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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로운 동굴 생활
by
블레스미
Nov 27. 2024
나는 종교가 없다.
오로지 나 자신만 믿었다.
종교에 기대어
마음을 쏟아 낼 시간에
뭐라도, 하나라도
직접 뛰어드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문득 어느 날부턴가
저 위에 누군가가
나를
살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젊은 시절
앞이 보이지 않는
깜깜한 동굴 속에
갇혀 있었다.
빠져나가려고
동굴 벽을 열심히 후벼 파고
곡괭이질을 해봐도
소용이 없더라.
그러다
우연히 기대섰던 벽이
스르륵 무너지면서
지름길로 연결되기까지.
어라??
그때마다
운이 좋았다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보니,
저 위 누군가가
내가 가야 할 길로
나를 몰아가고 있는 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곳은 미국이니 예수님일 수도
엄마로 살고 있으니 성모마리아 일수도
아니면 난 한국인이니까 부처님인가
샤머니즘 좋아하니 천지신명인가
다 아니라면
양몰이 끝내주게 잘하는
나에게 반한 양치기 소년?
내가 열심히 딴 곳을 후벼 팔 때
어 그래 너가 원하는 대로 일단 해봐
계속되는 삽질에 지칠 때쯤
다 했니?
자, 거기 아니고 여기.
딱 요론 느낌.
그런 식으로 흐른 결과들은 또
남이 탐낼만한 큰 떡이 되었다.
미국 정착을 결정당했다.
내가 미국에 살게 될 줄이야
이건 내가 곡괭이질을 한 벽이 아니다.
그렇다면
또 저 위 누군가가
나를 이쪽으로 몰아 댄 건가?
왜???
나는
내가 한국에 두고 온
내 일들을 아까워하며 지냈다
그렇기에
다시 돌아갈 날만을 기다리며
이곳에 집중하지 않았다.
그러다
완전히 정착하게 되면서
하.. 내 인생 정말 끝까지 이러는구나..
했는데
위에서 보기엔
아직 돌아갈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 같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돌아간다고 해도
예전으로
복귀할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그 대신
돌아가면
내가 몸과 마음으로
감당해야 할 일들이 있는 게
현실이다.
그걸
피할 수 있는 미국 생활이
감사할 정도로
나에게는 지치는 일,
생각만 해도 주저앉고 싶은
무거운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긴 하다.
한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야금야금 해 대니
어 그래 너가 원하는 대로 일단 해봐
불구덩이인 줄 모르고 파 대고 있으니
자, 거기 아니고 여기
아직은
돌아가서 얻는 것보다
감당해야 할 것들이 크다는 건가
지금 갔다가는
너 못 배겨 난다 하는 거 같다.
당신의 동굴 속에서 보호받으며
견디는 힘을 더 키워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마늘과 쑥을 먹던
곰과 호랑이에겐
그 동굴이 감옥이었겠지.
하지만
하늘은 때가 될 때까지
그들을 동굴 속에서
보호하고자 했다.
다시 태어날 수 있는
시간을 넣어두고서 말이다.
그들은 큰 꿈과 희망, 포부를 갖고
제 발로 동굴에 들어갔다.
심지어
하늘에게 선택되어
인간이 될 기회를 얻었다며
부러움 받아
의기양양이었겠지.
나???
그래
이렇게 된 이상한 번 해 보자.
이것 또한 내 커리어가 되리라
포부를 갖고 내 발로 입성했다.
선택받았으니
능력 있다, 재수 좋다는 소릴 들어서
그 순간만큼은
누구보다 의기양양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곰이 될 것인가
호랑이가 될 것인가.
동굴 속에서
떠날 날만을 기다리며
달력에 날짜를 지워나간 호랑이
하루에도 열두 번
화가 솟구쳐 씩씩대거나
우울증에 무기력했던 호랑이.
다 필요 없다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
이러다 내가 먼저 죽겠다며
뛰쳐나간 호랑이.
참을성 없고
제 복을 제 발로 찼다
사람들은 떠들어대지만
너 라면 할 수 있겠어??
지금 내 삶이 불행하다는데
인간 되는 게 대수냐고.
이거 왜 이래~
나 호랑이야.
지금껏 남부러울 거 없이
떵떵거리며 잘 살았어.
나 역시
뛰쳐나갈 궁리만 했다.
이대로
여기서 밥만 하다 죽을 순 없다 고
생각했다.
그러다
내 손을 내려다보니
줄무늬는 간데없고 시커먼 털 뿐이네
저 위에서 들리는 말.
호랑이 놀이 실컷 했니?
어, 넌 호랑이 아니고 곰
이제 난 곰이 되어
나를 받아들인다.
시간이 흘러감에 조바심을 느꼈는데
아직은 때가 아니라 하니
마음이 편해지는 느낌.
내가 동굴에서 보호받는 시간 동안
나를 잡아먹으려 기다리는 일들은
풀이 꺾일 것이고
나는 반대로
강한 심장을 갖게 될 거다.
그때가 내가 돌아가는 날이 되겠지.
그나저나
저기요...
마늘이 몇 개 남았는지나 좀 알고 먹었으면 하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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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굴
시간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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