬어. 네가 나중에 나한테 말해주었지. 일주일의 시간 동안 너는 화를 내려놓고 찬찬히 생각해 보았다고. 그래..얘라면 아무 생각 없이 이야기한 게 분명해. 악의는 느껴지지 않아. 그러니까 사과를 받아주자.


너의 용서와 별개로 한동안 나는 이때의 일을 생각하면 많은 감정이 들어서 몸이 얼어붙을 때가 종종 있었어. 누워있다가도 발작하는 것처럼 벌떡 일어나 자세를 고쳐 앉고 그때를 곱씹었어. 나는 왜 너에게 그런 바보 같은 말실수를 저질렀고, 너는 왜 핸드폰을 꺼놓았을까. 말실수할 때마다 이렇게 내가 혐오스러워진다면, 내 입을 마구마구 때려주고 싶어진다면. 나는 앞으로 누구랑 만나서 우정과 사랑을 나눌 수 있을까. 나는 왜 이렇게 아둔할까. 다시는 말실수하지 말아야지. 조금 더 촘촘하게 상대를 생각하는 말을 해야지.


그렇지만 바다야, 그 이후로도 나는 너에게 말실수를 자주 했을 것이며 너는 그런 나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은 날들이 많았을 것 같다고 생각해. 서로가 서로를 참아주는 시간이 분명 우리에게 존재했을 거야. 너는 지금도 내가 무엇을 하든 여전히 나를 지지해 주는 사람이야. 편지를 쓸 땐, 상대를 간절히 지지해주는 글을 쓰는 거라고 알려줬던 사람이야. 나에게 진심으로 대단하다고 말해주는 최초의 타인이었어.



네가 나한테 보낸 문자를 읽어. 바다가 말하는 것처럼 들리는 내용의 문자.


그냥 무슨 일이 있든 어떤 일이 일어나든 너는 나한테 늘 소중한 존재인 것만 기억해 줘.

나는 어느 곳에든 언제든 너의, 너만의 행복을 진심으로 바라.


다른 시간에 있을 너도, 다른 곳에 있을 너도 내가 항상 응원할게.

너도 편안하고 따듯한 밤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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