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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식구

by 블레스미

난 그냥
뭘 또 사냐 싶었지
없어도
다 한다 싶었어



그럴 거면
살 게 한두 개냐
장비 탓하는 사람치고
잘하는 사람 없다 했던 거야.




아이들이
이유식을 하면서부터
눈에 들어온 게 다지기였다.
작은 사이즈에
버튼만 윙 하고 누르면
사라락고 하고 끝내주는 놈.




근데
살 게 한두 개가 아니었고
자고 나면 주문해야 할 것들이
생기고 또 생기는 나날들이었기에
됐다 됐어했다.




이유식이
갈면 끝나는 것도 아니고
끓이고 자시고를 또 해야 하니
그거 있는 게 대수냐 했다.




나에겐
모든 걸 도막 낼 수 있는
칼과 도마가 있었다.
전기도 필요 없고
사용량도 무한대라
천하무적이었지.




조금만 버티자며
군말 없이
모든 걸
자르고 가르고




근데
아이들의 유치가
이리 늦게 나올 줄이야..




돌이 지나도 소식이 없어
사람이
이빨을 안 가지고 태어날 수도 있는 걸까
심히 걱정을 했더랬다.
엑스레이를 찍어 볼까 싶어
병원으로 뛰쳐가기 직전이었지.




때를 기다리는 동안
내 팔뚝 근육 또한
아이들과 함께
무럭무럭 자라났다.




군말 없던 입은
꽉 깨물어 대기 시작했고
샀어야 했다는 후회가
누가 이기나 해보자며
악으로 바뀌더라.




버틴 게 아까워
이제 와서 살 순 없다 하던 어느 날
한 아이의 아랫잇몸에
하얗고 뾰족한 무언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얼마나 기특하던지
기저귀로 풍실한 엉덩이를
연타로 토닥토닥했지




사실

아이가 특별히 한 게 있겠는가
기다려야 하는 시간을
다 채운 것뿐이겠지
누가?
내 우량한 팔뚝이.




이 기억이 각인된 건지
뭐 하나 사고 싶을 땐
그때가 내 기준점이 된다.
특히나
주방 용품 말이다.




이런 거 없이도 다 해.

내가 그거 없이도
쌍둥이 이유식을 끝냈어




돈이 흘러넘친다면
종류대로 사 모으겠지만
현실은 그것도 아니고
지금껏
장비가 없어서
못해 먹고 있는 음식이
있는 것도 아니니
다 쓰잘데기 없다 하는
논리.




자유의지의
미니멀이라기보다
악과 깡이 만들어낸
미니멀이다.




그러는 와중에
내 맘속에 들어온 게
하나 있었지.




Instant Pot




한마디로
오만가지 요리를 할 수 있는
전기 압력솥인데
보아하니
한국에서도 유명한가 보다.




용량별로 가격이 다른데
내가 원하는 건
쉽게 덤비기 힘든 가격대더라
나에게.




그래서
몇 년을 째려보기만 했지
블랙 프라이데이가 되어도
할인 폭이 크지 않았다.
불프 가격이 이 정도면
어림도 없구나 하고
올해도 접자 싶었다.




나에겐
냄비들과
전기 압력 밥솥이 있었기에
그들과 함께
내 욕구를 상대로
외로운 싸움을 이어가던
어느 날




새해 선물로
아마존 상품권이
내 손에 들어왔다.



ㄱ ㄱ ㅑ~



인스턴트 팟이
제일 먼저 생각나더라
혹시나 싶어 검색해 보니
블프 때보다도
할인 폭이 더 크다




이게 웬일!!
여기에 상품권까지 쓰면
우하하하하하하하하




그래
이 정도면 내가 사 주겠어
웰컴!




그래
이 정도면 내가 사 주겠어
웰컴!



토요일 도착이니
저녁 메뉴로
개시해 주자 싶었다.




양파를
내솥 바닥에 깔아
눌어붙음을 방지하고
돼지 목살을 올려준다.
그리고
묵은지를 살포시 덮어주지




필요한 양념을 추가해 주고
뚜껑 닫으면서
코스와 시간을 세팅해 주면
내 할 일은 끝이다.




불 조절 필요 없고
넘칠까 봐 보초 설 필요 없다.
다 됐다고
노래 불러 줄 때까지
팔다리 쉬고 있다가
그릇에 내 기만하면 되니
이렇게 편한 세상이..




물론
없어도 다 잘해 먹고살았다.




가스불 옆에 붙어 서서
저어주고,
불 조절해 주고,
넘치면
욕 한 바가지 해주며
가스 스토브까지 닦느라
애는 써야 했지만 말이다.




와..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삶이라니.




고압으로 끓여 냈으니
맛은 말할 것도 없다.
어디 갖다 팔아도 되는 맛.

뚜껑에 국물 한 방울 튀지 않았음에 감격


설거지도
내 솥만 닦으면 끝나니
브라보다
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




자, 넥스트.
애틀랜타에서 사 온 팥을 꺼냈다.




얼마 전 동짓날
블로그 이웃들 집을 떠돌아다니며
눈동냥 했던 팥죽이
일요일 점심 메뉴로 당첨이다.




팥칼국수, 팥밥, 팥죽을
너무 좋아하는 1인이기에
반드시 해 먹으리라
칼을 갈았지.
그게 오늘이구나
하하하하하하하




팥을 불릴 필요도 없이
시작되는 요리다.
Soute 기능으로
한 번 부르르 끓여 내
불순물을 제거하면
준비는 끝이다.



헹구어 낸 팥에
물을 붓고
이번에는 Porridge 기능으로
압력 요리를 한다.




시간만 입력하면 끝
이번에도 손가락만 까딱이다.



이거 아니었으면
불린다고 시간 까먹고
삶는다고 냄비 따로 꺼내고
죽 만드는 내내
눌어붙을까 봐
젓고 서 있어야 했을 테니
안 먹고 만다는 소리가
절로 나왔을 텐데
이건 정말 신세계다 신세계야.




점심으로는
면 삶아서
팥칼국수를 해 먹고
간식으로는 팥죽이다.



찹쌀가루의 부재로
새알심은 어쩌나 하다가
떡볶이 떡을 잘라 넣었더니
쫀득하고 좋네.




이가 없으면 잇몸이다
어떻게든 해 먹고 만다.
이것이 이민자의 삶.




지금도
이 아이는
내 옆에서 열일 중이다.




오늘은
소고기뭇국이거든




Soute 기능으로
밑간 한 고기와 무를 볶아 준 후
물을 붓고
Soup 기능을 선택해
시간만 입력하면
내 일은 끝난다.




이제
자기가 알아서 할 테니
나 보고는 가서 글을 쓰라네
시간을 벌어줬으니
네 자랑도 해 주겠노라 했다.




나를 부르길래 열어보니
평소 내가 만들던 국물 색이 아니다
맛도 정말 진한 고깃국 맛.




장비빨이 있긴 하구나
이거 무시할 일이 아니었네




널 이제야 만나다니
우린 진작 만났어야 했어.




자, 준비해
내 다음 계획은 사골국이야.
문제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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