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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처럼 Nov 26. 2021

<20> 멋은 자유다

고정된 스타일을 파괴하는 순간에 맛볼 수 있는 생의 진미

“멋은 ‘스타일’과 달리 구속이 아니라 자유를, 통제가 아니라 해방을, 그리고 타율이 아니라 자율을 가리키는 말이다. 멋은 획일적인 데에서 변화를 찾고 구속 가운데에서 자유를 찾는 감정이다.”

-이어령의 ‘읽고 싶은 이어령’



이어령 선생은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지성이다. 요즘 ‘선생’이란 호칭이 심하게 오남용 되고 있지만, 이어령에게는 반드시 본래 의미의 선생이란 호칭을 붙이고 싶다. 장관도, 작가도, 교수도, 박사도 그에겐 선생을 앞설 수 없다. 백범 김구 선생만큼이나 선생이 잘 어울린다.


그 이유는 참된 멋쟁이여서다. 90년 가까이 이 땅에 살면서 그 누구보다 생각이 반듯하고, 언행에 품격이 있다고 칭송받는다. 글 솜씨와 말솜씨가 뛰어나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많은 영감을 준다. 힘들고 고단한 세상에 ‘문화’라는 옷을 입혀 행복을 건네주려 한다. 이런 훌륭한 선생이 또 어디에 계실까.


이어령은 문학평론가, 시인, 소설가, 수필가, 언론인으로 살면서 수많은 저작물을 남겼다. 단행본만 60여 권, 서간 등 단편을 합하면 100권 이상의 책을 썼다. 일종의 문화 평론집인 ‘축소지향의 일본인’과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는 베스트셀러이자 스테디셀러다. 


나는 그의 ‘읽고 싶은 이어령’이란 책을 특별히 좋아한다. 소설가 최인호가  생전에 이어령 작품 가운데 주옥같은 글을 뽑아 예쁘게 편집한 책이다. 글마다 빛이 나고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특히 ‘멋’에 대한 이어령의 통찰에는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는 책에서 멋과 ‘스타일’의 관계, 그리고 그 차이에 주목했다. 멋이란 말이 서구에서의 스타일이란 말과 곧잘 비교되지만 많이 다르다는 생각이다. 멋의 사전적 의미가 ‘차림새, 행동, 됨됨이 따위가 세련되고 아름다움’이기에 스타일과 유사하긴 하다.


“멋과 스타일을 자세히 분석해 보면 정반대의 성격이 드러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스타일은 격식화 된 일정한 법칙, 그리고 특정한 양식과 질서를 의미한다. 혼돈되어 있는 것을 어떤 틀 속에 통일화하는 것처럼, 산만하고 무질서한 것에 어떤 법칙을 부여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중략) 그러나 멋은 그와는 판이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오히려 일정한 격식, 특정한 경향, 그리고 일반적인 질서와 그 규칙을 깨뜨리게 될 때 멋이 생긴다.”

그는 스타일을 파괴할 때 멋이 생긴다고 강조한다.


“규칙에 사로잡히고 격식에 얽매여 있을 때 멋은 생겨나지 않는다. 차라리 그것은 고정된 스타일을 파괴하는 순간에 맛볼 수 있는 생의 진미라고 말할 수 있다. 형식의 가면에 은폐되어 있고 규칙의 사슬에 얽매여 있는 생을 거부하고, 그리하여 그 안에 감추어진 사물의 진미를, 자유로운 맛을 추구하는 것, 그것이 바로 멋의 참뜻이라 볼 수 있다.”


이어령이 말하는 멋은 기존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파괴해야 생겨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해온 대로, 남들이 하는 대로 따라 해서는 결코 멋쟁이가 될 수 없다는 얘기다. 기존 질서에 만족하지 않고 새로운 것을 창조해나갈 때 비로소 멋을 얻고, 즐길 수 있다는 얘기에 다름 아니다.


이런 생각은 이어령 본인이 자타가 공인하는 ‘창조의 아이콘’이기에 쉽게 하지 않았을까 싶다. 사실 그처럼 글을 많이 쓴다는 자체가 창발성(創發性)의 증거 아닌가. 좋은 작품을 기획하고 아름다운 문장을 풀어내는 데 그 바탕은 거의 전적으로 창의, 혹은 창조라고 봐야겠다.


이어령은 서울대 국문학과를 졸업하던 해 한국일보에 ‘우상의 파괴’를 선보인 데 이어 이듬해 ‘문학예술’ 지에 ‘비유법 논고’를 발표해 문학평론가의 길을 걷게 된다. 27세 젊은 나이에 중앙 언론사(서울신문) 논설위윈에 발탁돼 주목받았으며, 30세 때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를 펴내 베스트셀러가 된다.


 쉼 없는 작품 활동과 더불어 대학(이화여대) 교수로, 신문사(조선, 중앙) 논설위원으로, 출판인(새벽 편집위원, 문학사상 주간)으로 맹활약했다. 그의 창조적 발상은 88 서울 올림픽에서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개막식과 폐막식 식전 행사를 성공적으로 기획, 연출한 것이다. 특히 잠실 종합운동장에 굴렁쇠 소년을 등장시켜 세계인의 찬사를 받았다.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는 영감을 불러일으켰다는 평가였다. 이런 능력을 인정받아 노태우 정부 때는 초대 문화부 장관에 발탁되기도 했다.


이어령은 기획력과 문장력만 뛰어난 것이 아니라 말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30여 년간 대학 강단에 서기도 했고, 각종 강연과 세미나 등에 많이 참석했다지만 청중을 사로잡는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에게 멋을 한층 더하는 요소이다.


소설가 박완서의 말이다. “이어령의 담론은 동서고금을 종횡무진 막힘이 없이 해박하고, 신랄하고, 반짝이며, 자신만만하고, 팔팔 생동감이 넘쳤다. 그러나 그 모든 것보다도 값진 그의 담론의 미덕은 듣는 이가 싫증을 안 내게 하는 데에 있다.”( 박완서의 ‘64가지 만남의 방식’)


그를 상찬 하는데 글 솜씨와 말솜씨에서 그칠 수는 없다. 이어령은 그야말로 품격 있는 지성인이다. 20대에 벌써 한국 문학의 중심에 섰으니 목에 힘이 들어갈 만도 하지만 겸손은 그의 기본 심성이다. 부드러움과 여유, 그리고 잔잔한 미소는 그의 또 다른 트레이드마크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나쁜 구설에 휘말린 적이 없다. 내가 이 시대 최고의 멋쟁이 선생이라 부르는 이유다.


이어령이 말한 것처럼 멋은 자유다. 그리고 해방이고, 자율이다. 다들 멋지게 살고 싶다, 멋 부리고 싶다, 멋쟁이가 되고 싶다고 말하면서도 그것을 잡고자 행동에 나서지 않는 경향이 있다. 저변에 깔린 보수적 유교 문화 탓일 것이다. 


이어령이 가르치는 멋의 전범은 아닐지라도 길지 않은 인생, 멋을 조금 부리며 신명 나게 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세상이, 혹은 남들이 짜 놓은 인식의 틀에 평생 나를 꿰맞추며 살기엔 우리 인생이 너무 각박하지 않은가. 남의 평가, 혹은 남의 눈에 조금은 둔감해지면 안 될까.


나이 들 때까지 기다릴 것 없다. 사회생활 한창 하는 30대, 40대부터 창의성을 발동시켜 자유를 구가해보면 어떨까. 


지인 중에 멋쟁이 공무원이 있었다. 행정고시에 합격한 전도 양양한 30대 중반 청년이었다. 중앙부처에서 과장으로 근무할 때 그는 수시로 노타이 차림으로 출근했다. 노타이 차림이 ‘예의 없음’의 상징일 때였다. 윗사람들이 가끔 꾸지람(?)을 했지만 별일은 없었다. 토요일 근무 때는 아예 청바지와 컬러 남방셔츠 차림을 했다. 그래도 별 문제는 없었다. 동료들 사이에선 소신 있는 멋쟁이 공무원으로 통했다. 


이런 사람은 안주하지 않는다. 그는 사표를 던지고 정치권에 뛰어들었다. 틀에 박힌 대로 일해야 하는 공무원이 싫었기 때문이다. 음악 좋아하는 친구들과 어울려 악단을 만들고 음반까지 냈다. 서울에서 3선 국회의원을 지냈다.


 멋을 찾겠다고, 멋쟁이가 되겠다고 해서 제멋대로 살아도 된다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자유와 자율을 찾고자 구속과 타율에서 벗어나는 몸짓을 하되 방종으로 흘러서는 곤란하다. 자칫 멋의 기본 요건인 품격을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괜히 남에게 피해를 입힐 수도 있다.


사실 멋에는 고상한 품격과 운치를 갖춰야 하기 때문에 착한 심성과 여유가 필요하다. 단순한 풍류에 그칠 수는 없다. 위대한 극작가와 멋쟁이 영문학자의 가르침은 언제 들어도 멋있다.

 

“꽃에 향기가 있듯 사람에겐 품격이 있다. 그런데 꽃이 싱싱할 때 향기가 신선하듯 사람도 마음이 맑을 때 품격이 고상하다. 썩은 백합꽃은 잡초보다 오히려 그 냄새가 고약하다.”(윌리엄 셰익스피어)


“폐포파립(敝袍破笠)을 걸치더라도 행운유수(行雲流水)와 같으면 곧 멋이다. 멋은 허심하고 관대하며 여백의 미가 있다. 받는 것이 멋이 아니라 선뜻 내어주는 것이 멋이다.”(피천득)


여기에 나는 한 가지만 보태고 싶다. 나름대로 지성을 갖추는 게 중요하다. 멋을 타고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어차피 스스로 다듬어야 한다. 꾸준히 지적 노력과 활동을 하는 사람과 그런 것 하지 않는 사람을 비교해 보라. 멋쟁이의 격이 다르지 않을까.  



인용하거나 참고한 문헌

<읽고 싶은 이어령> 이어령, 여백, 2014

<이어령 평전> 호영송, 문학세계사,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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