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가신 지 2년이 되었고 애도 아닌, 이렇게 회사도 다니는 다 큰 남자가 아직도 속이 울렁거리는구나
그런데 지금 보니 얼마나 미안한지.
돌아가신 지 고작 2년이고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아이가 엄마를 잃은 거였는데 말이다.
그리고 아이에게 엄마라는 존재는 아빠와 또 다른 의미이지 않나.
시댁 식구들은 나를 정말 많이 반겨 주었다.
엄마가 아들을 그렇게 예뻐하더니 하늘에서 그 하늘을 떠다니는 나를 (승무원이었다) 콕 집었나 보다고 말씀하셨다.
아들이 결혼한다고 여자를 데리고 왔는데 보지도 못하고 떠난 것을 안타까워하셨고
봤으면 얼마나 좋아하셨을까 하며 아쉬워하셨다.
말로만, 사진으로만 만난 고부 사이가 되었다.
아! 딱 한 번 뵀다. 꿈에서!!!
아이들이 어릴 적에 꿈에 한 번 나오셨는데 실제로 만나 뵌 적은 없었으니 그냥 느낌으로 어머님인가 했다.
장소는 나머지 식구들이 살던 옛날 집.
어머님과 단둘이 거실에 앉아 식재료를 다듬는데 어찌나 무섭게 하시든지 쫄아 있던 와중에 딩동하고 아버님이 집에 오셨다.
그 순간 무섭던 시어머니는 활짝 웃으시며 여보~~ 하면서 달려 나가시더라.
꿈속에서도 어리둥절했던. 아버님이 오셔서 다행이다 했던 기억이 잊히질 않네
아버님은 그 이후 좋은 분을 만나 함께 생활 중이신데 혼자 계셨던 그 텀이 길지 않아 자식들의 온전한 축하 속에 시작하진 못하셨다.
원래 사이가 좋던 부부일수록 혼자되면 다른 짝을 빨리 찾는 법이라 하더라
남편은 같은 남자로서 인 건지 왈가왈부하지 않고 조용히 받아들였지만 이상하게 내가 마음이 그렇더라.
난 자식도 아니고 오히려 혼자 계신 아버님에게 짝이 생겼으니 나에겐 좋은 일이라고 사람들이 말했지만 말이다.
같은 여자로서의 감정이었나 싶다. 이 집에 시집온 같은 여자로서.
우리가 미국으로 나와 살던 시점에 아버님은 교회를 다니기 시작하시면서 기일마다 추도예배 형식으로 간단히 식사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식사를 새 시어머니가 차려내고 있는..
그 식사를 그냥 내가 집에서 차릴 테니 추운데 나가서 먹지 말고 식구들끼리 집에서 좋은 시간 가지라는 의미라는데..
너무 좋은 분이시다. 의심의 여지없이 본심이신걸 내가 안다.
하지만 이건 아니지 않나 고맙지만 거절해야 맞는 거 아닌가
이 여자를 봐도 저 여자를 봐도 말이다.
아버님은 그렇다 쳐도 누나들이 미웠다. 맨날 보고 싶다 말하면서 왜 정작 이런 건 신경 쓰지 않는 거지? 내가 화가 나더라.
하지만 입을 꾹 닫았다. 내가 물리적으로 어찌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 한들 그들의 슬픔을 내가 함부로 평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다 잠시 한국에 들어가 살게 되었을 때 말했다. 그 추도 예배 내가 가져오겠다고.
모두가 좋아하고 고마워하더라 어떤 의미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비록 다시 미국으로 나오게 되는 바람에 몇 해 밖에 못 챙겨드렸지만 그래도 차리던 날엔 속으로 계속 텔레파시를 보냈다.
식구들 보러 간다고 동네방네 다 소문내고 오시라고. 어서 오셔서 식구들 얼굴 실컷 보시고 맘 편히 드시라고.
우리가 미국으로 다시 떠난 후엔 밖에서 간단히 식사하는 걸로 바꾸셨고
우린 여름마다 한국에 들어가면 항상 어머님 계신 곳을 들러 아이들 얼굴도 보여 드리고 꽃 장식도 바꿔드렸다.
지금도 우스갯소리로 내가 자식들보다 더 많이 갔네 한다.
어제가 음력으로 어머님 기일이었다.
한국에 있는 식구들은 따로 식사를 하고 우리는 시간에 맞춰 전화를 드리는 걸로 기일을 보낸다.
올해로 20년이네
어머님 걱정 마세요! 이 사람은 제가 잘해 먹이고 있습니다. 남으로 만난 거라, 그리고 저도 사람인지라 어머님만큼은 못해줘요 그래도 조금만 화내고 조금만 미워하도록 노력하고 있어요 계속 최선을 다해 잘 먹고 잘 살아 볼 테니 어머님도 그곳에서 평안하게 흐뭇하게 지내시길 바랄게요. 딱 한 가지만. 이뻐하시던 아들 좀 계속 지켜봐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