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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밥 8.5단

by 블레스미


미국에 처음 왔을 때

전업주부가 되어버린 나는

가족들을 위해

열심히 밥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루 종일 전쟁터로 나가

영어로 쏼라쏼라 해야 하는 남편을

응원하기 위해 할 수 있는 건

든든한 집 밥을

차려내는 것이라 생각했고

당시

세 돌이 지난 어린아이들을

인스턴트로부터 건강히 키워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나에겐 집중할 무언가가 필요했다.





갑자기 바뀐 환경과 넘쳐나는 시간에

무기력하게 늘어져 있는

나 자신을 볼 용기가 나지 않았기에

식구들을 건강히 먹여 살린다는

특수한 임무를 갖고

미국 땅 상륙 작전을

나 홀로 찍고 있었던 거다.





그렇게

나는 전업주부로 취업을 했고

이 순간까지

무급으로 24/7 부엌에 근무 중이다.





비행을 하던 시절

한 달 중 보름은 집을 비웠던 내가

갑자기

부엌에서 날고 기는 사람이

될 순 없었다.





그래도

뭐라도 해야 한다, 하겠다, 하고 싶다는 마음에

열심히 장을 보고

불 앞에 서서 지지고 볶아

매일매일

다른 진수성찬을 차려냈었다.





그러기를 한 달.

남편에게 물었다.





요즘 먹는 게 어떤 거 같아?




뭔 소린가 하고 쳐다보다라.




있잖아

요즘 먹는 게 좀 괜찮다~싶어??

아니면

나 여기 와서 좀 잘 먹고산다~싶어??

어????

좀 그래????





참고로 남편은 공대 출신자다

그리고

내가 그에게 매번 하는 말은

다음 생엔

당신이 문과로 태어나길 기도할게이다.

그러니

그때의 남편의 대답은

생략하겠다.





아 다 부질없구나,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는 거구나

깨달음을 얻고 바~~~~ 로 접었다.





그 결과

나의 시간을 아끼게 되었으며

식비를 줄이게 되었고

양 보단 질로 승부하는

담백한 식단이 되었다.

.

.

.

.

.

.

.


우리 집은

한 달에 한 번만 코스트코를 간다.

아시안 마트는

쌀이 떨어져야 그때 가는 곳.





두 곳 모두

고속도로를

40분 달려야 하는 곳에 있을뿐더러

한 번 가면 돈이... 돈이....

입에서 종이가 끊임없이 나오는 마술을

카운터에서 볼 수 있다.





자주 가면

사는 게 적어지지 않나??





놉.

노출되는 횟수에

비례해 버리더라.





지난 주말엔

남편과 코스트코랑 아시안 마트를

모두 다녀오기로 했다.





7인승 SUV를 가득 채웠다.

코너를 씨~게 돌아도

트렁크의 물건 쏠림 따위는 없는

편. 안. 함.





이렇게 다녀오면

아이들이 투입되어

냉장고, 냉동고, 김치냉장고,

그리고 팬트리에

각각 헤쳐 넣기를 시작한다.

어릴 때부터

훈련을 시켜 놓았더니

군대 마냥

아주 일이 착착 돌아간다.





조아써!





냉장고 그득한 주말이 지나고

오늘은 월요일.





질서 없이

가득 찬 냉장고를 열어

장 봐온 재료들을

하나하나 다시 정리한다.





콩나물은

통에 담아 물을 부어 보관.


사 온 마늘은 죄다 다져서

소분하여 비닐에 담고

네모칸 그어서 얼리기.


소고기 덩어리는

살짝 얼린 후 썰어서

불고기 양념에 재워 소분하고 얼리기.


돼지 안심 덩어리는

착착 썰어다가

밀가루 계란 빵가루로 예쁜 옷 입혀

돈가스로 얼리기.


부추는 씻어 말린 후에

손가락 크기로 잘라 비닐에 담고 얼리기.


크루아상 4개씩 소분하여 얼리기.


돼지 목살 덩어리는

살짝 얼린 상태로 만든 후

얇게 썰어 제육 양념에 재우고

소분하고 얼리기.





미쳤다.

미쳤어.

이건 미친 짓이다.






냉동칸을 열어보니,

만두도 만들어 얼려먹고

치킨과 탕수육, 야채 튀김도

만들어 얼려먹고 있는 우리 집.





그 흔한 시판 냉동식품이라고는

핫도그와 여러 해산물 종류들뿐이다.





한국만큼

원하는 상태의 식재료와 한식을

구하기 힘들기도 하고

찾는다 하여도

맛이 우리가 먹던 그 맛이 아닌지라

모든 것이

made in 나

DIY by 나





남편에게 말했다.





나 있잖아..

이 세상에 나 혼자서만

70, 80년대를 사는 거 같아..


제육을 먹으려면

고기 덩어리를 사다

써는 것부터도 아냐!

썰기 위해서

얼리기부터 시작해야 해.


돼지를 잡는 거부터

시작하는 건 아니니까

감사해야 되니??"





우리 집 애들이

나중에 한국에서 친구를 만들게 되면,

그래서

그 친구의 집에 놀러 가게 되면,

아마 문화충격을 받을 수도 있겠다 싶다.





엄마!

한국은 마트랑 반찬가게 가면

다 살 수 있대!


얘네들은

여태

집에서 만들어 먹어 본 적이 없대!!






어,

우린 우주에서 왔어.

이역만리 외로운 행성 하나

우리의 고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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