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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의 팀플

by 블레스미


미국 학교가 운영되는 시스템은

state에 따라, 학군에 따라, 학교에 따라

서로 다르다.





우리 집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를

한국식으로 대충 나눠보자면

8월부터 12월까지가 1학기

1월부터 5월까지가 2학기다.





그리고

1학기를 1, 2쿼터로

2학기를 3, 4쿼터로

나눠서 관리한다.





그러니

점수가 안 좋다 싶은 과목은

그 쿼터가 끝나기 전에

미친 듯이

멱살 잡고 끌어올려야 한다.





올해

9학년이 된 아이들은

하이 스쿨에서의 첫 쿼터 마무리를

코앞에 두고 있다.





그 뜻은

넘쳐나는 시험과 과제로

정신을 차릴 새가 없다는 거






이 와중에

봉사활동도 해야 하고

클럽활동도 해야 한다.





그 뜻은

나도 픽업 다니느라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는 거.





모든 시험과 과제는

바로바로 성적에 반영이 되는데

여기에는

쪽지시험이나 퀴즈들도 포함된다.





그리고

이 성적은 앱을 통해

학생이나 학부모가

아무 때나 들여다볼 수가 있다.





마무리가 코앞이니

자주 들여다 보긴 하는데

내가 확인하고 있다는 걸

티 내지는 않는다.





내가 참견하다고 해서

바로바로

점수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고

서로 못 볼 꼴만 보이지 않을까

싶어서다.





결과가 안 좋으면

그 본인이 제일 힘든 법인데

나까지 보탤 필요가 있나 싶고





아무리

영어가 더 편한 아이들이지만

저 모든 걸

영어로 한다는 거 자체가

나에겐 상상 불가의 일이라

더욱 입을 다물고 있다.





다행히

욕심 있는 아이들이라

알아서들 선방해 주고 있기에

나는

내 고상함을 지킬 수 있어

감사하는 중이다.





중간고사와 기말고사급의

파이널 시험도

당연히 있다.





그것 말고도

쪽지시험과 퀴즈를

거의 밥 먹듯이 보고 있고

중간중간

큼지막한 테스트들도 심어져 있어

학기 내내 시험이라고 보면 된다.

벼락치기 따위가 통할 수준이 아니다.





과제?

개인으로 또 팀으로

제출해야 할 프로젝트들이 깔렸고

발표는 또 얼마나 해 대는지..





이것들을 하기 위한 자료들은

당연히

핸드메이드이고

평가에 포함된다.





그렇다 보니

학기 초 공지되는 준비물 목록엔

항상

색연필과 사인펜,

풀, 가위, 테이프가 적혀있다.





이 준비물이

12학년까지 계속되기에

아이들은

아예 이것들을 위한 필통을

따로 챙겨 다니고 있다.





처음엔 어리둥절이었다.





한국이었으면

초등 저학년에 하고

끝났을 준비물인데

미들에 가서도

하이에 가서도

필수 템이니 말이다.





아니,

색칠공부를 언제까지 하자는 거야~~





12학년의

몸집이 어른만 한 아이들이

책상에 앉아

열심히 오리고 붙이고 색칠공부라니

귀여운 모습이 상상돼

피식거리게 된다.





한국도

수행평가라는 거 많이 하던데

한국으로 돌아갔다면

수행평가는

끝내주게 잘 했겠단 생각이 들더라.





그거 때문에

엄마들도 같이 고생이라던데

난 괜찮았겠다며

잘난 척의 여유를 흘려대던

어느 날





1층에 마련된

아이들 공부방에

불이 꺼지지 않고 있었다.





시계를 보니 10시가 넘었네?!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나서

등교 준비를 하기 때문에

늦어도

10시에는 누워야 하는데

그 마지노선이 이미 지난 거다.





거실 소파에 앉아

티브이를 보는데

이상한 잡음이 섞인다.





촤라락

스륵

스르륵

촤락





뭐야?

쟤 뭐해??


주말에 하던 과제

그거 하고 있던데?!





끝나겠지 끝나겠지 하며

기다려 보는데





시간은

10시 30분이 지나고 있고

소리는 여전히 들리고 있고

가만 들어보니

코 훌쩍임과

흐느껴 우는소리까지

섞여져 있네

무슨 상황인지 딱 알겠더라.





하...





티비 끄고

한숨 한 번 쉬고

방으로 출동.





어지럽혀진 방에서

눈과 코가 뻘개진 아이가

연신

종이를 감아대고 있었다.





왜 그런지

그 모습이 딱해 보이기보단

화가 나더라...





***!

뭐 하는 건데?

지금?!





움직이는 손을 잡아 멈춰 세우고 쳐다보니

울음이 폭발해 엉엉 거린다.




울면서 웅얼거리는 말을 종합해 보면

과제 제출은 내일인데

생각한 대로 마무리는 안되고

밤 11시가 다 돼가는데

아직

샤워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





지난 보름 동안

점수가 많이 걸린 과제를

하던 중이었다.





사진도 필요하고

하나하나

손글씨로 설명도 적어야 하고

자료의 양과 질을

모두 만족시켜야 하는 과제였다.





더군다나

과제 패키징을 독창적으로 할수록

점수를 더 준다 하는 바람에

아이의 전투력은 최고조였던 상태.





주말에 뭐 하고

하루 전날에 이러냐는 소리가

목구멍을 넘어서 혀끝에 올랐다.





이빨로

아랫입술을 깨물어 닫은 채

겨우겨우 참았네.





울면서도 내 표정을 읽은 건지

주말에 다 하고

마무리만 남겨 놨는데

이게 계속 안된다는 소릴

또 웅얼거린다.





애가 울고 있으니

남편도 섣불리 덤비질 못하고 섰다.

손에 든 걸 가만 보니

방법이 아예 틀렸더라.





**야,

이거 이렇게 하면 안 돼

다시 해야 돼





다시 해야 한다는 말에

순간 놀라더니

대성통곡이더라.

그 모습에 내가 더 놀래

아이를 진정시켜야 했다.





**야,

이거 엄마가 어떻게 하는지 알아!

그러니까 일단 가서 씻어.

이건 내가 하고 있을 테니까

얼른 가서 씻고 와 빨리





놓지 않으려는 손에서

과제를 빼앗고

떠밀어 올려 보냈다.





그 자리에 남은 건

엉망이 된 과제와

남편 그리고 나.





아무 말 없이

둘 다 잠옷 팔을 걷어붙였다.





그때부터 우리는

X파일의 멀더와 스컬리였지.





무엇이 문제인지 한눈에 들어온다.

해결 방안이

머릿속에 딱. 딱. 딱.

각자 헤쳐

보완 보수를 착. 착. 착.





뭐든

자기 스타일을

고집하는 아이이기에

개입을 최소한으로 줄이는 게

포인트였다.





**야,

뭐든 자기 건 자기가 하는 게 맞아.

망쳐도 내가 망쳐봐야

그 단계로 넘어갈 수 있는 거잖아

그치?


근데 아니다 싶은 땐

그 순간 빨리

SOS를 칠 줄도 알아야 돼.


네 걸 다 떠넘기고

손 떼라는 게 아니라

정말 위기의 순간이다 싶을 때,

한 끗이 모자라다 싶은 때

얼른 SOS를 치는 것도

능력이라고.


어떻게든 해보려고

붙잡고 있었다는 거 알아


근데 지금 시간을 봐봐

넌 씻지도 않았고

종이는 만질수록

점점 너덜 해지기만 하잖아


엄마 아빠는

이런 거 다 해봤으니까

뭐라도 더 알고 있지 않겠어?

그럴 땐 억지로 할 게 아니라

친구든 선생님이든

누구든 간에

방법을 알만한 사람이

주변에 있다 싶으면

얼른 SOS 치는 거야

알겠지?





12시를 향해가는 시간.

아이를 방으로 올려보내고

멀더와 스컬리는

사건 해결을 자축하며

맥주로 하이파이브.





그 순간

내 최애 드라마가 생각나더라.

대사 하나하나가

모두 주옥같았지.





듣자마자 무릎을 쳤던 대사?

지금까지도

생각하면 할수록

맞다 맞다 하는 대사??





있지 있어.





중요한 장면도 아니었다.

주연이나

조연이 뱉은 대사도 아니었다.

잠시 잠깐 등장이었던

이름 모를 어느 누가 했던 말이다.





내 입시, 취업, 결혼을 끝내고 나면

끝인 줄 알았어


끝이다!!! 했지...


근데 또다시

자식의 입시, 취업, 결혼을 위해

달리는 거야





아마도

내 상황이 상황인지라

듣자마자 할 말을 잃었었다.





맞네 맞아

내 거 다 끝냈다고

만세를 불렀는데

그게 아니었네

한 바퀴가 다시 돌아오네 하며

무릎을 쳤더랬지.










어제의 결과물을 들고

학교에 간 아이가 카톡을 보내왔다.

과제 1등 먹었다고.





다들 평범하게

스크랩북을 사다가

껴 넣기만 해 왔더랜다.





그러니

엉망진창 허접해도

박스를 쪼개어 만들고

종이를 붙이고

색칠까지 한 우리 아이의 것이

눈에 띌 수밖에.





혼자 창작도 해보고

고생도 해보고

SOS 치는 법에다가

점수까지

1석 4조로 끝내는

아름다운 결말이다.





남편에게도 소식을 알렸다









멀더, 나예요 스컬리


어제 해결했던 사건은


우리가 1등이라고 연락이 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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