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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려 쓰는 일기

by 블레스미

와.. 내가 이런 실수를 하다니..!




내 집밥 8.5단 경력에
대단한 스크래치가 생기는
순간이었다.




지난 25일.




어, 맞아.
크리스마스 날 말이야.




이날은
누가 뭐래도
스테끼를 썰어야 하는 날이라고
생각했다.




내 한식 곳간이 가득 찼어도
이날은 고기 냄새 풍기며
구운 야채와 으깬 감자를 곁들여
칼질 좀 해주는 게
당연 빠따가 아니냔 말이다.




트리와 클스 장식들 조명을
번쩍번쩍하게 죄다 켜 놓고
벽난로도 켜서
훈훈하게 데운 분위기에
방정맞은 캐럴 말고
클래식 버전 캐럴을 틀고서
와인 부딪히며
야무지게 칼질하는 모습이
내 머릿속
클스 디너였단 말이다.




식구들에게
먹고 싶은 게 있느냐 물으며
여유를 떨고
내 양손 무겁게
잔뜩 사 오겠단 포부를 밝히며
집을 나섰었다.




신나는
캐럴을 따라 불러가며
마트로 달렸더랬지




그러다
마트 초입에 들어서면서
나의 계획은 와장창...




이건 뭐지..




재난 영화의 한 장면처럼
좀비 영화의 한 장면처럼
조용하다.




그리고
주차장엔 나뿐이다.




곧 건물이 폭발하면서
내 차가 날아갈 것만 같고
어디선가
좀비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내 차를 덮칠 것만 같은 스산함.




맞다.
아까 말했듯 25일이었다.
달력에 씨 뻘겋게 칠해진
삼척동자도 알만한
전 세계 공통의 연휴
25일.




한국은
이런 날이 대목이라며
더 열심히 장사를 할 텐데
미국은
모든 상점이
하루 종일 문을 닫는다.




몇몇 식당들이
문을 열기도 하는데
찾기 쉽지 않고
긴 시간 영업을 하지도 않으며
예약을 받지도 않는 날이다.




이걸 왜 몰랐냐고??!!!
나 미국 사는 거 뻥 아니냐고??!!!!




매년 클스마다
여행을 갔었더랬다.
목적지는 항상 관광지였지.




그 뜻은
25일이고 뭐고 간에
온종일 불 켜놓고
북적북적
장사를 한다는 말인 거지.
문 닫은 꼴을
본 적이 없단 말인 거지.




아, 이렇구나
이런 거구나
닫는다 해도 이 정도 일 줄이야.




망했다.




어쩐지..
그제야 주변이 눈에 들어온다.




마트 주변을 둘러싼
여러 종류의 상점들 안이
죄다 시커멓다.
혼자 어이없어 뇌 정지
눈알만 굴리고 앉았다.




난 여기서 뭐 하는 거임?




급하게
여기저기 검색해 보지만
역시나 죄다 영업 종료.




외식이라도 할까 싶어
찾아보지만
마땅치 않더라.




영업하는 곳을
딱 한 군데 찾았는데
한인이 운영하는
아시안 마트더라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역쉬
의지의 한국인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재난이 닥쳐도 좀비가 바글대도
아무렇지 않게 문 열고 장사할
자랑스러운 그 이름
한. 국. 인.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보니
주유소 빼고는
모두가 시커먼 건물에
주차장은 텅텅.




아..
도로에 차도 씽씽 달리네




보통
마트를 다녀오면
내가 도착하는 소리에
식구들이 나와서
옮기는 걸 도와준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역시나
도와주려고
세 명이 서 있더라.




그 세명과
빈손으로 마주 선
나.




한 3초 정도
서로 말없이
쳐다보고만 있었던 거 같다.




내 표정 하나로
모든 설명을 대신했고
넷 다 파안대소를 하며
상황 종료.




처음으로
집에서 보내는 클스인 만큼
기억에 남는
근사한 저녁을
차려주고 싶었다.




그래서 그랬던 건데
어이없게, 대차게
실패네




다행히
그건 나만의 욕심이었고
뭘 먹어도 좋다,
상관없다, 괜찮다 해주는 식구들 덕에
미안한 마음 뒤로 넘기고
머릿속으로
곳간을 파헤치기 시작한다.




내 원픽은
바로바로오~~
족발!




내 사랑 족발을
마트에서 팔길래
사와 얼려놓고
행복해했더랬지




정말 저엉말
먹고 싶어 죽기 직전에
꺼내려했던 비장의 카드를
이리 바로 쓸 줄이야.




그래도 의미 있다.




1년 한 번뿐인 클스에
이 귀하디 귀한
족발이니 말이다.




국수를 비벼 같이 먹자 싶은데
넣을 야채가 암 껏도 없네
그렇다면 김치지.
잘게 썬 김치를 넣고
매콤 달콤 새콤한 국수를
비벼 낸다.




뻘건 와인은 됐고
고이 모셔온
허연 막걸리도 하나 오픈.




이 정도면 된 건가?
어차피 이 이상은 불가능이니
됐다 싶더라.




급박하게 돌아가는
반전 속에
머리도 몸뚱어리도
굴려대느라
허겁지겁이었지만




그래도
평소 먹지 못하는 애착 메뉴로
4명이 다 맛나게 뚝딱했으니
이게 애초의
내 계획이었던 거 마냥
뿌듯 뿌듯.



그래도
마무리는 확실하게 준비 돼 있었다.
파리바게트 생크림 케익.



어서 났냐고??




애틀랜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녹을라~ 무너질라~~
4시간을
애지중지 모셔왔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미쿡 기분 내려다
풀코스로 한국이었네.




한국 사람이
젓가락질이지 뭔 칼질이냐
칼질은 못한 게 아니라 안 한 걸로.
치얼스 대신 건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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